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조선시대 실존인물 홍길동, 당대 굴지의 금수저(?)
「조선왕조실록」 - 아버지는 경성부사, 형은 사신 접대 중 과음으로 순직
퓨전사극이 대세인 가운데 MBC가 전통사극인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이하 역적)」으로 안방극장 시청률 경쟁에 뛰어 들었다. MBC가 30부작으로 특별기획한 이 드라마는 지난달 30일 첫 방송 이후 매회 시청률을 갱신하며 상승세를 타고 있다.
「역적」이 이처럼 연일 시청률을 갈아치울 수 있는 것은 빠르고 경쾌한 전개와 출연진의 탄탄한 연기력이 뒷받침 되었지만, 소재의 신선함도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홍길동(洪吉同)이 일반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던, 소설에 나오는 그 홍길동(洪吉童)이 아니라, 연산군 때 실존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제작된 애니메이션이나 동화, 드라마, 영화의 대부분이 허균의 「홍길동전」을 원작으로 하고 있어 오히려 실존인물이 생소하지만, 실상은 이 소설의 모델이 실존인물 홍길동이다. 이같은 사실이 밝혀진것은 비교적 오래 전이다. 1969년 이능우 숙명여대 교수가 처음으로 홍길동이 실존인물임을 발표한 이후, 1981년에는 김기동 동국대 교수가 조선시대 문헌설화 20종을 집대성한 「한국문헌설화전집」 전 10권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계서야담(溪西野談)」, 「청구야담(靑丘野談), 「해동 이적(海東異蹟)」 등의 야사에서 실존인물 홍길동의 행적과 활동내용을 찾아냈다.
설성경 연세대 교수는 1997년 「실재했던 홍길동의 생애 재구(再構) 가능 성」이라는 논문에서 홍길동은 관군에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유구국(현 오키나와)에 일행과 함께 정착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조선 왕조실록에 처형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고, 「계서야담」, 「증보(增補)해동이적」등에 도피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오키나와 역사를 연구한 일본의 역사학자 가네나 소도쿠도 여러 차례 홍길동의 오키나와 정착설을 주장한 바 있다.
실록에는 연산군 6년인 1500년 11월 22일 홍길동의 체포부터 같은 해 12월 28일 범행에 가담한 지방관리들의 처벌까지 모두 6건, 중종 8년, 18년, 25년, 26년, 선조 21년 각 1건 등 홍길동과 관련된 기록이 모두 11번 나오는데, 그 어디에도 홍길동의 처벌에 관한 언급이 없다. 당시에는 일반 형사범의 경우도 사형을 집행하려면, 임금의 재가를 받아야 했는데, 수십 년 후까지 영향을 미친 중대 범죄였음에도, 단 한 줄의 처벌기록도 없음은 많은 의문을 낳게 한다.
실록 10월 22일 두 번째 기사는 삼정승이 강도 홍길동(洪吉同, 소설에서는 洪吉童으로 표기)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참을 수 없다는 보고이고, 28일 두 번째 기사는 조력자 엄귀손의 처벌에 관한 논의인데, 이 기사 말미에 엄귀손의 처벌은 홍길동의 문초가 끝난 뒤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 보아 22일 체포되어 28일까지 어디엔가 구금되어 문초를 받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날 이후 실록 어디에서도 구체적인 범죄내용이나 처벌에 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28일 이후 탈옥했거나, 종친이나 의외의 거물이 연루되어 서둘러 종결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게 한다.
