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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하루

영상소개

  • 분야

    사회

  • 생산연도

    1957

  • 감독

    오영진

  • 생산기관

    공보실 선전국 영화과

  • 관리번호

    CEN0002043~CEN0002045

  • 재생시간

    22분 51초

영상해설

  • 조선 태조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고 왕실, 종묘, 성균관, 도성, 하수도, 상업지구를 건설하였다. 19세기 말, 기독교와 천주교 전파,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설립, 제중원 등 의료시설 설립, 전등·전화시설 설립, 단발령 선포 등 개혁정책으로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6.25전쟁 후 서울은 원조로 재건되어, 소비의 도시, 생산의 도시, 교육과 문화의 도시가 되었다. 시민들은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인구 증가로 위성도시를 형성하여 국제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상자막

  • (00:01)한국의 수도 서울은 동경 126도 북위 27도에 위치하고 그 총 면적은 26만 8천 평방킬로미터나 되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도봉산과 북한, 관악 등 웅장하고도 수려한 산이 둘러싸인 아늑한 터전에 자리를 잡고 앞으로는 한강수가 영령이 흐르고 있으니 실로 우리의 서울은 산자수명한 경성의 땅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서울은 로마와 런던에 버금가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입니다. 
    
    (00:36)문헌상으로는 지금으로부터 1530년 전인 신라 진흥왕 시대의 임금이 이곳에서 사냥을 하셨다고 했으니 실로 우리 민족과 함께 자라난 역사의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으로부터 560년 전 이조 태조대왕께서 여기에 도읍하신 이후로 우리의 서울은 우리와 함께 그 운명과 희로애락을 같이 해 왔습니다. 한 때 왜적에 유린된 바 있어 일시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는 비극도 겪었으나 그러나 우리의 서울은 모든 환란을 겪고도 민족과 함께 굳세게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01:20)서울은 소위 풍수학 상에서 말하는 명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동쪽에는 청룡이 되는 낙타산이 솟아있고 북쪽에는 현무가 되는 백악이 솟았고 서쪽에는 백호가 되는 인왕산 남쪽에는 주작이 되는 남산이 솟아 네 개의 산에서 흐르는 물은 모두 수구문으로 흘러 내려가서 한강수와 합치어 명당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이조 태조대왕은 이 명당을 얻어 정도전, 권중이 등 건국의 공신으로 하여금 왕도를 건설케 했습니다. 그들은 왕명을 받들어 먼저 5만6천여 평의 터전 위에 왕실의 사당인 종묘를 건설하게 했으니 이것이 곧 서울의 최초의 도시계획이었습니다. 
    
    (02:10)다음으로 신도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하여 윤환의 미를 다한 웅장하고도 정묘한 5대 궁궐을 건조했습니다. 이 모든 궁궐은 대부분 임진왜란 때 병화로 말미암아 소실되었고 그 후 개수되었습니다. 경복궁은 역대 임금의 정궁이었으나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로 폐궁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창덕궁은 속칭 동관 대궐이라 하여 태조 3년에 창건된 이후 단종대왕의 서글픈 이야기와 함께 잊지 못할 궁궐입니다. 이 궁궐은 한때 연산군, 광해군 등 우매한 폭군의 연락의 장소로 이용되어서 허다한 비극과 죄악의 씨를 뿌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숙종대왕 영조대왕 등 이조 중흥의 명군이 인정을 베풀어 이조 중엽의 찬연한 문화를 꽃피우게 했습니다. 6.25동란 전까지 윤 황후께서 홀로 여기에 머물러 옛날의 존엄과 영화를 추억하신 것도 바로 이 창덕궁입니다. 
    
