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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기록유산 국가지정기록물

전통의학을 근대의학으로 발전시키다 제7호 청강 김영훈 진료 기록물

김동율(경희대학교 한의학 박사)

한의사 김영훈과 보춘의원

청강 김영훈(晴崗 金永勳, 1882~1974)은 근현대 한의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강화도 출신으로 유년시절 눈병을 심하게 앓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인천의 명의 서도순을 만나 의학을 배웠다. 서도순에게 『황제내경(黃帝內經)』을 비롯한 다양한 역대 의학서를 배웠으며, 그 중에서도 이천의 『의학입문(醫學入門)』과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암송할 정도로 공부하였다.

이후 1904년 그의 나이 23세가 되던 해에 최초의 근대적 한의과대학인 동제의학교가 설립되어 교수를 선발하였는데, 김영훈은 수석으로 합격하여 동제의학교 도교수(都敎授)가 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1907년 동제의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으나, 그 이후로도 김영훈은 한의학 교육과 학술잡지 발간, 전국단위의 한의사 협회 결성 등 한의학 부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김영훈은 광복 후 구왕궁(舊王宮) 명예전의(名譽典醫)로 임명되었으며, 그 외에도 대한한의사협회 명예회장, 현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전신인 서울한의과대학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1963년 열린 대한민국건국축하식전에서 건국국민훈장을 수여받았다.

1974년 작고한 이후에도 현재까지 그의 저서 『청강의감(晴崗醫鑑)』을 비롯한 다양한 학술적 성과가 한의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춘의원(普春醫院)은 김영훈이 1909년 봄에 개설한 한의원이다. 현 서울 종로구 낙원동(수표로와 종로17길의 교차점)에 위치하였으며 김영훈은 1944년 일제에 의해 건물이 무너지기 전까지 약 35년간 이곳에서 환자를 보았다. 보춘의원은 이층 양옥건물이었으며, 내부에는 대기실, 진료실, 조제실 등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구성은 당시 서양의원이나 한의원에서는 보기 힘든 신식 구성이었다. 보춘의원은 개원 이후 날로 번창하여, 하루에 혼자 보는 환자 수만 100명이 넘었고 종업원 5명이 쉴 새 없이 일을 하였다.

김영훈은 보춘의원 다락에 다양한 기록들을 보관해두었다. 특히 환자에 대한 진료기록을 꾸준히 남겼으며 그 외에도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작성한 장부나 환자통계기록, 그가 수집하던 신문 등도 이곳에 보관하였다. 이후 그의 기록물들은 6.25 등 혼란스러웠던 한반도의 정세를 거치면서도 소실되지 않고 남아있었으며, 1999년 그의 사자(嗣子)인 김기수가 고인의 평생 유지를 받들어 본 자료를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에 의학사 연구 및 한의 학술자료로 기증하였다. 현재 김영훈의 다양한 진료기록물들은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한의학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김영훈의 진료기록

김영훈의 진료기록물(1914~1974년)
김영훈의 진료기록물(1914~1974년)
진료 처방전(1914~1974년)
진료 처방전(1914~1974년)

김영훈은 1914년부터 1974년까지 60년에 걸쳐 환자에 대한 진료기록을 남겼다. 최초 기록은 1914년 4월 1일이고 마지막 기록은 1974년 1월 15일이며 그 양이 총 935점, 12만 장에 달한다. 매 권마다 표지를 만들었으며, 표지에 본 권에 포함된 진료기록의 시작하는 날과 끝나는 날을 기록해두었다.

그의 진료기록물은 크게 진료기록부(405점)와 처방전(530점)으로 나뉜다.

진료기록부는 김영훈이 환자를 보면서 기재한 진료기록으로, 대부분 10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우측 상단에 병명이 쓰여 있으며, 그 아래로 발병일, 병인, 환자의 이름, 주소, 나이, 직업 등이 기재되어 있다.