삼정승이 직접 보고할 만큼 사회적 파장이 컸던 사건이어서 그만큼 경계도 삼엄했을 텐데, 어떻게 탈옥이 가능했을까. 왜 조정은 경계를 게을리 한 의금부의 책임자나 배후를 처벌하지 않고 이 사건을 덮었을까. 실록과 야담집에 나오는 기록만으로 이 사건을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는 없지만, 실존인물 홍길동의 가족관계와 가담자, 사회적 파장 등을 통해 당시 상황의 일부는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극이 다큐멘터리가 되지 않으려면 픽션이 필수이긴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홍길동의 아버지를 노비로 설정한 것은 작가의 과도한 창의력의 결과물인 것 같다. 남양홍씨 족보와 만성대동보(萬成大同譜)에 홍길동의 아버지로 등재된 홍상직(洪尙直)이 실록에는 한자마저 같은 동명인(同名人)이 여러 명이어서 그중 한사람을 특정하긴 어렵지만, 당상관을 지낸 고관대작인 것만은 확실하다. 일부에서는 남양홍씨 족보에 상직과 문씨 사이에 홍길동의 이복형인 귀동과 일동이 있음을 들어, 세종 실록1420년 10월 24일 첫 번째 기사에 나오는 경성절제사(鏡城節制使, 정3품 무관직) 홍상직(洪尙直)을 아버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족보와 실록에 나오는 부부의 이름이 우연히 같았을 뿐, 아버지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실록 1428년 10월 28일 여섯 번째 기사는 예조가 남편의 묘를 3년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홍상직의 처 문씨를 절부(節婦, 절개를 지킨 부인)로 선정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동래 유배에서 풀려난 1423년 12월 9일부터 3년간의 시묘가 시작된 1425년 사이에 사망했음을 의미한다. 즉 1443년 태어난 홍길동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 1440년을 전후해 경성절제사(鏡城節制使, 정3품 무관직)를 지냈으며, 훗날 이시애의 난에도 연루된 홍상직(洪尙直)이 관기 옥영향과 함께 살았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다.
홍길동의 어머니로 추정해 볼 수 있는 여성으로는 두 명이 등장하는데 그 어느 쪽도 확실하지는 않다. 만성대동보에는 길동이 1440년 홍상직과 사비인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1920년대 편찬된 이 족보는 곳곳에 오류가 있어 신뢰하기 어렵다. 또 다른 여성은 세종실록 1444년 7월 22일 세 번째 기사에 나오는 옥영향이다. 이 여인은 홍상직이 경성절제사를 지낼 때 함께 살던 기녀로 이날 기사는 함길도관찰사가 옥영향이 진술한 홍상직의 수상쩍은 행동을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기록만으로는 누가 어머니인지 알 수 없지만, 소설이나 드라마에서처럼 낮은 신분인 것만은 확실하다.
홍상직이 이시애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은 세조실록 1467년 7월 22일 세 번째 기사에서 비롯된다. 이때는 이시애의 난이 시작된 지 두 달여가 지난 후로 황해도절도사가 난과 관련하여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민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지난번 경성부사(鏡城府使, 정3품 지방수령)로 제수 된 홍상직이 모반하여 남도의 수군을 여러 도에 숨겨 두고 있어 이에 맞설 수군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
무인으로서의 기질은 아버지를, 임기응변에 강하고 호방한 성격은 형인 일동(逸童, 1412~1464년)을 많이 닮은 것 같다. 일동은 세종 24년인 1442년 과거에 급제하여 돈녕부 부승(副丞, 정8품)에 제수되었는데, 처음부터 순탄하지는 못했다. 같은 해 12월 10일 두 번째 기사는 사직 이계화, 승문원 박사 장계숙, 예조좌랑 박적선 등과 함께 업무를 태만히 하여 몇 년 동안 성과를 내지 못한 죄로 장 80대를 맞았다는 내용이다.
과거급제 8년만인 1450년 사간원 우정언(右正言, 정6품)에 오르면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문종실록 1450년 5월 27일에는 재령군수 이염의를 빈민구제용 쌀과 콩을 도용한 죄로, 7월 9일은 지영천군사로 발령된 김이상(金異常)이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니 철회를, 8월 13일은 기천현의 군(郡) 승격에 따른 군사(郡事)와 현감의 품계조정 등 수없이 많은 사정활동(司正)과 정책건의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매사에 의욕이 넘치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세조실록 1457년 2월 7일 다섯 번째 기사는 일동이 중시(重試, 당하관 이하의 관료를 대상으로 10년마다 보는 시험)에 3등을 했으니 서울로 돌아오라는 내용이다. 이때 그는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가던 중 시험소식을 듣고 되돌아 와 응시한 뒤 다시 출발한 것. 일동은 축하연에 참석 하라는 명을 무시하고 북경으로 가는 바람에 탄핵됐으나, 임금의 배려로 무마되었다. 그 후 몇 차례 더 사신으로 오가며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1464년 52세를 일기로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중 홍주(洪州, 현 충남 홍성군)에서 과음으로 숨졌다.
세조실록 1464년 3월 13일 네 번째 기사는 홍일동에 대한 평이다. 성질이 방광(放曠, 언행이 구속받지 않음)하여 사소한 예절에 구애받지 않고, 평생 더러운 것을 피하지 않았고, 나쁜 옷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술을 두말까지 마시고, 시 짓기를 좋아했다.
