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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기록유산 국가지정기록물

우리 민족의 우리 말 제4호 조선말 큰사전 편찬 원고

리의도(한글학회 총무이사)

개요

『(조선말) 큰사전』은 한겨레(한민족)의 손으로 이루어낸 최초의 한국어 대사전이다. 국권을 잃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1929년 한글날에 겨레말(민족어)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편찬을 시작하여, 조선어학회 수난과 같은 가시밭길을 헤치고, 6.25전쟁의 참극과 한글맞춤법 간소화 파동까지 이겨내어 1957년 한글날에 여섯 권을 완간하였다. 이 기록물들은 그 『(조선말) 큰사전』 원고의 일부이다.

일제시기 겨레말사전 편찬의 시작

한겨레(한민족)가 겨레말 사전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전 편찬에 착수한 것은 불행히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후였다. 1911년 조선광문회에서 ‘말모이’를 짓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는데, 집필진의 중심이던 주시경 선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멈추고 말았다. 뒤이어 계명구락부에서 그 원고를 넘겨받아 작업을 진행했으나 결실을 얻지 못하였다. 그 밖에 개인적으로 사전 편찬에 정진하기도 했으나 역시 결실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1) 조선어사전 편찬회 조직

그 때의 여건에서 사전을 편찬하고 발행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어연구회 선각들은 그것이 꼭 해내야 할 숙제임을 잊지 않았으며, 1929년에 다시 뜻을 세웠다. 지난 일을 거울삼아 각계 인사가 참여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여 새롭게 일을 추진하기로 하고, 한글날 축하식 자리에서 그 조직을 구성하기 위한 발기회를 열었다. 교육자·학자·출판인·언론인·종교인·문학가·대중적 명망가·자본가 등 108명이 동참하였다.

2) 조선어사전 편찬의 목적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려 한 목적은 발기회의 취지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민족 갱생의 지름길은 문화의 향상과 보급이고, 문화를 촉성하는 방편은 언어의 정리와 통일인데, 그것을 실현할 최선의 방책은 사전 편찬이다.”

여기서 확인되듯이, 사전 편찬의 궁극적 목표는 ‘민족 갱생’이었다. ‘민족 갱생’은 ‘민족 부활’이나 ‘민족 독립’의 다른 표현이며, 사전 편찬은 그 목표를 향한 기초적이요, 실천적인 방책이었다. 겨레의 선각들은 칠흑 같은 상황에서도 민족 독립을 꿈꾸며 사전 편찬에 뜻을 모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기대한 것은 ‘권위 있는 사전’이었고, 그러려면 거족적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는 점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3) 조선어사전편찬회와 조선어학회

발기회 자리에서 각계를 대표하는 21명으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조선어연구회의 중심인물 다섯 명을 집행위원으로 선정하였다. 두 조직의 임원은 협의하여, 업무를 ‘일반 사무’(어휘의 수집과 풀이, 원고 편집)와 ‘기초 작업’(표기법 통일, 표준어 결정)으로 나누고, 조선어사전편찬회와 조선어연구회가 나누어 맡았다. 그 때가 1930년 1월이었는데, 그렇게 분담하여 진행하다가 1936년 3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해산하고 ‘일반 사무’까지도 조선어학회(1931년 1월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을 이렇게 고쳤음)로 통합하였다.

4) 표기법의 통일과 표준어 결정

표준어 사정 제1차 회의에 참석한 위원들(1935년)
표준어 사정 제1차 회의에 참석한 위원들(1935년)

표기법을 통일하기 위하여 1933년에 『한글맞춤법 통일안』 을 발표하고, 1940년에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을 확정하였다.

『한글맞춤법 통일안』 은 ‘조선어를 한글로 적는 법’에 대한 규정인데, 전문가 18명으로 구성된 ‘조선어 철자 통일위원회’에서 3년 가까운 동안 100번이 넘는 크고 작은 회의를 거쳐 마련하고, 조선어학회 총회를 거쳐 확정하였다.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은 ‘조선어 속의 각종 외래어를 한글로 적는 법’에 관한 것인데, 10년 가까이 연구하여 작성한 것을 조선어학회 총회에서 확정한 것이었다.

