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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출발

영상소개

  • 분야

    사회

  • 생산연도

    1957

  • 감독

    김영권

  • 생산기관

    공보실 선전국 영화과

  • 관리번호

    CEN0002038

  • 재생시간

    10분 47초

영상해설

  • 전쟁미망인의 삶을 각색한 영상기록이다. 19세에 결혼하여 6.25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전쟁미망인이 식모살이를 하다가 직업교육시설인 국립자매원에서 미용교육을 받고 취직하여 자립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상자막

  • (00:01)서울 시내를 멀리 떠나 평화스러운 농촌인 양주군 구리면에는 국립서울자매원이 있습니다.
    보건사회부 산하에 있는 이 자매원에서는 많은 불우(不遇)한 여성들을 수용(收容)하고 그들이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보호하며 지도(指導)하고 있습니다.
    이 미용부에서는 원생들이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머리를 가꿀 수 있나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00:36)26세의 젊은 전쟁미망인인 나 박순애(朴順愛)가 이곳에 온지도 벌써 1년이 지났으며 나의 기술도 그간 많은 진보를 이루어서 선생님의 칭찬까지도 들을 만큼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떠나야 할 날짜가 가까워옴에 따라 아직도 취직자리를 구하지 못한 나의 심정은 퍽 불안했으며 그럴수록 지난날의 그 쓰라린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01:07)나는 열아홉 살 때 결혼했으나 신혼기분도 채 사라지기 전에 6.25동란이 일어나 남편은 조국의 자유를 방어하기 위해 용약(勇躍) 군문(軍門)에 입대하여 멸공전선에 나섰습니다. 그 후 나는 셋방살이 단칸방에서 남편이 보내주는 군대봉급과 시집의 원조로 근근이 생활을 해가면서 남편이 개선(凱旋)해 오는 날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편집배원이 전해주는 한 장의 편지는 나를 비탄(悲歎)과 절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가신님. 불러본들 돌아올 리 없었으며 나는 남편의 생전모습 앞에 엎드려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02:14)동리(洞里)사람들의 동정으로 간단하게나마 장사(葬事)도 지내고 슬픔도 어느 정도 가라앉자 첫째로 걱정되는 것이 앞으로 살아갈 일이었습니다. 국민학교를 나왔을 뿐 아무런 기술도 없는 나는 남의 집 식모를 살러 가기로 하고 즐거웠던 추억(追憶)이 잠겨있는 세간살이를 정리하고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식모살이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도 나의 심중(心中)에는 늘 어떤 기술을 배워서 자립생활을 해보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03:11)그런데 어느 날 이웃집 부인(婦人)이 찾아와서 나도 잘 아는 영순엄마가 현재 국립서울모자원이라는 곳에 가 있으며 거기서는 나와 같은 전쟁미망인을 수용(收容)하고 직업기술까지도 가르쳐준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내 맘을 퍽 끄는 이야기였습니다.
    
    (03:35)며칠 후 나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 있는 국립서울모자원을 찾아갔습니다.
    과연 영순엄마는 그 곳에 있었습니다. 경찰관인 남편이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서 전사해서 미망인이 된 그는 여섯살된 영순이를 데리고 이곳에 온 지 벌써 반년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나를 원장선생님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친절(親切)한 원장선생은 내 이야기를 퍽 동정해서 들어주셨으나 이 모자원은 어린애를 가진 미망인만 수용(收容)한다고 하면서 그 대신 독신 여성만을 수용하고 있는 국립서울자매원이라는 곳이 있으니 찾아가보라고 소개장을 써주셨습니다.
    
