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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기록물

대한민국 헌법의 초석을 놓다 제1호 유진오 제헌헌법 초고

신용옥(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상임이사)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제정 과정

헌법초안(유진오의 "사법부 제출안") (1948년)
헌법기초분과위원회안(“권승렬안”)(1948년)

1948년 5·10 선거가 치러진 후, 제헌국회를 누가 처음 소집하고 최초 회의를 어떤 근거에 의해 운영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1948년 5월 21일 신익희 의원의 주선으로 ‘국회 소집을 위한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준비위원회는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국회의원예비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5월 27일 개최된 국회의원예비회의에서 국회법이 제정될 때까지 국회 운영에 관한 임시 규칙의 입안과 개원식 절차를 ‘국회소집을 위한 준비위원회’에 위임하고 5월 31일 제헌국회를 최초로 소집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5월 31일 개최된 제헌국회 제1회 제1차 회의에서 최고령자인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지명한 후 국회임시준칙을 의결하고, 이 준칙에 따라 이승만을 초대 국회의장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의장인 신익희와 한국민주당의 김동원을 부의장으로 선출한 후 오후 2시에 개원식을 했다.

6월 1일 제헌국회 제2차 본회의에서 ‘헌법 및 정부조직법기초위원회’(이하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한 전형위원 10명이 각 도별로 선정되었다.

이어 3일에는 전형위원이 선정한 30명의 의원이 헌법기초위원으로 확정되었고, 같은 날 열린 헌법기초위원회 1차 회의에서 유진오를 포함한 10명의 전문위원이 위촉되었다.

헌법기초위원회는 표결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3대 11로 유진오와 행정연구위원회가 합작한 『헌법초안(이하, 합작안)』 을 원안으로 하고, 미군정청 사법부 법전편찬위원회 『헌법기초분과위원회안(일명, 권승렬안)』을 참고안으로 하여 심의하기로 결정했다.

6월 3일 오후부터 헌법기초위원회 회의가 진행되어 세 번의 기일 연기 신청을 하면서 22일까지 총 16차에 걸쳐 회의한 끝에 6월 23일 헌법안을 본회의에 상정하게 되었다.

제헌국회는 6월 23~30일에 제1독회, 7월 1~7일에 제2독회, 7월 7일과 12일에 제3독회의 심의 과정을 거친 후 7월 17일 대한민국 제헌헌법을 공포했다.

유진오의 헌법 초안 기초

유진오 제헌헌법 초고(“유진오의 第一回 草稿”)(1948년)

유진오는 1947년 가을부터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조선법전편찬위원회의 헌법기초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헌법을 집필했다.

그러던 중 1948년 2월 하순부터 황동준, 윤길중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3월 하순에는 정윤환 판사의 도움도 받았다. 마침내 1948년 5월 초 그간 작업해 온 초안을 최종 손질해서 전문을 빼고 본문만 법전편찬위원회에 제출했는데, 이 초안이 『유진오의 제1회 초고(第一回 草稿)』 이다.

‘제1회 초고(第一回 草稿)’라는 제목 바로 아래에 작성 날짜가 ‘1948년 4월(一九四八年 四月)’로 되어 있다. 제1회 초고(第一回 草稿)의 조문 끝에는 유진오가 참조한 각국 헌법안이 있는데, 독일 바이마르헌법, 미국, 오스트리아, 일본(대일본제국헌법과 일본국헌법), 중화민국, 필리핀, 프랑스, 프로이센 헌법 등이다.

1948년 5월 초 유진오가 법전편찬위원회에 제출한 초안은 법전편찬위원회에서 유인(油印)하여 토의 자료로 삼았는데, 표지의 명칭은 『憲法草案(헌법초안, 이하 사법부 제출안)』 이고 표지를 제외한 총 17쪽의 등사물로 현재 보존되어 있다.

『사법부 제출안』 은 총 10장 115조로 되어 있는데, 조문 순서나 내용은 제1회 초고(第一回 草稿)와 거의 일치한다.