    (03:13)창경궁 터는 본래 창덕궁에 부속되어 두 공간 사이에 확연한 경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약 500년 전인 제9대 임금 성종대왕 때 건조되었습니다. 1907년 융희황제의 용단으로 일반국민에게 개방된 후 권농장 터에는 연못을 파고 보루각과 춘당대 일부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이 되어서 시민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03:39)덕수궁은 오래 별궁으로 있어 이조역사상 그리 큰 역할을 하지 않았으나 그 후 한국의 풍운이 급박했던 19세기 말엽에 이르러서 이조말 고종황제께서 일본의 핍박을 피해 한 때 이곳에 피해 계시다가 1905년에 이르러 마침내 굴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을 이곳에서 체결하여 드디어 운명의 궁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04:01)궁궐을 창건한 후 태조대왕은 사직단을 두어서 토지와 오곡의 신에게 제사를 드려 국가의 안태와 민생의 안락을 산천에 기도했고 국가의 유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교육시설을 설치했으니 태조 7년에 현 명륜동에 국가의 최고 학부로서 성균관을 비롯해서 동서남중의 사부에는 사부학당 즉 사학을 두었으며 이밖에도 학술에 뛰어나게 우수한 문관과 학사에게는 특별 휴가를 주어 자유로이 연구하고 독서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해서 학술의 발전과 문정일치를 꾀했던 것입니다. 
    
    (04:42)왕도의 안전을 도모하고 외세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 사대문과 사서문의 위치를 정한 뒤 다시 이것을 연결하는 성벽을 쌓았으니 이것으로 도성의 외곽은 완성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성벽의 총 연장길이는 17킬로미터에 이르고 그 높이는 42피트이며 성벽을 완성하기까지는 19만 7천명의 시민이 동원되고 98일간이라는 시일이 걸렸습니다. 성벽과 사대문으로 서울은 철옹성같이 보호되었습니다. 성내외의 시민들이 통행하기 위해서 종각을 세워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렸으니 새벽 네 시에는 파루의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저녁 아홉 시에는 인정의 종을 울려서 성문을 닫은 다음 공무이외의 통행을 금지했습니다. 
    
    (05:46)도시 건설상 중요시설의 하나인 개천 즉, 하수도 공사는 태종 12년 2천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30일간의 공사로 시가를 동서로 끄는 청계천에 개천을 파서 수구문으로 빠지게 하고 그 위에는 많은 다리를 놓아 시민들의 왕래를 편케 했습니다. 특히 수표교에는 비가 내릴 때에 늘어가는 청계천의 증수의 도를 알기 위해서 수표석을 세워서 척수를 새겨 놓았습니다. 
    
    (06:23)행정상의 구분으로는 도성을 5부로 구획하고 5부는 다시 52방으로 나누고, 방 밑에는 계, 동, 통, 호를 두었습니다. 왕궁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편에다가는 6조를 두어 이것을 행정지구로 만들고 종로에다가는 십자로 한복판에 종각을 세우고 이 일대를 상업지구로 만들었습니다. 이리하여 서울은 임진, 병자의 두 난리를 겪으면서도 별로 큰 변천도 풍파도 없이 남촌에 맛좋은 술을 마시고 북촌에 떡을 먹으면서 10만여 명의 시민이 문자 그대로 태평연월을 노래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07:19)19세기말 새로운 사조와 문명개화의 조류는 드디어 한반도에서도 물밀 듯이 밀려왔습니다. 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쇄국의 문을 굳게 닫고 있던 한양에도 개화와 문명의 봉화는 높이 올랐습니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다음 해에 영국과 독일과의 우호조약체결을 계기로 해서 서구라파와 북미합중국의 선구자들은 서울을 찾아왔습니다. 한말의 진취적이고 애국적인 청년지사들은 그들을 통하여 선진국의 민주주의를 흡수하고자 노력했으며 보다 찬란한 조국을 건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또한 우리 선각자들은 그들과 힘을 합하여 메마른 이 땅에 새로운 문화를 도입해서 조국의 발전과 신문화 개척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08:22)기독교가 이 땅에 광범하게 전파된 것도 이와 전후해서입니다. 외국선교사들은 정부의 허락을 얻어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 출판했고, 서울의 각 교파의 교회와 성당을 건립해서 기독교의 선교사업에 종사하여 점차로 재래의 우리 종교인 유교, 불교와 함께 우리 신앙생활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08:47)1880년 구한국정부는 이 땅의 여명기를 촉진하기 위해 새로운 교육기관으로 배재학당의 설립을 허가하고 수많은 영재를 길러 냈습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해서 여성교육에 주력함으로써 가정에 박혀 있던 여자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켰습니다. 그리고 옛날식인 활인서, 혜민국 같은 보건의료 대신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을 개설해서 민중 보건에 진력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수도 서울을 비롯한 경향 각처에 충족한 보건시설과 함께 우수한 의과대학이 건설되었습니다.
    