    (04:32)그래서 나는 자매원을 찾아갔습니다. 이곳 원장선생님은 소개장을 보신 다음에 이곳에는 나와 같이 불우한 여성이 많이 있으니 서로 위로하며 좋은 기술을 배워 훌륭한 자립생활의 기반을 닦아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04:51)이날부터 이곳 원생이 된 나는 우선 저녁식사를 하게 되어 60여명이 모인 단란한 식사 자리에서 여러 원생들과 인사를 교환했습니다.
    그들 얼굴에는 단체생활을 통해서 자기들의 불행을 잊고 새로운 인생출발을 해보려는 의지와 명랑(明朗)한 희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날 저녁부터 나는 난호실(蘭号室)에서 다른 다섯 명의 원생들과 함께 거처(居處)하게 되었습니다. 취침시간까지는 자유시간이라 책보는 사람에, 수(繡) 놓는 사람에, 모여앉아 이야기하는 사람에, 모두 자유로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취침시간이 되었으나 나는 지나간 날의 고생스럽던 생활을 회상하고 내일부터의 새로운 생활을 생각하느라고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05:58)다음 날 아침, 나는 우선 이곳의 직업 보도(補導) 시설(施設)을 구경했습니다. 이곳에는 직조부를 비롯해서 이발부, 양재(洋裁)부, 자수(刺繡)부, 미용부의 다섯 가지 기술부가 있었으며 각 부마다 선생님을 초빙(招聘)해서 본격적인 기술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습(實習)의 분위기도 모두 가족적이여서 대단히 명랑했습니다.
    
    (06:31)끝으로 나는 미용실에 가 보았습니다. 수많은 원생들이 서로서로의 머리를 실습(實習)재료(材料)로 해서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매만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구경하는 동안에 이 미용실이, 나의 취미(趣味)에 맞는 기술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이 미용실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06:57)그 후 1년 동안 나는 평화스런 생활 속에서 모든 시름을 잊고 명랑하게 살아왔습니다. 그 동안 나의 미용기술도 많은 진보(進步)를 거듭해서 요즘에 와서는 훌륭한 한 사람의 미용사 노릇을 할 수 있을 만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떠날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아직 취직 자리를 구하지 못한 나는 마음이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제 저녁에 받은 영순엄마의 편지를 다시 한 번 꺼내 읽어봤습니다.
    
    (07:30)나는 지금 국립서울모자원을 나와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에 있는 기독교 봉사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에덴원(園)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아침마다 예배(禮拜)를 봅니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모자원에 있을 때 다니던 교회에서 알선해 준 덕택입니다. 에덴원은 우리와 같은 전쟁미망인을 위한 수산장(授産場) 입니다. 즉, 거처할 집은 있으나 수입이 없어 곤란한 미망인들에게 일거리를 주어서 생활의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망인들은 각기 기술에 따라 한복부, 자수부, 이불부, 염색부, 직조(織造)부, 양재부 등에서 일을 합니다.
    
    (08:17)여기서 생산되는 각종 제품은 한미(韓美)양국군의 PX를 비롯해서 각 백화점, 상점 등을 통해서 판매되며 그 수입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모자원에서 양재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여기서도 양재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에덴원에서의 수입과 정부에서 나오는 연금과 구호(救護)양곡을 가지고 영순이와 같이 자립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08:59)집은 현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에 있으며 이 집도 전쟁미망인의 정착주택으로 정부에서 마련해 준 것입니다. 온돌방(溫突房) 둘과 부엌으로 된 아담한 이 집은 현재 연부(年賦)로 대금(代金)을 부어나가고 있으니 수년 후면은 내 집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머지않아 자매원을 떠날 아우님도 좋은 직장을 얻어 행복한 생활을 시작하시도록 기원합니다.
    
    (09:26)내가 편지를 다 읽고 나니 원장선생님이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것은 기쁜 소식이였습니다.
    이번 수료생들을 위해서 원장선생님이 각처에 취직(就職) 부탁(付託)을 해 놓은 중, 제일 먼저 어느 미용원에서 미용사를 구하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얘기는 간단히 결정됐습니다. 처음이라 보수는 작지만 미용원에서 숙식을 시켜주기로 됐으며, 그와 같이 해 나가는 중에는 방을 얻어 자립생활을 할 만한 경제적 여유도 생길 것이라고 합니다. 
    
    (10:01)다음 날부터 나는 희망을 안고 새 미용원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이 불우한 환경에서도 굴(屈)하지 않고 곤궁(困窮)과 싸워가며 스스로의 살길을 찾아가는 전쟁미망인은 전국 각지에 수많이 있으며 그들은 전국 백사십일개소의 모자원, 자매원 또는 수산장 같은 직업보도시설을 통해서 자립생활에 필요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삶에 대한 의욕과 투지를 견고히 해서 자신과 희망에 찬 새로운 출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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