『사법부 제출안』 은 전통적인 의원내각제 정부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국무총리와 부대통령을 두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제6장 경제제도’를 독립된 장으로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위헌법률 심사를 법원이 아니라 헌법위원회가 하도록 한 점이 특징적이다.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의 심의 원안 및 참고안

유진오는 1947년 겨울방학 때부터 헌법초안 작업을 하고 있던 중에, 1948년 4월 경 신익희의 주선으로 행정연구위원회의 헌법 기초 작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유진오는 1948년 5월 초에 초안을 완성해 법전편찬위원회에 넘겼으나 법전편찬위원회의 심의에는 참석하지 않고 행정연구위원회와 함께 초안 작업을 계속했다.

행정연구위원회는 1945년 12월 초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의 주관 아래 조직되었는데, 주로 일제하에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관료 생활을 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행정연구위원회의 활동은 주로 반탁운동 준비사무, 자주시정 포고, 미군정 중단, 헌법·국회법·정부조직법 작성 등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창설·추진하는 사무를 맡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할 우익 정당·사회단체의 공동답신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행정연구위원회는 신익희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와 임시의정원 연석회의의 의결로 1946년 5월 하순 경에 해체되었다.

韓國憲法(한국헌법)(1946년)

행정연구위원회에서는 1946년 1월 10일부터 헌법초안을 기초하기 시작해 3월 1일에 완성했는데, 그 명칭은 한국헌법(韓國憲法) 이었고, 최하영, 장경근, 이상기, 강명옥, 윤길중, 박근영, 김용근 등 7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바이마르헌법과 중국의 오권헌법을 한국헌법(韓國憲法)의 기본적인 헌법 원리로 삼았다.

한국헌법(韓國憲法)을 작성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권 인수가 이루어지지 못하자 초안은 서랍에 넣어 둔 상태였고, 5․10 선거 실시를 즈음해 다시 초안 작업을 하게 되었다. 1948년 5월 14일부터 제헌국회가 열리는 31일까지 18일 동안 헌법초안을 기초했는데, 한국헌법(韓國憲法)기초 작업에 참석했던 최하영, 장경근, 이상기, 윤길중, 김용근 외에 차윤홍, 황동준, 노용호, 유진오가 새로 참가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헌법안이 ‘합작안’이었다.

유진오의 진술에 따르면, ‘합작안’은 자신의 ‘사법부 제출안’을 주로 하고 행정연구위원회의 한국헌법(韓國憲法)을 참고로 했다고 한다. 반면 행정연구위원회 위원들은 자신들의 한국헌법(韓國憲法)을 기초로 하고 ‘사법부 제출안’을 참고로 했다고 진술한다.

유진오의 ‘사법부 제출안’과 한국헌법(韓國憲法)은 모두 국회와 정부 형태를 양원제와 내각책임제로 했는데, ‘합작안’은 ‘사법부 제출안’에 비해 대통령보다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국무총리와 내각의 권한을 강화하는 대신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켰으며, 재판관의 임기 조항을 없애고 대법원에 위헌법률심사권을 부여하는 등의 특징을 보인다.

대개 ‘합작안’의 편제와 내용을 볼 때 ‘사법부 제출안’의 내용이 많이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합작안’이 어느 초안을 기본 내용으로 했는가 하는 점보다 두 초안이 순조롭게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경제관련 조항은 ‘사법부 제출안’의 적산 국유 조항, 농지개혁 조항, 국민경제회의 조항을 제외하면 한국헌법(韓國憲法)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법전편찬위원회에서 제출하여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참고안으로 심의되었던 ‘권승렬안’은 총 10장 135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 헌법안의 편제는 각 장의 용어 사용에서 차이가 있을 뿐 유진오의 ‘사법부 제출안’과 거의 비슷하다. 다만 ‘사법부 제출안’과 비교해 볼 때, 6장과 7장의 순서가 서로 바뀌었고, ‘헌법개정’을 독립된 장으로 하지 않은 대신 행정연구위원회안인 한국헌법(韓國憲法)처럼 ‘교육제도’를 독립된 장으로 구성한 것이 다른 점이다.

내용 면에서 볼 때, 제1장과 제2장은 ‘사법부 제출안’과 거의 유사하다.

