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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해저 유물

영상소개

  • 분야

    문화

  • 생산연도

    1990

  • 감독

    김금동

  • 생산기관

    국립영화제작소

  • 관리번호

    CEN0005774

  • 재생시간

    21분 30초

영상해설

  • 1975년 8월 전남 신안에서 발견된 신안 해저 유물’의 발굴 조사 과정 및 인양된 유물 소개

영상자막

  • (00:21)1975년 8월 20일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방축리 도덕도 앞바다에서 어로 작업을 하던 한 어부가 물때에 맞춰 내려놓은 그물을 건져 올리던 중, 우연히 청자 화병 등 6점의 유물을 인양하였습니다. 어부 최평호 씨는 즉시 인양된 유물을 신안군청에 신고하였으며 신고된 유물은 전문가들의 감정 결과 중국 송·원대 청자로 판명되었습니다.
    
    (00:54)이에 문화재관리국에서는 현지 조사 활동을 통해 다량의 유물이 바다에 있음을 확인하고 어부에 의해 인양된 위치를 중심으로 2킬로미터(km) 정도의 해역을 문화재 보호 구역으로 지정했습니다.
     
    (01:14)문화재관리국에서는 1976년 10월 26일부터 76년 12월 1일까지 해군과 합동으로 1, 2차에 걸친 예비 조사를 실시하여 다량의 유물 외에 선체가 침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조사단을 구성, 발굴에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
    
    (01:50)1, 2차에 걸친 예비 조사 기간을 통해 인양된 유물은 청자 1,260여 점 등 1,990여 점에 달했습니다.
    
    (02:05)송·원대 것으로 밝혀진 유물이 발견된 장소는 수도 서울에서 약 440킬로미터(km) 떨어진 한반도 서남단 신안 앞바다로, 목포시에서 46킬로미터(km) 떨어진 임자도에서 3.5킬로미터(km), 증도에서 2킬로미터(km) 떨어진 바다 한 가운데입니다.
    
    (02:28)신안 침몰 선박은 중국을 출발하여 일본을 향하던 무역선으로 보이는데 그 당시에 항로는 황해를 우회하는 북로와 제주도를 통과한 후 일본 고지로 향하는 남로 등이 있었습니다.
    
    (02:46)발굴 지역의 평균 수심은 20미터(m) 내외이며 해저 상태는 진흙과 뻘로 돼있고 시계가 매우 불량하며 물의 흐름이 2.5노트(knot)에 이르는 매우 급한 조류현상을 보여 하루 1, 2회밖에 작업을 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03:07)문화재관리국에서는 1, 2차에 거친 예비 조사 과정을 마치고 해군 5150부대의 협조로 1977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조사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발굴에 앞서 먼저 현장을 보전하고 장소 표시를 하기 위해 부표를 설치했습니다.
    
    (03:33)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이 지역에서 잠수부를 고용한 계획적인 불법 인양 사건이 발생해 청자 122점을 몰래 인양해 매매하려다가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발굴단은 이 같은 불법 인양을 방지하고 현장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바닷속에 유물 상태를 자세히 조사하는 한편 불법 인양될 우려가 있는 표면에 노출된 유물을 우선적으로 인양했습니다.
    
    (04:11)인양 해역은 조수의 간만 차가 심하고 조류의 속도가 매우 빠를 뿐만 아니라 유물이 뻘에 묻혀있는 등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수중 발굴 작업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04:29)해군과 협조, 대형 군함을 모선으로 해군의 유능한 심해 잠수사를 동원, 발굴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04:42)발굴 도중 1, 2차에 걸쳐 인양된 유물을 정리, 옮기는 과정에서 신문 방송 기자들에게 공개됐는데 엄청난 양의 유물과 문화재급 자기류 등의 발굴 실적에 이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04:59)또 발굴 도중 미국의 해양 고고학자 돈 키스(Donald H. Keith)씨가 현장을 탐사, 신안 해저 발굴이 과거의 예가 없는 매우 어려운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05:18)인양된 유물은 대부분 원대의 유물로 판명됐으며 일부 송대 유물이 섞여있었습니다. 이번에 대량으로 인양된 유물로 중국 도자기 연구와 그 당시 무역 관계 및 문화 교류 연구 등에 큰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었습니다.
    
    (05:39)인양된 유물을 살펴보면 주로 청자, 청백자, 백자 등이며 이외에 흑유, 잡유 등 도자기 류와 금속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05:55)작업실은 모선과 작업선의 거리를 100여 미터(m)로 유지해 안전과 작업의 능률을 높혔습니다. 유물과 함께 선체로 보이는 나무 파편들이 인양돼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를 통해 침몰 선체 윤곽과 규모가 확인됐습니다.
    