    (09:40)문명의 여명기를 맞이하여 서울에서는 언론의 창단을 위한 각종 일간신문이 발간되어 비로소 민주주의가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서울시민도 전기의 혜택을 받게 됐고 광무 12년에는 자연수를 사용하던 서울시민에게 비로서 수도를 공급하고 그 밖에도 전등, 전화, 교통기관 등 각종 문명시설을 설치했습니다.
    
    (10:13)정부는 1895년 단발령의 선포와 함께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채택해서 국민생활의 근대화를 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950년 공산적부의 불법침략은 500여년을 두고두고 쌓아올린 아름다운 우리의 수도 서울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임진, 병자의 두 난리에 비할 수 없이 여지없이 파괴된 서울 거리,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정과 재산과 생명과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비참과 굶주림과 질병과 절망뿐이었습니다. 서울은 역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크나큰 비극을 겪었습니다.
    
    (10:56)그러나 서울은 잿더미에서도 날개 치며 소생하는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났습니다. 옛날 우리는 남에서 침범하는 왜적을 물리쳤고 북의 오랑캐를 방어했습니다. 이에 또한 소련 적군을 밀어냈으니 이것은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서울의 의지이며, 또한 한국의 의지인 것입니다.
    30%이상 파괴되었던 시내의 일반시민 가옥은 주택영단과 유엔원조기관의 비상한 노력으로 간이하고도 근대적인 시설을 구비한 재건주택으로 전쟁으로 집 잃은 시민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11:32)한 가정은 우리 사회생활의 한 단위입니다. 새로 꾸며진 아담한 우리 가정은 또한 우리네 살림살이에 거점이며 새 세계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이리하여 서울의 하루는 기운차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리를 더욱 아름답게 하고 우리의 가정의 평화를 수호하고 우리의 나라를 보다 번영케 하려는 시민들의 불타의 의욕과 굳은 신념으로 서울의 아침거리는 활기 있고 명랑한 혼잡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때 모든 것을 공산적부의 포탄과 탱크 아래 유린당했던 수도서울의 시민은 가난과 신고와 싸워 이기고 불안과 공포를 물리치고 씩씩하게 다시 재기했습니다.
    
    (12:30)철저히 마비되었던 시내의 교통망과 통신망은 이제 완전히 복구되었고 60%이상 파괴되었던 시내의 도로는 또다시 깨끗하게 포장되었고, 80%이상 파괴되었던 시내의 관공서와 국회의사당, 호텔, 백화점 등 중요한 공공건물 등 큰 건축물도 우방 여러 나라의 뜨거운 우정과 원조로 재건 또는 개수되어서 옛날보다 더욱 아름답고 웅장한 자태를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3:03)서울은 소비의 도시입니다. 한강과 인천앞바다는 물론, 전국 어항에서 보내온 수산물은 일단 중앙어시장에 집하되었다가 상인의 손을 거쳐서 1백70만 서울시민의 단란한 식탁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주식물인 미곡과 서울 근교에서 재배되는 충분한 채소도 남대문과 동대문 등 대시장에 집하됩니다. 6.25동란 중 식량부족에 허덕이던 시민들은 농민들의 열성 있는 식량증산 덕택으로 식생활도 이제와서는 만족할 정도로 해결된 것입니다. 
    