권력구조에서도 ‘사법부 제출안’과 마찬가지로 내각책임제를 취하고 있지만, 미국식 발상을 가미해 ‘사법부 제출안’보다 국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행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한 특징이 있다. ‘제7장 경제제도’에서는 ‘사법부 제출안’에 규정된 적산 국유화 규정과 국민경제회의 설치 규정, 대외무역의 국가 감독 규정이 삭제되었다.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의 심의

헌법(초안)[憲法(草案)]헌법기초위원회(1948년)

‘합작안’을 원안으로 하여 심의를 진행한 헌법기초위원회는 원안의 양원제 국회 구성을 단원제로 변경했고, 정부 형태는 원안대로 내각책임제로 확정했다. 그리고 경제 장에서는 사영기업의 국·공유 이전 범위와 중요산업의 국유화 범위를 축소했으며, 국민경제회의 조항과 적산 국유화 조항을 삭제했다.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의 논의 과정은 속기록이 전하지 않아 현재로서는 그 전모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하지만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심의안으로 쓰였던 헌법(초안)[憲法(草案)]이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표지의 명칭은 ‘헌법(초안)[憲法(草案)]’이다. 표지의 헌법(초안)[憲法(草案)]이라는 명칭 옆에 “국회헌법기초위원회에서 조헌영의원이 가지고 쓰던 초안, 조지훈 교수로부터 차용”이라고 유진오가 써 놓았다.

이 헌법(초안)[憲法(草案)]은 총 10장 105조로 되어 있는데, 편제는 장과 절의 용어가 일부 바뀐 것이 있지만 『합작안』과 동일하다. 그런데 『합작안』에는 있는 전문이 누락되어 있다. 유진오의 『헌법기초회고록』(일조각, 1980)에 의하면,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전문도 토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전문은 국호를 비롯한 본문의 내용과 정합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 헌법(초안)[憲法(草案)]이 등사될 당시에 유보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본회의 토론 과정에서도 전문은 102조까지 토의를 마친 뒤에 진행되었다.

이 헌법(초안)[憲法(草案)]은 헌법기초위원회의 쟁점 심의 결과가 거의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헌법기초위원회가 2독회를 마친 6월 18일 이후 3독회를 위해 준비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헌법(초안)[憲法(草案)]에는 연필로 조문의 문장이나 용어를 수정한 표시가 있고, 어떤 경우에는 연필로 조문 전체를 삭제하거나 새로운 조문을 부가해 놓은 표시가 있다. 연필로 조문 전체를 삭제했거나 조문 전체를 거의 수정한 경우, 조문을 새로 추가한 경우는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제로 변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제를 고집하자 6월 21일 밤 김성수의 집에서 30명 가량이 모여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대통령책임제로 바꾸었는데, 김준연이 연필로 개필해 넣은 심의용 초안 유인물을 들고 유진오에게 앞뒤 의미가 통하는지 물었고 유진오는 앞뒤 연락은 된다고 답했다.

따라서 이 헌법(초안)[憲法(草案)]에서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대통령책임제 헌법안으로 변경하기 위해 연필로 조문 전체를 삭제하거나 새로 부가한 것, 그리고 조문의 내용을 대부분 수정한 것은 6월 21일 밤의 수정 내용이며, 연필로 몇몇 자구를 수정한 것을 3독회 과정에서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유진오의 헌법 기초에 참조된 헌법 문서들

민주주의 민족전선 미소공위 답신안(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조선임시약헌(1947년)

유진오는 『헌법기초회고록』에서 제헌헌법을 기초하면서 몇 가지 헌법 관련 문서를 참조했다고 밝혔는데 다음과 같다.
- 조선임시약헌(1947년 입법의원에서 통과된 것)
- 조선인민의 권리에 관한 포고(1948년 4월 7일 하지중장 포고)
- 대한민국건국강령(民國 23년 11월 28일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공포한 것)
- The Constitution of Korea(과도정부 사법부 美人顧問 우드월안)
- 조선민주공화국임시약법(시안/1946년 제1회 미소공위에 제출차 준비되었던 민주주의민 족전선측 시안)
- 대한민국임시헌법(민주의원안)
- 1947년 제2회 미소공위에 제출된 자문 5․6호에 대한 각 정당 사회단체의 답신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괴뢰정권안)
- 각 정당의 강령과 정책

이 중에서 The Constitution of Korea, 조선민주공화국임시약법(시안), 대한민국임시헌법(민주의원안) 등의 헌법안은 유진오의 『헌법기초회고록』을 통해 그 존재만 알려졌을 뿐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이 헌법안들은 2001년 유진오 유족이 유진오의 헌법 관계 자료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면서 그 실물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임시약헌은 1947년 8월 6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124차 회의에서 가결된 후 자구 수정을 거쳐 총 7장 58조로 제정되었으나, 미군정장관의 인준 보류로 공포되지 못했다.

