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우리 민족이 걸어온 독립의 길 < 독립기념관 >
11월 17일은 순국 선열의 날이다. 순국선열이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윗대의 열사를 이른다. 그렇다면 순국선열을 기리고 있는 독립기념관은 언제,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e-기록 속으로」 11월호 기획특집으로 독립기념관을 살펴본다.
독립기념관은 ‘국난을 극복한 강인한 민족의 의지와 역량을 조명하여 역사교육의 장으로 보존하고, 국민정신의 구심점으로 삼아 영원히 전진하는 민족의 기상을 선양한다’는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사실 광복 직후인 1946년 2월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준비위원회’에서 독립기념관 건립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바 있었지만 민족진영과 좌익의 갈등, 6.25전쟁의 발발 등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러던 중 광복 30주년을 앞둔 1974년 〈민족박물관건립추진계획안〉이 나오면서 독립기념관 건립 논의가 재개되고 1982년대 초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이 불거지면서 독립기념관 건립이 현실화되어 범국민적인 관심과 후원으로 오늘날의 독립기념관이 탄생하였다.
01 서대문의 독립문, 민족자주와 독립의 첫 상징물
중세 동아시아의 질서 속에는 중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기며 사대(事大)하는 실리 외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사대외교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국가 간 대등한 외교는 아니었다. 당시의 ‘모화관(慕華館)’과 ‘영은문(迎恩門)’은 이러한 사대외교의 상징으로 세워졌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귀국한 1895년은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조선이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이 손상된 때였다. 서재필은 중국에 대한 사대의 표상이었던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중국사신을 접대했던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고치고, 그 일대를 독립공원으로 조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독립협회의 주요 사업으로 삼고 건립을 위한 성금 모금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성금 기탁자에는 왕태자, 도시민, 농민, 학생, 외국인 등 각계각층이 망라되었다.
‘독립문’은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하고 영구적인 독립선언과 일・러 및 서구 열강의 압력을 배제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고, 서재필이 프랑스 개선문을 모형으로 설계하였다. 독립문의 건립은 1896년 9월부터 시작하여 1897년 11월에 완공되었고, 독립문 앞면과 뒷면에 각각 국문과 한문을 새겨 민족 주체의식과 자주의식을 천명하였다.
‘독립문’은 민족의 자주독립과 자강의 의지를 담아 세워졌으며 이러한 의지가 독립기념관 건립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독립문과 독립기념관이 국민의 성금을 거두어 건립되었다는 공통점으로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
독립기념관 겨레의집(1986)
-
독립기념관 모습(1994)
02 독립기념관, ‘민족의 혼’을 담는 겨레의 상징
1876년 개항 이래 끊임없이 전개되었던 항일투쟁은 3.1 운동으로 집약되어 폭발하였다. 3.1 운동은 전 세계인들에게 우리의 자주독립 의지를 천명하였고,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일제의 탄압과 수탈은 교묘해졌으며, 해외 독립군의 활동과 국내 비밀결사 및 무장 투쟁도 격렬해졌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외교투쟁, 의열단 등의 항일단체를 중심으로 무장 독립투쟁이 전개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국군의 면모를 갖추고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고자 대비했던 독립투사들에게는 허탈감도 있었다.
독립기념관의 건립 배경에는 이러한 애국선열들의 불굴의 민족혼과 투쟁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 민족적 의지가 들어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분단된 남과 북이 하나가 될 때까지 온 국민이 노력하여 제2의 자주독립을 성취하자는 의지도 포함되어 있어 독립기념관은 ‘우리의 소원, 꿈에도 소원’인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적 염원까지 담아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03 평화의 길을 여는 교육의 장
1982년 12월 23일,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는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95’를 최종 독립기념관 부지로 선정하였다. 1983년 8월 15일 기공식이 시행되었으며 1984년 8월 15일에 착공식이 열리고 1986년 4월 8일에는「독립기념관법」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
독립기념관법 공포안(1986)
초대 독립기념관장으로 안중근 의사의 종질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안춘생(安椿生) 선생을 임명하고 1986년 8월 15일 개관할 계획으로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개관을 앞두고 8월 4일에 뜻하지 않은 화재가 발생하여 개관을 1년 늦추어야 했고, 1987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은 준공, 개관되었다. 1995년 8월 15일 ‘통일염원의 동산’이, 1998년 8월 11일 ‘구 조선총독부 부재공원’이 조성되었다.
독립기념관에는 총 9만여 점의 유물이 전시, 보존되고 있으며 2018년 현재 7개의 전시관과 입체영상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전시관은 재현 및 체험공간, 3D입체영상 등으로 전시주제를 실감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연출하였다.
독립기념관에는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가 있는데 이곳에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사 연구, 학술토론회 개최, 논문집・자료집 발간 등을 통하여 다양한 교육·학술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