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인권의 날, 우리나라에는 천 년 전에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 사람의 날 치르던 과거, 집단 난동으로 무산되기도
우리나라는 1948년 세계인권선언 채택 당시 격변의 시간을 겪고 있어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민주화와 운동가들의 헌신으로 인권에 있어 빠르게 진일보한 모범국으로 손꼽히고 있다. 아마도 이는 일찍부터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존엄의 전통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에서는 옛적부터 1월 7일(이하 음력)을 인일(人日)로 정해 음식을 나누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편히 쉬도록 했다. 중국 양나라(502~557년, 남북조시대 강남에 건국된 왕조) 종름(宗懍)이 지은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양쯔강 중류 형초지방 연중행사)가 이날 풍습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송나라(960~1279년) 고승(高承)이 저술한 사물기원(事物紀原, 여러 물건의 유래를 설명한 백과사전)은 한나라(BC 206~220년) 동방삭(東方朔, BC 154~ 193년 문학가)의 점서(占書)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사(1449~1451년, 김종서‧정인지 편저)와 조선왕조실록,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49년 홍석모 지음) 등에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인일이 실록에 처음 나온 것은 개국 다음 해인 1393년 1월 7일이다. 여러 신하들이 조하(朝賀, 각종 경축일에 조정에 들어 임금에게 하례함)하니 인승녹패(人勝祿牌, 인일을 기념하여 녹봉을 받는 관료들에게 내리는 패)를 내렸다는 내용이다. 그 다음해인 1394년 인일에도 행사를 가졌다. 이날 임금이 수창궁에서 하례를 받았으며, 이어 공사가 한창이던 종묘를 방문해 감독관에게 “오늘은 모든 일을 간단히 하고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로 보아 이미 오래 전부터 인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고려사와 동국세시기에도 고려 때부터 지내 온 풍습으로 소개하고 있다.
인일은 일본에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개국 초기 일본은 수시로 사신과 진귀한 토산품을 보냈는데, 인일에도 사신과 선물을 보냈다. 세종실록 1402년 1월 7일 첫번째 기사가 그것인데, 왜국 사신이 인일 하례에 참석하여 검을 바쳤다는 내용이다.
세종은 인일을 폐지하려 했는데, 아마도 지나친 선물이나 허례허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실록 1423년 1월 5일이다. “3년 안에 인일, 단오, 유두날에 각전(各殿)에 바치던 잡물을 없애도록 하라.” 임금은 왜 당장 금지하라 명하지 않고 3년의 유예기간을 두었을까. 이미 익숙한 풍습이어서 갑자기 폐지하면, 혼선과 부작용이 우려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예기간이 끝나는 1425년 인일 첫 번째 기사는 인일하례를 정지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풍습을 그렇게 쉽게 지울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세종실록 1427년 인일 다섯 번째 기사는 인일 진상품에 대한 전교이다. “지금부터는 인일에 진상하는 물건은 금·은으로 장식한 것은 쓰지 말라” 사실상 2년여 만에 부활한 것이다.
몇 차례 더 폐지와 재개를 반복하던 인일하례는 성종 때부터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성종실록 1486년 1월 7일 두 번째 기사는 인일을 맞아 홍문관, 병조, 도총부 당상관들을 승정원으로 불러 음식을 대접하고 시를 짓게 했다는 것이다. 실록에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인일기록이 있는데, 연산군은 후궁들에 관심이 많았다. 1506년 인일 다섯 번째 기사는 임금의 전교이다. “숙용(종3품 비), 숙원(종2품 비), 천과흥청(天科興淸, 연산군이 가까이 하던 기생에게 붙인 등급)에 올리는 춘번자(春幡子, 입춘날 사대부 집에서 채단으로 만드는 장식품)나 인승목(人勝木, 인일 만드는 인형의 장식물)은 평소에 바치던 수량에 구애받지 말고 원하는 대로 진상하라.”
임진왜란 이후로는 이날 치루는 과거가 더 큰 관심사였다. 선조실록 1601년 9월 6일 첫 번째 기사는 전후(戰後) 대책을 논의한 내용이다. 별전에서 강이 끝난 후 동지사(종2품 관직) 이정구가 아뢰었다. “난리를 겪고 난 후 선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인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선비를 모으는 데는 과거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선 그동안 중단되었던 인일제(人日製, 이날 치루는 과거)를 다시 시행하여 시상하고 경쟁도 시켜 학문을 권장해야겠습니다.” 이때부터 인일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이 과거에 관한 것이다.
인일제는 유난히 사고가 많았다. 광해군일기 1615년 1월 8일 기사는 전날 치른 과거시험에 대한 보고이다. “신이 어제 좌참찬 윤길승과 함께 아침 일찍 성균관에 나아가 조반까지 기다렸는데, 관각(홍문관, 예문관, 규장각)의 당상관이 아무도 나오지 않아 부득이 되돌아 왔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해괴한 일입니다. 해당자들을 모두 추고하소서.” 인재를 등용하는 대사인 만큼, 반드시 당상관 이상이 총감독을 맡아야 하는데, 당상관이 아무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인조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645년 인일제였는데, 대제학 이식이 성균관 관원들과 시험감독을 했다. 이는 인일 시험의 경우 반드시 대신 이상이 감독하도록 하고 있는 시험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많은 수험생은 물론, 일반 선비들까지 거세게 항의했다.