    (06:25)이를 토대로 확인된 선체의 가상 크기는 우현이 27.3미터(m), 좌현이 23미터(m)로 추정되고 폭은 앞부분이 6미터(m), 중심 폭은 7.6미터(m), 선미가 6.7미터(m)에 이르고 있습니다.
    
    (06:51)바다 밑에 깔린 뻘 때문에 발굴에 많은 애로사항이 발생해 빨간색과 하얀색의 야광 페인트로 칠한 가로 6미터(m), 세로 4미터(m)의 철제 구획틀 4개를 만들어 해저에 묻혀있는 선체 위에 설치, 고정시켜 구획 순서에 따라 인양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07:19)철제 구획틀인 크리트의 설치에 따라 보다 체계적이고 정밀한 조사와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07:32)철제 구획틀은 그림과 같이 설치됐습니다.
    
    (07:41)발굴 작업은 문화재 위원 및 전문 위원으로 구성한 지도 위원 및 발굴 위원들과 수시로 자문 및 토의 과정을 통해 발굴에 대한 방법과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08:00)발굴 작업에 앞서 국내 잠수사들은 철저한 사전 교육을 통하여 유물의 손상이 없이 정밀하고도 안전한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08:14)수차에 걸친 발굴 작업으로 청자를 비롯한 도자기류 외에 많은 양의 자단목이 인양됐습니다. 선체의 격벽 내부에 다량으로 적재된 이 자단목은 원산지가 동남아시아로서 당시 무역 품목 및 항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08:42)인양된 자단목에는 한자로 된 부호나 아라비아 숫자가 새겨져 있어 주목을 끌었습니다.
    
    (08:56)또 여러 조각의 나무로 만든 둥근 통도 인양됐는데 대나무로 테를 돌려 만든 것입니다.
    
    (09:13)인양된 유물들은 인양된 그리트 별로 실측과 세척 후에 포장됐습니다.
    
    (09:28)인양된 도자기류는 주로 중국의 최대 도자기 산지인 경덕진요 제품과 남송대 용천요에서 만들어진 자기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고려청자도 몇 점 인양되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09:54)이외에 28톤(t)이 넘는 동전이 인양됐는데 40여 종류의 화폐로 왕조별로 당, 북송, 남송, 요, 금, 원나라 등의 화폐들로 구성됐습니다.
    
    (10:12)유물의 본격적인 인양 작업은 크게 2단계로 나누어 실시됐는데 1단계 인양 작업은 1, 2차에 걸친 예비 조사 후 1977년부터 78년 여름까지로 주로 선체 상부에 적재됐던 유물들을 인양했습니다. 상부는 갑판을 비롯해 거의 파손되어 형태를 상실하였는데 충해로 인한 부식작용이 가장 큰 원인으로 분석되었습니다.
    
    (10:45)2단계는 79년 6월부터 84년 8월까지 진행됐는데 뻘 속에 묻힌 선체 하단부까지 적재된 유물을 인양했으며 선체 내부에 퇴적된 토사를 제거하는 작업과 병행해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작업이었습니다.
    
    (11:07)특히 7차 발굴에는 원나라의 관청용기임을 나타내는 청자접시가 인양되어 시대 구분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11:21)선창 내부에서 인양된 유물 중 일부는 포장용 목상자의 거의 완전한 상태로 10여 개가 인양되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11:33)이 목상자는 규격이 일정치 않았으나 가로 70센티미터(cm), 세로 40센티미터(cm), 높이 50센티미터(cm) 정도로 제작되었으며 목상자의 겉에는 한문으로 ‘대길’, ‘자현’ 등의 붓글씨가 적혀있었습니다.
    
    (11:53)유물을 담은 사이사이에는 한방 약재인 창추리 뿌리를 넣어 충격을 방지했으며 그 위에는 향목을 채워 움직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내부에는 10개 단위로 포장된 도자기들이 수십개씩 꽉 채워져 있었습니다. 상자 안에 유물들은 실측을 마친 후 꺼내졌습니다.
    
    (12:34)수습 도중 유물을 묶었던 끈의 흔적을 찾을 수 있어 매우 흥미로웠으며 부식된 유물에서는 천으로 쌓았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13:16)상자 안의 유물을 수습하는데 청자 주전자 뚜껑이 없어 궁금했었는데 그 뚜껑은 상자 밑에서 발견돼 또 한 번 시선을 모았습니다.
    
    (13:44)인양된 각종 유물들은 종류별로 분류되어 과학적인 보존 처리 작업을 통하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습니다.
    
    (14:00)인양된 도자기들 중에는 그 표면에 조개껍질들이 단단히 붙어있는 것들이 적지 않았으나 해저면하 갯벌에 묻혀있던 도자기들은 깨끗했습니다.
    