병명의 좌측에 진료일과 처방이 기재되어 있으며, 처방 하단에는 적요란을 두어 환자에 대해 기타 참고할 사항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진료기록부를 보면 당시 서울의 유지들을 비롯한 전국의 환자들이 김영훈을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선왕가(朝鮮王家), 독립운동가, 소설가 등 당대의 명사들도 그를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처방전은 김영훈이 약제사에게 처방을 지시하기 위해 전해주는 문서로, 5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측에는 개인 신상이 기재되어 있는데, 위에서부터 환자의 주소, 이름, 나이가 적혀있다. 그 외에 처방명과 약재 구성 등 처방에 대한 기록이 기재되어 있으며, 좌측 하단부에는 진료일이 쓰여 있다. 처방전은 보통 진료기록부와 쌍을 이루고 있으며, 둘 중 한 가지만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조선의사연찬회진단록(1913년)
조선의사연찬회진단록(1913년)
보춘의원 진단서류부본철(1948년)
보춘의원 진단서류부본철(1948년)

이 외에 김영훈의 환자 진료기록물로 보춘의원 ‘조선의사연찬회진단록’이 있다.

이 기록은 1913년 3월부터 쓰여졌으며 조선의사연찬회에서 일괄 배포하였다. 환자의 주소, 성명, 진료일, 병명, 병인(혹은 사인), 기타 진단 내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48년에 작성된 『진단서류부본철』은 보춘의원에서 발급한 사망진단서 등 관련 서류의 부본을 모아둔 것이다. 환자의 성명, 남녀, 출생일시, 직업, 사인, 병명, 사망일시 등이 기재되어 있다.

김영훈의 진료기록은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한의학이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았는지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의 기록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근대적 진료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폐결핵, 뇌막염 등 서양의 병명이 일부 쓰이는 반면, 대다수의 병명과 병인, 처방에 대한 기록은 한의학 용어들을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김영훈 진료기록은 시대 변화를 수용하면서 전통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살리려는 흔적이 나타나는 자료이다. 동시에 1910년대부터 1970년까지 사람들의 다양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생활사적 의미를 갖는다.

보춘의원 운영기록

보춘의원 수출입별록(1914~1936년)
보춘의원 수출입별록(1914~1936년)
보춘의원 장부(1931~1949년)
보춘의원 장부(1931~1949년)
경성보춘의원 치료환자 통계표(1914~1935년)
경성보춘의원 치료환자 통계표(1914~1935년)

김영훈은 환자의 질병과 치료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한의원 운영과 관련된 기록도 남겼다. 대표적으로 수출입기록물과 치료환자 통계표가 있다.

보춘의원 수출입별록은 1914~1936년에 작성된 기록이다. 일시, 성명, 금액, 대출, 이자, 투자 내역 등이 기재되어 있으며, 개인 간의 거래내역, 은행과의 입출금내역 등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보춘의원 장부는 총 3권이 있으며, 각각 1931년, 1945년, 그리고 1946~1949년의 기록이 남아있다. 장부는 개개인별 거래내역이 적힌 기록물로 일시, 처방명, 첩수, 금액 등이 기재되어 있으며, 일종의 외상거래 장부로 사용되었다.

이 외에도 금전출납부 기능을 했던 경비기입장(1948년), 수불대장으로 활용되었던 수입부(1930~1931년)와 잡기(1942~1943년) 등이 남아있다. 금전거래와 관련된 이와 같은 자료들은 처방내용, 약재가격 등을 살펴볼 수 있어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한반도 경제사 연구의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보춘의원 치료환자통계표는 표지에 ‘경성보춘의원치료환자통계표’라 적혀있으며, 총 두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1914년부터 1935년까지 있었던 59,353건의 진료기록을 토대로 통계를 만든 것이다.

매해 병명별 내원환자수를 정리하였는데, 성별과 내원 월을 세부기준으로 두었다. 즉, 그의 통계표에 따르면 1914년에 보춘의원에 찾아온 감기환자는 총 227명이었으며 이중 남자가 129명, 여자가 98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계절별로는 4월에 65명, 5월에 18명, 6월에 24명 등이 감기로 내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춘의원 치료환자통계표에 따르면 당시 보춘의원에 내원한 환자들은 감기, 설사, 복통, 불면증, 임질(淋疾), 학질(瘧疾), 소갈(消渴) 등 다양한 질환을 앓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가 1914년부터 1974년까지 60여 년간 진료한 환자의 병명은 약 4,679종에 달하며, 그 중 가장 잦은 빈도로 등장하는 병명은 감기(감모感冒)였다.

그 외에도 장벽(腸澼), 한사(寒瀉), 습사(濕瀉) 등 다양한 종류의 설사병과 복통(腹痛), 협통(脇痛), 흉통(胸痛) 등 체간부의 통증질환, 노수(勞嗽), 열수(熱嗽), 풍수(風嗽) 등의 호흡기질환 등으로 내원한 환자들도 많았다.

