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참전국은 1951년 초까지 총 16개국이었다. 군대파견을 신청한 국가 21개국 중 실제로 파병을 한 16개 국가의 분포는 미국, 캐나다 북미 2개국, 콜럼비아 남미 1개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아시아 4개국, 남아공화국, 에티오피아 아프리카 2개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베르그, 네덜란드, 터키 유럽 7개국 이다.
이들 참전국들은 유엔이 요구하는 최소규모인 1개 대대 병력(약 1,200명) 이상을 파견하였다. 주요 참전병력은 1953년을 기준으로 영국 약 1만 4,200명, 캐나다 약 6,100여 명, 터키 약 5,500여 명, 호주 2,200여 명 등이다. 1953년까지 한국전에 참여한 연합군은 미국을 제외하고 총 3만9천여 명에 이르며, 미국을 포함할 경우 총 34만 1천여 명에 이른다.
또한 유엔 결의문에 따라 회원국 및 국제기구들이 각종 지원을 하기 시작했는바, 5개국(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이 병원 혹은 병원선 등 의료지원을, 그리고 40개 회원국과 1개 비회원국(이탈리아)과 9개 유엔전문기구가 식량제공 및 민간구호 활동에 참여하였다. 중국의 개입이후 미국은 나토(NATO) 증강 등의 약속에 비추어 유럽국가와 기타 회원국들의 참전을 요청하였으나, 중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의 참전은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필리핀, 태국 등 4개국에 국한되었다.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그들이 집단안보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참전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유엔은 또한 1951년 8월 총회 결의 제500호를 통해 중국과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채택하는 등 다각도의 전쟁지원책을 강구하였다.
개전 초기 미군을 중심으로 각국 참전병력은 한국군과 함께 전투에 임했다. 하지만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을 발판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작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일에는 38선을 돌파하여 이후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국(중공군)의 전면적 개입으로 1951년 1월 연합군은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였고 서울이 다시 북한군의 수중으로 들어가기도 하였으나 3월 15일 다시 수복하였다. 이후 전쟁은 점차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