    (14:13)특히 금속류의 경우 많은 염화물의 생성으로 인한 부패 가속화 현상을 막기 위해 탈염 처리를 집중적으로 실시했으며, 확인할 수 없는 문양과 형태 등은 X선 투시 촬영으로 확인했습니다.
    
    (14:37)신안 해저유물의 과학적 보존 처리는 육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다른 많은 어려움과 문제점이 있었으나, 1980년에서 87년까지 7년에 걸쳐 최선의 방법을 총 동원하여 이뤄졌습니다.
    
    (15:04)이번 발굴 조사에서 작성한 실측 도면은 약 80여 장에 이르며 촬영에 소요된 사진 원판은 수천 장에 이르고 있습니다.
    
    (15:39)보존처리가 끝난 유물은 꼬리표를 떼고 그리트별로 유물의 굽 밑에 고유번호를 기입하여 분류해 이 번호표에 따라 유물이 나온 위치를 알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습니다.
    
    (16:00)지금 보시는 것은 종류별로 분류 작업을 끝낸 유물들입니다.
    
    (16:19)8년간 10차에 걸쳐 발굴된 유물의 종류와 수량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청자 만 2,377점, 백자 5,311점이며 그 외에 도자기와 금속류, 석제 등 모두 2만 2,040여 점이 인양됐으며 28톤(t)에 이르는 다량의 동전과 자단목 1,017본, 선체 파편이 445편이 발굴 됐습니다.
    
    (16:52)신안 해저 발굴 작업을 통해 인양된 주요 유물들을 살펴보면 만 2,300여 점이 인양된 청자의 경우 거의가 중국 청자이고 우리나라의 고려청자는 불과 7점에 불과했습니다. 중국 청자의 경우 거의 전부가 용천계 청자로 밝혀졌습니다. 중국 제1의 청자 산지인 용천요에서는 송나라 때부터 청자를 만들어왔는데 남송 이후로 그 질이 뛰어나 해외 수출 도자기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원대 이르러 대량 생산으로 질이 떨어져 명성을 잃기 시작하다가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 그 명맥이 끊어졌습니다. 인양된 유물은 질적인 면에서 우수한 제품은 불과 5퍼센트(%)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보통 질 이하의 저급품들로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대량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17:50)보시는 자기는 매우 우수한 제품으로 종류는 매병, 청자연적, 벼게 등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8:05)청자 다음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백자의 경우 크게 나누어 청백자와 백자로 구분되는데, 신안 유물의 백자는 주로 청백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18:20)이외의 흑유자기나 토기류 등이 인양됐는데 주로 화분이나 항아리, 접시 등이 발굴됐습니다.
    
    (18:33)한편 금속류는 730여 점이 인양됐는데 향로, 술잔, 접시, 자물쇠, 장신구 등 매우 다양한 물건들이었습니다.
    
    (18:45)특히 계수나무 아래서 방아를 찧고 있는 그림이 새겨진 접시가 발견돼 눈길을 끌었습니다.
    
    (18:57)금속류 중 유일하게 인양된 고려동경입니다.
    
    (19:04)금속류 제품도 질이 그리 우수한 편이 아닌 것으로 미루어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기를 당시 중국보다 문화가 떨어진 타국에 단순한 교역품으로 이송 중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19:27)인양된 유물에는 소량이지만 일본식 문장이 새겨진 칠기 접시와 칼자루, 칼코, 나무로 만든 게다 등 일본 유물이 발견됐으며 364점에 이르는 많은 양의 물표가 인양됐는데 일본식 이름으로 나타나 이 배의 유물 소유주가 일본인으로 보입니다.
    
    (19:55)유물과 더불어 445편에 이르는 선체 파편들이 인양됐는데 현재 문화재연구소 목포 보존 처리장에서 보존 처리 중에 있습니다. 
    
    (20:09)이 배는 우현 쪽으로 경사져 묻혀있었는데 조사 결과 중국에서 건조된 배로 확신 시 됐으며 원대인 서기 1323년 고려 충숙왕 3년에 침몰된 것으로 보여 집니다. 현재 실물의 5분의 1에 이르는 크기로 모형선이 복원되고 있습니다.
    
    (20:40)1987년 4월 17일 신안군 증도면에서 신안 해저 유물 발굴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습니다. 장장 9년에 걸쳐 방대한 양의 유물과 선체 파편 등이 인양됐습니다. 
    
    (20:57)급한 조류와 시계 제로의 암흑세계와 다름없는 악조건 속에서도 발굴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우리나라는 수중 고고학이라는 새로운 학술 발굴 조사에 새 장을 열게 됐으며 세계에서 중국 송·원대 유물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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