‘기초 작업’ 가운데 또 하나는 표준어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출신 지역을 대표하는, 각계 인사 70여 명으로 ‘조선어 표준말 사정 위원회’를 구성하여 진행하였다. 2년 동안 세 차례의 큰 회의를 열어 표준말을 정했으며, 그 결과를 1936년에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으로 발간하였다. 그로써 표준낱말이 정해졌고, 그에 따라 낱말 풀이를 해 나갈 수 있었다.

5) 어휘 수집과 풀이와 원고 작성

‘일반 사무’란 낱말을 수집하고 풀이하고, 원고를 작성하고 편집하는 일을 가리켰으니, 본격적인 사전 편찬 작업이었다. 수집, 풀이, 원고 작성, 이 모두가 간단치 않은 일인데, 낱말 수집이 더욱 그러했다. 몇 사람이 책상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민족적으로 권위 있고’, 올림말이 많은 ‘대사전’을 목표로 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문헌을 통한 수집은 사전편찬원이 주로 맡았지만, 전문 용어는 각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고, 일상어와 방언의 수집에는 방방곡곡의 조선어학회 회원과 많은 학생과 지역민까지 참여시켰다. 수집하고 심사한 낱말의 풀이와 원고 작성은 사전편찬원들이 했는데, 조선어학회 수난 때까지 그 일을 맡은 사람은 이극로, 이윤재, 한징, 이중화, 정인승, 권승욱, 권덕규, 정태진 등이었다.

6) 재정 조달의 어려움

목표는 뚜렷하고 열의는 충만했지만 모든 여건은 가시밭이었다. 그 중에서도 사업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는 것은 특히 어려운 일이었다. 모든 경비는 각지 재력가의 후원금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사업 기간이 예상보다 늘어나서 사업은 고비를 맞았으며 아예 중단된 일도 있었다. 그 때마다 이우식 선생이 나서서 거액을 추가로 희사해 준 덕분으로 가까스로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7) ‘출판 허가’와 첫 교정지

1941년 무렵의 사전편찬실 모습(1941년)
1941년 무렵의 사전편찬실 모습(1941년)

숱한 곡절 속에서도 원고 작성을 거의 마무리하고, 1939년 여름부터는 원고 전체의 체계잡기에 착수하였다. 책 발간을 위해서는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원고의 3분의 1 분량을 조선총독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많은 부분을 수정하는 조건으로, 다음해 봄에 어렵게 ‘출판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1942년 봄에 원고 일부를 인쇄소(대동출판사)로 넘겼고, 여름에는 드디어 200여 쪽이 조판되어 나와 교정에 착수하였다. 나머지 원고의 체계잡기도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8) 조선어학회 수난

바로 그 무렵, 조선총독부는 조선어학회 사람들을 습격하였다. 1942년 9월 5일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사전편찬원 정태진을 검거해 갔다. ‘조선어학회 수난’의 시작이었다.

10월 1일에는 이중화,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김윤경, 정인승, 한징, 권승욱을 비롯하여 11명이 검거되었으며, 그 뒤로도 몇 차례의 검거가 있었다. 구속된 사람만 29명, 조선어학회의 임원이거나 사전편찬원, 또는 회원이었다.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항일 운동으로 몰아붙인 것이었다. 그 밖에도 약 50명이 증인으로 불려가 심문을 받았다. 그로써 3년 동안 사전 편찬 작업은 중단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 경찰과 검찰에게 모진 고문과 온갖 모욕을 당했다. 홍원 경찰은 악랄한 방법으로 억지 자백을 강요하고 사건을 날조하여 1943년 4월 33명에 대한 의견서(신문 조서)를 작성하여 함흥지방법원으로 넘겼다.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서는 자체 조사를 거쳐 9월 17명은 풀어 주고 16명을 예심에 넘겼다. 그런데 이윤재 선생과 한징 선생은 예심이 끝나기 전에 쇠약해진 몸으로 혹한을 이겨내지 못하고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다음해 9월 예심이 끝났으니, 12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공판에 넘겨지고, 2명은 풀려났다.