    (14:05)서울은 생산의 도시입니다. UNKRA(운크라)의 원조와 우리 정부당국의 적절한 운영으로 해방 후의 출력량을 초과하는 23만 킬로와트의 전력의 공급을 얻어 영등포 일대는 기간산업 시설과 중공업 공장을 비롯해서 방직, 유지, 제분, 식료, 의류 등 일상생활 필수품 공장에 이르기까지 20여개 공장에서는 주야 겸용으로 생산 증강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생산의 증가와 함께 상업과 무역도 점차로 활기를 띄어가고 있습니다. 외래품과 밀수품의 범람으로 뜻있는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행정당국의 두통거리였던 상가도 오늘에 와서는 우수한 국산품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특한 공예품과 민예품 그리고 고려시대 이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도자기는 그 모양의 우아함과 디자인의 독특함과 견고한 질로서 높이 평가되어 중요한 수출품목의 하나로서 널리 해외에 그 판로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17:03)서울은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의무교육 실시로 15만 명의 서울 어린이가 87개 국민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그 교육방침도 재래의 암기식 교육을 버리고 실제에 임하여 응용할 수 있도록 어린이의 창의성을 발전시키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국민의 중견이 될 시내 중고등학교 수는 80교가 넘으며 여기에서 10만여 명의 청소년이 취학하고 있습니다. 실업교육에 있어서는 생산교육의 중요성에 감해서 1인 1기 교육으로서 국가 시책에 기여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과학기술 교육에 있어서는 각종 기술학교 및 고등학교에 필요한 일체 시설을 구비하여 과학기술의 보급 진흥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18:13)서울국립대학교를 위시하여 유교 재단으로 설립한 성균관대학, 불교재단으로 운영하는 동국대학과 미션계통의 연세대학, 이화대학과 민간재단에 의한 고려, 숙명 등 9개의 종합대학에서는 2만여 명의 남녀 대학생들이 국가의 내일을 짊어질 유위한 역군으로서 교양을 쌓고 학문의 진리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19:00)서울의 하루는 조용히 저물어 갑니다. 하루의 근로를 끝마치고 휴식의 어둠으로 잠겨들기 직전 서울의 밤거리는 차츰 불야성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일요일 엿새 동안의 근로를 끝내고 오늘은 안식의 날입니다. 이백수십 신구 교회당에서는 평화스러운 종소리와 찬송가가 흘러나옵니다. 시민들은 오늘의 휴일을 이용하여 강으로 들로 가족들을 동반하여 하루의 행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한강은 일 년을 통해 일반시민에게 놀이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창경원 동물원에는 세계 각지에서 구해 온 가지가지의 동물을 구경하려고 서울의 어린이들이 모여듭니다. 충분한 놀이터를 가지지 못한 어린이들에게 있어서 동물원은 그들의 낙원이며 여기에 있는 동물들은 누구보다도 친근한 그들의 벗입니다. 궁사장에서는 전통적인 궁사대회 그리고 각 경기장에서는 각종경기가 국민의 체위 향상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서울종합경기장에서는 여러 가지 국제 시합을 통해서 각 종목 경기에 있어서 세계올림픽 제패를 목표로 불꽃 튀는 연마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21:35)서울은 560년이라는 세월을 경과하는 동안 너무도 지역이 좁아졌습니다. 이조 건국 초 10만의 인구를 가졌던 서울은 오늘 17배의 인구로 팽창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서울도 교외로, 교외로 그 주변을 확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도시계획의 실시에 따라서 의정부, 소사, 김포 등을 포함하는 주말생활권을 형성하고 나아가서는 문산, 포천, 양평, 수원, 인천까지 확장하여 월말생활권을 형성함으로써 명실공히 국제적인 도시로서의 대 서울이 등장할 날도 멀지는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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