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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4.19 혁명,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씨앗이 되다

올해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굳건한 뿌리가 된 4.19혁명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4.19 혁명은 독재정권의 억압과 불의에 항거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난 시민혁명이었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미완의 혁명으로 남아야 했다. 그러나 이날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은 훗날 부마민주항쟁과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과 촛불혁명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e-기록 속으로」 4월호는 4.19혁명을 기획특집으로 준비해 기록을 통해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해 본다.

4.19혁명은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정·부통령 선거를 조작하자 선거결과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항거이다. 민주주의의 위기 때마다 소환된 시민정신의 뿌리로서 지금은 익숙한 명칭이지만, 4.19혁명과 그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기까지는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야 했고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견뎌야 했다.

  • [대한뉴스 제262호] 민주주의 수호에 청년학도 총궐기

  • [대한뉴스 제266호] 4.19 순국 학도 합동 위령제(1960)

4.19혁명은 1960년에 있었던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었다.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마산에서 발생하였고, 경찰은 이를 강경 진압하였다. 4월 11일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발견되자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차별적으로 시위를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학생들의 희생을 묵과할 수 없었던 대학교수들도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시위에 동참하였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이렇게 자유당 정권은 막을 내렸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 4.19 의거 혁명 데모(1960)

  • 4.19 부상학생 함의원 의사당 앞 데모(1960)

  • 사임서 송부에 관한 건(1960)

그해 5월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4.19순국학도 합동위령제」, 「4.19의거 기념연주회」 등 4.19 혁명을 추념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다음해 4.19혁명 1주년이 되자 서울, 대구,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대학들은 기념탑과 기념비 제막식을 진행하고, 음악회, 예술제 등으로 4.19 혁명을 기리고자 했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 한일협정, 유신체제, 독재정권 등 굴곡의 현대사를 경험하면서 4.19 혁명 정신을 외치는 소리는 집권세력과 부딪히며 저항세력, 반정부세력으로 규정되었고, 인고의 세월을 지내야 했다.

  • 4.19 의거 사진전(1960)

  • 4.19의 날(1961)

  • 서울대학교 4.19기념탑 제막식(1961)

  • 제1회 4.19 기념식 및 추념식(1961)

초기 ‘4.19 사태’, ‘4.19 학생데모’, ‘4.19 의거’, ‘4.19 혁명’ 등으로 불렸던 학생들의 항거는 1973년 ‘4.19 의거’로 정의되었고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4.19의거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1963년 9월 20일에는 곳곳에 흩어져서 보관되고 있던 4.19 혁명 희생자들의 유골을 수유리 합동묘지로 이장하였는데 이 때 4.19혁명기념탑 제막식도 거행되었다.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 만 명 학생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 피어나리라.”
    - 4.19혁명기념탑문 이은상 글 -

  • [대한뉴스 제412호] 4.19 기념비 건립(1963)

문민정부가 출범한 첫 해에 김영삼 대통령은 4.19 33주년을 맞이하여 ‘4.19 묘지’를 참배하였고, 같은 해 12월 ‘4.19 혁명 기념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동시에 ‘4.19 묘지’에 대해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1995년 ‘4.19 35주년’에 맞추어 국립묘지로 승격시켰다. 1997년에는 4.19혁명기념관이 개관되어 우리나라 민주이념의 성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현재 묘지의 관리와 소유권은 서울시에서 국가보훈처로 완전히 변경되었다.

한 때 너무나 초라했던 4.19 혁명기념 행사와 성의 없는 묘지관리로 많은 이들로 울분을 토하게 했던 적이 있었다. 해마다 4월이 되면 매운 연기가 대학가와 묘지를 휘감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자유롭게 사이버 분향을 하고, 가족단위로 기념관을 찾아 ‘그 날’과 ‘그 정신’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4.19 혁명 희생자들과 그 정신을 잊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붙들었던 이들의 노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 [대한뉴스 제1954호] 제33주년4.19의거(1993)

  • 김영삼 대통령 4.19 묘소 분향 참배

  • 4.19혁명 제3주년 기념행사계획(안)(1963)

  • 제40주년 4.19혁명기념행사 기본계획안(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