12명은 1945년 1월까지 함흥지방법원에서 아홉 차례의 공판을 받았는데, 8명은 집행 유예와 무죄, 상고 포기 등으로 풀려 나왔으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은 징역을 선고 받아 풀려나지 못했다. 이들은 불복하여 경성고등법원(오늘날의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8월 13일 기각 판결이 내려져 형이 확정되고 계속 징역살이를 해야 했다. 그런데 곧이어 8.15 광복이 되어 17일 석방되었다.

광복 이후 겨레말사전의 편찬

1) 조선어사전 원고 다시 찾음

광복과 함께 사람들은 조선어학회로 모여들었으나, 사전 원고는 제 자리에 있지 않았다. 치안유지법 위반의 증거물로,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지방법원에 제출된 것까지는 분명하지만 그 뒤로 소재를 알 수가 없었다.

피와 땀으로 이룩한 10여 년의 공적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모두들 낙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1945년 9월 8일 경성역(오늘날의 서울역) 화물 창고에서 그 원고가 발견되었다. 알고 보니, 재판 증빙 자료로 경성고등법원에 보내졌던 것인데, 그 때까지 창고 속에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2) 원고를 전면 재검토함

1941~1942년에 작성한 원고 수정본(제3권)
1941~1942년에 작성한 원고 수정본(제3권)

원고는 되찾았지만 일제의 감시를 비롯한 제한된 여건에서 급박하게 작성한 원고인지라 책으로 발행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이강로, 류제한, 신영철 등 10여 명의 편찬원을 보충하여 원고 전체의 올림말(표제어)과 풀이를 일일이 재검토하여 수정하였다.

3) 『조선말 큰사전』 첫째 권 발행

조선말큰사전 제1권과 제2권(1947년)
조선말큰사전 제1권과 제2권(1947년)

수정한 원고는 인쇄소로 넘겨져 교정과 인쇄와 제본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47년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으로 발행되었다.

전체 올림말이 10만 개를 넘는 대사전인 데다 비용도 모자라서 우선 제1권만 발행된 『조선말 큰사전』 은 올림말 ‘ㄱ’부터 ‘깊직하다’를 실은 4×6판 564쪽으로 구성되었다.

그 이후에는 비용 조달 방법이 없어서 발행이 중단되었다. 여러 방면으로 접촉한 결과 가까스로 미국 록펠러재단의 도움을 받아, 제1권으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949년 5월에 제2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4) 『조선말 큰사전』이 『큰사전』으로

『조선말 큰사전』제3권의 속표지(1950년)
『조선말 큰사전』제3권의 속표지(1950년)

록펠러재단의 도움으로 사전 발행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제2권을 발행한 다음 해인 1950년 6월에는 제3권을 발행하였다.

이 때, 제3권을 『조선말 큰사전』에서 『큰사전』 으로 바꾸고 이후 발간된 책은 『큰사전』이라 명명하였다. 이는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인하여 ‘조선말’을 기피하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8개월 이전에는 ‘조선어학회’에서 ‘한글학회’로 학회명도 변경하였다. 그 무렵 제4권도 조판을 끝낸 상태였다.

5) 전쟁 속에서도 감행한 발행 작업

1950년 11~12월에 베껴 쓴 원고(제6권의 일부)
1950년 11~12월에 베껴 쓴
원고(제6권의 일부)
6.25전쟁 중에 전주에서 수정한 제5권(1953년)
6.25전쟁 중에 전주에서 수정한 제5권(1953년)
6.25전쟁 중에 전주에서 수정한 제6권 표지(1953년)
6.25전쟁 중에 전주에서 수정한
제6권 표지(1953년)

그런데 바로 그 즈음, 한겨레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사전 발행 사업은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록펠러재단의 원조 물자는 모두 화재로 없어지고 사전편찬원은 각처로 흩어졌다. 그 때까지 발행하지 못한 제4권, 제5권, 제6권의 원고는 이사장 최현배 집에 숨겨 두었다.