임금이 선위사(宣慰使, 사신을 위문하기 위해 파견하는 관직)로 보낸 것도 술을 잘 마시기 때문인데, 명을 받고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홍주에 이르러 여러 차례 선위례(宣慰禮)를 치르며, 마음껏 마시고 대취하여 죽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이를 듣고 즉시 어의를 보냈으나 이미 늦었다. 임금은 장례용품을 하사하며 부의를 표했다.
실록에서 홍길동사건과 직접 관련된 기록은 모두 6건인데, 1건은 홍길동 체포, 1건은 가담 또는 방조한 지방관리의 처벌에 관한 보고이고, 나머지 4건이 공범혐의를 받고 있는 엄귀손 첨지(僉知, 중추원 소속 정3품 무관직)에 관한 것이다. 조사를 받던 중 같은 해 12월 21일 옥사(獄死)했는데, 임금이 “이런 형편없는 인물이 어떻게 당상이 될 수 있었느냐. 인사에 관여했던 정승들을 모두 불러 들여라.”며 진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날 삼정승은 군공(軍功)이 있는 까닭이지만,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군공 보다는 든든한 배경이 있어 가능했다.
이 사건 이전에도 온갖 비행으로 실록에 수 없이 등장하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의 여러 비위 중 으뜸은 청평군(靑平君) 한계순의 후처 심방(心方)과의 간통사건이다. 성종실록 1490년 5월 1일 두 번째 기사는 사헌부의 보고로 첨지 엄귀손이 충청도 면천(沔川)에 살다 사망한 한계순의 후처가 재산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홍천에 사는 모친의 병환을 돌본다며 휴가를 낸 뒤 심방과 간통했다는 내용이다.
6월 17일 두 번째 기사는 사헌부가 이는 장 80대에 고신(告身, 관원의 임명장) 3등급 강등에 해당된다고 구형한 것이다. 이에 임금이 승지들에게 의견을 묻자, 이들은 상(喪)을 치른지 이미 3년이나 지났으니 간통이라 할 수 없고 다만, 병가는 거짓말이었으니 처벌하자는 의견을 냈다.
같은 해 7월 7일에는 엄귀손이 오위장에 임명되자 좌부승지 허침(許琛) 등이 수절 중인 재상의 후처와 간통한 것을 비롯한, 여러 비행을 들어 오위장 제수를 반대하자, 병조에서는 이미 사유(赦宥, 죄를 용서함)를 받았고 첨지는 예사로 주는 벼슬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고 그를 비호했고, 임금(성종)도 이를 따랐다. 영월엄씨 족보를 보면, 성종이 아꼈던 후궁 숙의(淑儀, 후궁에 내리는 종2품 작호) 엄씨가 귀손과 같은 집안 간이다.
비록 서얼이긴 하지만, 홍길동도 왕실의 외척이다. 중국 사신을 접대하다 과음으로 순직한 이복 형 일동의 딸이 성종이 총애했던 숙용(淑容, 후궁에 내리는 종3품 작호) 홍씨이다. 특별히 총애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성종과의 사이에서 7남 3녀(연산군과 중종의 이복형제)를 둔 것으로 보아 금슬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홍길동과 공범인 엄귀손은 연산군과 중종의 외숙인 셈이다. 88년 후인 1588년 1월 5일 실록에는 예전에는 강상(綱常)의 변(삼강오륜을 저버린 반인륜적 사건)이 홍길동과 이연수 뿐이어서,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욕으로 썼는데, 요즘은 풍속이 피폐하고, 강상의 변이 너무 잦아 욕으로 쓸 수 없게 되었다는 대목이 있다. 이처럼 먼 훗날까지 욕받이가 되었을 만큼 큰 사건이었음에도, 주범은 도주하고 공범은 옥중에서 자연사하는 것으로 흐지부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얽히고설킨 임금과 대신, 종친간의 복잡한 관계도 한몫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록에서는 홍길동이 강상의 죄인이었지만, 드라마에서는 권력과 맞서 싸워 백성들의 마음을 훔친 의로운 도적이다. 오늘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서도 장밋빛 청사진으로 국민의 마음을 훔치려는 지도자보다는, 함께 헤쳐 갈 수 있다는 믿음과 신념으로 국민의 마음을 얻는 지도자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