시험을 무단으로 연기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숙종 3년인 1677년 인일제는 수험생들의 난동으로 과거시험이 무산되는 초유의 사태였다. 1월 24일인데, 인일인 7일 있어야 할 시험을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17일 간이나 미루어 오다가 이날 시험을 치른 것. 글제를 내걸자마자 흥분한 유생 수백 명이 문을 부수고 시험장에 난입하여 이를 제지하는 관리들을 마구 폭행하고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크게 진노한 임금이 주동자는 물론, 가담자 모두를 찾아내 엄벌에 처하라 명했으나, 이미 모두 도망친 뒤여서 한 사람도 잡지 못했다. 결국 이 해 과거는 왜 연기되었는지, 누가 주동했는지, 또 다른 이유나 배후가 있었는지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 채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숙종 3년인 1677년 2월 23일 시행한 문과회시(초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하는 2차 시험)가 조선 최악의 부정시험이었는데, 이 해 있었던 인일제도 마찬가지였다. 실록 이날 두 번째 기사가 이번 시험만 무효처리하고 재시험을 볼 건지, 초시(初試, 1차 과거시험)부터 다시 치를 건지를 논의한 내용이다. 수험생들의 부정행위 고발이 계속되자, 감독관이 각자 시권(試券, 답안지)을 들고 동쪽 마당으로 옮겨 줄을 서도록 했더니 그 중 12명이 시권이 없었다. 여필진 등 6명은 초시에 응시하지 않은 무자격자, 윤상은 등 2명은 수종(隨從, 따라 다니며 시중을 드는 사람), 임재 등 2명은 구경 삼아 입장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즉 차술(借述, 대리시험자가 작성한 답안지를 제출)하거나 차서(借書, 다른 수험생의 답안지를 베껴 씀)를 위해 입장한 것이다.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번 시험만 패하고 초시합격자들을 대상으로 재시험을 치르자는 영의정 허적과 초시에서도 부정행위가 확인된 만큼, 모두 백지화해야 한다는 좌의정 권대운이 팽팽히 맞섰다. 처음에는 전자였던 임금도 전면 무효화 주장이 워낙 거세지자 결국 후자를 택했다. 이어 처벌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일부 강경파들은 사형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임금이 수위를 낮추었다. “인일에 있었던 과거와 초시 때 답안지를 도개(圖改, 베껴 씀)한 짓은 통탄스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사형까지 할 일은 아니다. 모두 변방에 충군(充軍, 병졸로 강제징집)하되 물간사전(勿揀赦前, 어떤 경우도 사면을 할 수 없음)하라.” 이로 보아 이날 시험에 앞서 치러진 인일제에서도 심각한 부정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일제 2차 필기에서 수석을 하고도 3차 구술시험을 망쳐 임용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영조실록 1760년 1월 10일 첫 번째 기사이다. 임금이 명정전에 나가 인일제를 직접 참관하였는데, 수석을 했으나 구술시험인 강(講)을 제대로 못한 조중첨을 재시험에, 강을 잘한 차석 이익선에게 장원급제를 주었다는 것. 이날 일은 두고두고 논란이 되었다. 8년이 지난 1768년 9월 29일 지평(사헌부 종5품) 권극이 상소했다. “설강령(設講令, 구술시험 규정)과 주금령(酒禁令, 시험장 음주금지 규정)이 있기 전에 이로 인해 버림받은 자가 있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에 임금이 명했다. “조중첨의 일은 지금까지도 애석해 하고 있다. 그대가 요청한 것은 조중첨과 술에 취해 과장에 들어온 송 아무개 둘 다를 칭하는 것인가. 주금령이 아니더라도 과장에서 술을 마신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과장을 엄하게 관리하는 것이 도리인데, 그대가 어떻게 그런 자의 용서를 청하는가.”
온갖 설움 끝에 관직에 오른 조중첨과 수석합격자 이익선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현실은 냉혹했다. 글재는 뛰어났지만,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조중첨은 28년여를 한직으로 전전하다가 불행하게도 귀양으로 관직을 마감했다. 정조실록 1796년 9월 19일 기사가 그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안산군수 조중첨을 형장을 쳐서 귀양 보냈다. 임금이 거둥할 때 이를 핑계로 백성들에게 재물을 거두어 들였다는 어사 정만석의 보고에 따른 것이다. 뛰어난 언변 덕분에 수석을 차지한 이익선은 설서를 시작으로 정언, 지평, 문학, 수찬 등 엘리트 코스를 두루 거쳐 정조 7년인 1783년 언론기관의 수장격으로 문과출신의 명망가들만 갈 수 있었던 사간원 대사간(정3품)까지 올랐다.
실록에서 보듯 시대가 바뀌면서 인일이 임금의 하례와 과거를 보는 날 정도로 본말이 전도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인간존중이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과 제도는 정반합을 거듭하며 조금씩 변한다. 오랜 인권암흑기가 있었지만. 몸을 던져 이를 지키고 증진해 온 선구자가 있어 인권 선진국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다. 그분들께 존경과 감사를 표하며, 모든 사람의 인권이 존중받는 그날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