조선임시약헌은 우파 의원들이 제안한 남조선과도약헌안과 중간파 의원들이 제안한 조선민주임시헌법안의 통합안이었던 만큼, 두 개 안의 특징적 요소가 반영되었다.

조선임시약헌은 남조선과도약헌안과 비교해 볼 때 ‘제2장 국민의 권리 의무’ 추가, 국민 주권의 민주공화정체, 행정부 주석의 국민 선거 등 민주적 요소가 강화되었고, 입법의원의 정무총장·정무위원 불신임권과 행정부 주석의 입법의원 해산권이 삭제되어 주석(대통령) 중심제에 가깝게 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남조선과도약헌안의 주요 골자와 큰 차이가 없었다. 가장 많은 변경이 있었던 정부형태에서 남조선과도약헌안의 내각책임제가 주석중심제로 수정된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이 내각책임제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생활균등권과 문화·후생 균등권을 규정한 ‘제2장 국민의 권리 의무’는 조선민주임시헌법안의 내용이 거의 그대로 채용되었다.

The Constitution of Korea(1946년)
조선민주공화국임시약법(시안)(1946년)
대한민국 임시헌법(1946년)

The Constitution of Korea는 유진오의 회고록에서 ‘과도정부 사법부 美人顧問 우드월안’이라고만 알려져 왔다. 이 헌법안은 유진오가 공책에 필사로 옮겨 적어 놓은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데, 제6조 1절까지만 남아 있다.

이 헌법안은 우돌(Emery J. Woodall)이 사법부를 맡고 있던 1946년 4월 경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우돌은 유진오가 적고 있는 것처럼 사법부 美人顧問이 아니라 미국육군 중령으로 사법부장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이 헌법안은 1946년 4월 경 미군정청 사법부장 우돌의 관할 하에 미국인 법률고문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6년 2월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기초한 조선민주공화국임시약법(시안)은 총 9장 103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헌법안이 언제 어떻게 기초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유진오의 회고에 의하면, 1946년 1월 어느 날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중요 직책을 맡고 있던 박문규가 허헌 등 민주주의민족전선 관계 법률가들이 만든 이 헌법안을 가져와 검토를 부탁했으나 자신은 거절했다고 한다. 이 헌법안의 표지에는 “1946년 제1회 미소공위에 제출하랴고 준비되었든 민전측 조선민주공화국임시약법 시안”이라고 적혀 있는데, 유진오가 쓴 것이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은 1946년 2월 14일에 개원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하 민주의원)에서 기초한 것이며 제6장 74조 전단까지만 보존되어 있다.

이 헌법은 그 체계나 내용 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헌장(1944. 4. 22.)과 유사한데, 정부 형태는 내각책임제이지만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헌장과 마찬가지로 일반 국책과 정무를 심의·결정하는 국무회의와 행정각부 주요 정무의 기획과 연락에 관한 사무를 결정하는 행정회의를 두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의 ‘제2장 인민의 권리 의무’에 규정된 권리는 이 헌법안에서 생활균등권(5조), 문화 급 후생의 균등권(6조), 자유권(7조), 요구권(8조), 참정권(9조)으로 세분화되었는데, 생활균등권은 완전히 새로 추가된 부분이었다.

※ 본문에 인용된 기록 중 제1호 국가지정기록물은 「유진오 제헌헌법 초고(第一回 草稿)」 1건이며, 나머지 9건은 제헌헌법 제정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임을 밝혀둔다.

기록물 소장처 : 고려대학교 박물관 ( http://museum.korea.ac.kr )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