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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대형 화재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화재는 언제나 무서운 것이지만, 소방시설과 소방체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던 시절, 화재는 한번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큰 규모로 확대되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에서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도록 범국민 운동을 펼쳐 나갔는데 그때 가장 유명했던 표어가 바로 위에 제시한 불조심 표어이다.

1950년대 부산의 대형화재

1953년 1월 30일 부산 국제시장 화재에서 대규모 화재가 일어났다.
부산 신창동에 있는 국제시장은 1945년 광복이 되자 귀환동포들이 모여들어 노점을 차리면서 시장으로 형성되었는데 1948년에는 공식명칭을 ‘자유시장’으로 정하고 단층 목조건물 12동을 건립하였다. 이후 6.25전쟁 중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그야말로 성시를 이루었는데 미군의 군용 물자와 부산항으로 밀수입된 온갖 상품들이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공급되었다.
1953년 1월은 아직 휴전이 되기 전이었고 피난정부가 부산에 있을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지낸 곳인 만큼 화재의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지만, 전쟁 중이었고 불안한 사회 상황에서 화재 방지 대책은 거의 전무하였다. 화재는 1953년 1월 30일 부산 신창동의 술집에서 발생한 불이 남동풍을 타고 인근 건물로 옮겨 붙으면서 번지기 시작해 삽시간에 국제시장 전체와 신창동, 부평동 일대를 전소시켰다.

부산국제시장 대화재 현장 참고 이미지
부산국제시장 대화재 현장(1953)

당시 건물은 대부분 불에 타기 쉬운 판자집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탓에 도로는 협소해 소방인력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해 화재를 초기에 진압하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 부산은 갑자기 많은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언제나 ‘물 기근’에 시달렸는데 불이 난 당시 화재를 진압할 물조차 변변히 없었다고 한다.

이 불로 건물 4260채가 전소하였고 이재민 수는 약 30,000명에 달하였으며, 총 피해액은 1,400여억 원으로 추산되었다. 이 화재는 화재 자체도 비극이었지만, 6.25전쟁의 와중에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귀환동포나 피난민들이 화재로 다시 이재민이 됨으로써 이중, 삼중의 비극을 불러 일으켰다.

이승만대통령 부산화재현장 시찰 참고 이미지
이승만대통령 부산화재현장 시찰
(1953)
부산대화재 현장(부산 철도국) 참고 이미지
부산대화재 현장(1953)
부산시가 화재 사고현장 참고 이미지
부산시가 화재 사고현장(1957)

그 해가 가기 전 부산에서는 또 한번 큰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1953년 11월 27일 부산시 중구의 피난민 판자촌 일대에서 발생한 화재가 당시 부산 중구 일대와 부산역으로 번진 사건이다.
화재가 발생한 때는 그 해 7월 전쟁이 끝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8월 15일 서울로 돌아간 후였는데, 아직까지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을 떠나지 않고 판자촌을 만들어 살고 있었다. 특히 처음으로 화재가 시작된 중구 영주동 일대는 피난민 판자촌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조그마한 불에도 대형 화재가 날 수 있었다. 11월 27일 저녁 8시 30분경에 최초의 화재가 발생하였고, 이후 바람을 타고 불길이 여러 곳으로 퍼졌다. 불길은 이튿날 6시 30분경에 잡혔지만, 재산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이 사고로 부산역이 전소되었고 이 외에도 부산일보, 부산우편국이 화재의 피해를 입어 도시의 교통, 통신 등이 마비되었다.
부산 중구 일대를 반 이상 태운 이 화재로 주택 3,132채가 전소했고, 사상자 29명, 이재민이 6000여 세대 3만여 명이 발생하였다. 피해액은 177억 환이었다. 이 당시의 이재민 구제는 우리 정부와 미군이 함께 나섰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미군들과 함께 화재현장을 돌아보는 기록영화가 남아 있다.
6.25전쟁 전후 부산의 화재는 전쟁으로 고향을 잃고 피난을 온 사람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준 비극적 사건이었다.

부산화재복구에 관한 건 참고 이미지
부산화재복구에 관한 건(1954)

1970년대 대연각호텔 화재

1970년대에 일어나 대형화재는 대연각호텔 화재이다. 이 화재는 1971년 12월 25일 성탄절 아침에 일어났는데 날이 날이니 만큼 사람들에게 준 충격은 컸다.
충무로에 소재했던 대연각호텔은 화재발생 2년 전인 1969년에 문을 연 호텔로 당시로서는 높은 건물인 22층에 최신식 설비를 자랑했다.
화재는 1층 커피숍에서 프로판가스가 폭발해 2m쯤 떨어져 있던 가스레인지로 옮겨 붙으면서 삽시간에 번졌다. 당시로서는 서울에 몇 개 없는 높은 건물이었기에 소방차만으로 진화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군 헬기와 미8군 헬기, 대통령 전용 헬기도 동원되었지만 구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22층이라는 대규모 건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텔 안에는 화재에 대비할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스프링클러도 없었고 탈출용 밧줄도 없었다. 고가 사다리차가 있었지만 겨우 8층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화재를 진압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지켜보는 동안 불은 건물 전체에 옮겨 붙었고 10시간이 지나서야 꺼졌다. 건물 안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애절한 사람들의 모습과 불과 연기를 이기지 못해 높은 건물에서 떨어지는 사람 등 당시의 참상이 기록영화에 담겨있다.
대연각호텔 화재는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 사고로 기록되었으며 우리나라 화재 역사상 가장 큰 인명피해를 낸 사건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이 163~168명이었고 다친 사람은 63명이었다. 재산 피해는 당시 소방서 추정으로 약 8억 3820만 원이었다. 헐리우드에서는 이 사고를 모델로 삼아 ‘타워링’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대연각호텔 화재진화 장면 참고 이미지
대연각호텔 화재진화 장면(1971)
불조심(대연각호텔 화재현장) 참고 이미지
불조심(1971)
화재예방을 위한 긴급지시 참고 이미지
화재예방을 위한 긴급지시(1972)

이 화재 이후 1973년에 「화재로 인한 재배보상과 보험가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은 의무적으로 보험에 가입하게 됨에 따라 대상 건물은 반드시 전체 손해배상책임 가입 조건부 화재보험을 가입하게 되었다.

화재예방을 위한 긴급지시 참고 이미지
화재예방을 위한 긴급지시(1972)
화재로 인한 재해보상과 보험가입에 관한 법률 참고 이미지
화재로 인한 재해보상과 보험가입에 관한 법률(1973)
(집필자 :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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