9.28 서울 수복과 함께 편찬원은 서울로 모여들었다. 다행히 원고는 안전했으나, 전란 속에서 어떤 변고가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10여 명을 동원하여 한 달 동안 3권의 원고를 모두 베껴 썼다. 베낀 원고는 최현배의 집에다 묻어 두고, 원본은 충청남도 천안에 있는 류제한의 고향집으로 옮겨 땅 속에 묻었다. 그리고 1951년 1.4 후퇴를 당하였다.

1년 남짓 상황을 관망하다가 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자 1952년 5월 정태진과 류제한이 천안에 숨겨 두었던 원고를 서울로 옮겨 제4권의 조판을 교정하기 시작하여 10월 28일에 교정을 끝내고 지형을 떴다. 그런데 4일 뒤에 정태진이 뜻밖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슬픔 속에서도 1953년 1월부터 5월까지 전주에 임시 편찬소를 차리고, 정인승, 권승욱, 류제한이 제5권과 제6권의 원고를 수정하였다.

6) ‘한글맞춤법 간소화’에 부딪힌 『큰사전』

제3권 초판본 수정본(1950년 6월 발행 후 1957년 5월 재발행)
제3권 초판본 수정본(1950년 6월 발행 후 1957년 5월 재발행)

1953년 7월 휴전이 되자 편찬원이 다시 모이고 한글학회 업무도 정상화하였다. 사전 발행에 박차를 가해야 했으나 그러지 못하였다.

전쟁으로 인쇄용 물자가 불타버린 데다가 그 해 봄에 정부에서 내놓은 ‘한글맞춤법 간소화안’을 막아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었다.

‘한글맞춤법 간소화안’이란 『큰사전』의 표기법이자 한겨레가 두루 사용해 온 『한글맞춤법 통일안』 을 고치자는 것이었다. 매우 비합리적인 시도였으므로 한글학회에서는 반대 운동을 강력하게 벌였으며, 끝내 정부의 시도를 막아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록펠러재단의 도움을 다시 받는 것을 성사시켰다.

7) 1957년 한글날, 마침내 『큰사전』 완간

『큰사전』제1권~제6권 전권(1957년)
『큰사전』제1권~제6권 전권(1957년)

한글맞춤법 간소화 시도를 막아내고, 록펠러재단의 도움을 받아 1957년 6월에 제5권, 8월 제4권을 발행하였다.

제4권이 나중에 나온 이유는 6.25전쟁 당시에 급하게 작업을 하여 보완이 필요해서였다. 그런데 그 보완 작업이 까다로워서 새로 조판하는 제5권보다 작업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이러한 작업 끝에 마침내 1957년 10월 9일 한글날에 마지막 권인 제6권을 발행하였다. 이는 전체 3,558쪽(부록 114쪽)에 164,000여 개의 올림말을 실은 한겨레 최초의 ‘대사전’이었다. 이로써 30년의 대장정은 마무리되었다.

『큰사전』 완간의 의의

조선어사전 편찬은 겨레얼(민족정신)을 지켜 국권을 회복하려는 갈망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피와 울음으로 이루어낸 결정체가 『(조선말) 큰사전』 이다. 거족적인 참여와 성원 속에 성실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 이루어낸 것이다.

온 겨레의 갈망대로 마침내 한겨레는 국권을 회복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곧바로 겨레말과 겨레글로 교과서를 짓고, 거침없이 국민교육에 매진할 수 있었다. 암흑 속에서도 민족의 앞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해 왔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사전 발행 중에는 6.25전쟁이라는 민족적 참극을 겪어야 했지만, 그 속에서도 민족어 사전을 향한 열의는 꺾이지 않았다.

한겨레는 이 『(조선말) 큰사전』을 가짐으로써 다시 한 번 문화민족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 사전은 오늘날까지 한겨레 말글살이의 표준이 되고 있으며, 편찬 과정에서 마련한 한글맞춤법은 한국어 표기법의 기준이 되고 있다.

기록물 소장처 : 한글학회 ( https://hangeul.or.kr )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