수세현서

수세현서(1904년)
수세현서(1904년)

『수세현서』는 김영훈이 동제의학교 교수가 되기 전 해인 1904년 겨울에 저술한 책이다.

김영훈이 1904년 교수로 선발된 이후 1905년 4월 강의를 준비하면서 자신의 의학적 연구를 정리할 목적으로 만든 책으로, 기존의 의학서에 분포된 정보를 자신만의 편집체계를 적용하여 한의학 교육에 더욱 용이한 형태로 구성하였다.

서문의 ‘낙가산(洛迦山) 보문동재(普門東齋)’라는 기록에서 보이듯이, 『수세현서』는 김영훈이 서도순의 제자로 3년간 의학을 배운 후 다시 3년간 강화도 보문사에서 독학하였던 내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수세현서』는 총 354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의학입문(醫學入門)』과 『동의보감(東醫寶鑑)』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처방은 당대에 유용한 처방집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구성상으로는 의학의 역사, 한의학 기초 이론, 의사의 마음가짐, 태도 등과 관련된 잡기류가 가장 먼저 나오며, 그 뒤를 이어 진단, 병의 기전 및 증상, 처방, 침과 뜸 뜨는 법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처방 부분에서는 『방약합편(方藥合編)』, 『양춘방(陽春方)』, 『석은보유방(石隱補遺方)』 등 조선의 의방서들이 활용되어 있다.

김영훈이 저작한 의서는 이 『수세현서』와 작고 이후 수제자 이종형이 그의 유고를 모아 간행한 『청강의감(晴崗醫鑑)』이 유일하다. 수십 년간의 임상 경험을 쌓은 대가의 기록인 『청강의감(晴崗醫鑑)』과는 달리, 『수세현서』는 아직 임상에 뛰어들기 전 20대 젊은 청년이 남긴 의학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김영훈은 소장 도서 목록에 『수세현서』를 ‘미완(未完)’이라고 표기하였다. 이는 『수세현서』를 젊은 시절 자신의 지식을 정리한 책으로 그치지 않고, 후대에 더욱 보완하여 자신의 의학적 이론 체계를 정리하려는 김영훈의 의지로 보인다.

현재 『수세현서』는 2006년 김영훈의 사자(嗣子) 김기수의 도움을 받아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김남일, 차웅석 교수에 의해 복원 및 간행되었다.

전의 임명과 문화포상

구왕궁 전의 임명장(1948년)
구왕궁 전의 임명장(1948년)
청강선생 문화포상하첩(1963년)
청강선생 문화포상하첩(1963년)

청강 김영훈의 실력과 업적은 국가적으로도 여러 차례 인정받았다. 대표적으로 1948년 구왕궁 명예전의 임명과 1963년 대한민국건국축하식전에서 건국국민훈장을 수여받은 것이 있다. 이에 대한 기록물로 구왕궁 전의 임명장과 『청강선생문화포상하첩』이 남아있다.

구왕궁 전의 임명장은 겉봉투와 속지로 구성되어 있다. 겉봉투 앞면에는 ‘창덕궁 전의 사령서 서기 1948년 2월 27일 『배명』 발령 구왕궁’이라 기재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창덕궁 내전 『문감』, 『번호』 재397호 발부 서기 1948년 5월 27일 이왕직(李王職)’이라 기재되어 있다. 본면 속지에는 1948년 2월 7일부로 김영훈을 명예전의로 임명한다는 내용과 함께 구왕궁 인장이 찍혀있다.

『청강선생문화포상하첩』은 1963년 10월 10일 오후 3시에 창경원에서 거행되었던 김영훈의 문화훈장 포상기념 축하연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1963년 정부에서는 광복절을 기념하여 대한민국건국축하식전을 열어 교육, 학술, 예술 등 17개 부문에 걸쳐 267명의 인사들에게 건국국민훈장을 수여하였으며, 김영훈은 보건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본 축하연에는 한의계의 유명인사들이 방문하여 축문을 기록하였다. 본 기록물에는 당시의 정경모 대한한의사회장을 비롯하여 박성수 명예회장, 동양의학대학 교수인 김장헌, 홍성초 등 30여 명에 달하는 인사들의 축사가 기재되어 있으며, 기재하지 못한 인사들은 별도로 축문을 써서 김영훈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기록물 소장처 : 경희대학교 한의학박물관 ( http://museumkm.khu.ac.kr/ )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