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계유정난으로 맺은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 있다
「조선왕조실록」 - 역모자 가족 멸문 불구, 세조 딸과 김종서 손자 인연
드라마 ‘대군-사랑을 그리다’
「대군」은 북방 전쟁터에서 죽은 것으로 보고된 은성대군 이휘(윤시윤 扮)가 3년 만에 돌아오면서 조성되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시작되는데, 그 어디에서도 실존인물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전개과정을 뜯어보면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과 시와 그림에 능해 역대급 인기를 누렸던 안평대군이 모티브였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제작진도 두 주인공이 수양과 안평임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총 20부작으로 곧 대단원에 접어들어 관전 포인트가 따로 필요한 시점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지 않을까하는 노파심에서 주요 줄거리에 대한 팩트 체크와 계유정난, 그 이후를 살펴보면, 드라마보다 더 애절한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 등 흥미로운 사실이 많다.
먼저 두 왕자 갈등의 1차 원인제공자인 심씨대비(양미경 扮)는 실존인물일까. 심씨는 병약한 아들(문종)을 이어 어린 나이에 즉위할 손자(단종)를 보호하기 위해 일찍이 야심을 드러낸 둘째 진양을 견제하고, 좀 더 유순한 셋째 은성을 지지해 형제간의 갈등을 유발한다. 주인공에 버금가는 비중이지만, 은성의 호위무사 루시개와 함께 순도 100% 가공인물이다. 심씨는 대군들의 친모인 소헌왕후인데, 드라마에서는 세종보다 더 오래 살지만, 실제로는 세종 28년인 1446년 세상을 떠났다. 문종이 즉위한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450년이다. 또한 단종의 어머니 권씨는 1441년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숨졌다. 따라서 병약한 임금과 어린 손주를 걱정하는 심씨의 모델로 추정해 볼만한 왕후는 아무도 없었다.
또 다른 중요 역할이 진양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 양안대군(손병호 扮)이다. 극중에서는 장조카를 제쳐두고 둘째인 진양을 돕는데, 동생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한 때문인지 냉혹하고 탐욕스런 이미지이다. 극중에 묘사된 이미지와 세자에서 폐위되기 이전 양녕과 많이 닮아 있다. 무엇보다 두 대군의 큰아버지라는 설정만으로도 극중 양안은 양녕대군일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상반된다. 동생에게 세자 지위를 시원시원하게 내주고, 그것도 부족해 전국을 유람하며 동생의 부담을 덜어준 대인과 패륜에 가까운 추문을 일으킨 폐세자, 두 얼굴을 함께 가지고 있다. 실록에는 후자의 이미지를 갖게 한 여러 기록이 있는데, 태종실록 1417년 2월 15일 두 번째 기사가 세자 폐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어리(於里) 납치사건이다. 전 중추(中樞, 관직) 곽선의 첩 어리의 미모와 재능에 대해 전해들은 세자가 궁에 들 것을 명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하자 급기야는 담을 넘었다. 어리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는지 그녀를 궁궐로 납치했다. 이 일로 그간 세자가 벌인 일탈이 드러났고, 계속되는 세자의 엇박자로 양녕은 결국, 조선 최초의 폐세자가 되었다. 지금까지 방송된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양녕은 동생에게 많은 것을 양보한 나쁘지 않은 이미지였다. 그러나 이는 훗날 정치적 필요에 의해 가공된 이미지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양녕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약 200여 년이 지난 1659년이다. 차남으로 왕위에 올랐던 효종이 승하하자, 그를 추종했던 남인들은 장남이든, 차남이든 유능한 쪽이 적자라는 논리가 필요했다. 양녕이 여러 비행으로 폐위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보다 유능한 충녕의 세자 책봉을 위해 스스로 미친 짓을 했고, 즉위 이후에도 정쟁의 빌미가 되지 않기 위해 일탈을 일삼았다는 것. 이 같은 주장은 장자보다 차남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대군들에게 나쁘지 않은 논리여서 적극 수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한 쿨한 형님보다는 드라마 「대군」에서처럼 호전적이고 욕심 많은 인물이 실제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극중에서 그림을 좋아하는 여주인공 성자현이 안료가게에서 심중청(深重靑)을 사려다 사기를 당할 위기에 처하고, 은성대군이 이를 구해주는 것으로 인연이 시작되는데, 심중청은 무엇일까. 푸른색 물감인 심중청은 실제로 사기의 대상이 될 만큼 귀한 것이었다. 세종은 각종 지하자원 개발(본지 2017년 4월호 소개)에 관심이 많았는데, 심중청도 그 중 하나이다. 세종실록 1429년 4월 20일 기사는 최원이 심중청 만드는 법을 전습(傳習)받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사망했는데, 사신단 수행원에 준해 보상하자는 내용이고, 같은 해 12월 3일 기사는 박서생이 드디어 일본에서 심중청 제조법을 배워왔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이때까지는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제조법을 확보한 세종은 원석 채굴에 적극 나선다. 박서생의 보고를 받은 지 20여 일 만인 23일 일본에서 가져 온 심중청석(石)을 나누어 각 도에 보내 같은 모양의 돌을 찾아보라 명했다. 다음해 10월 18일 기사는 공조의 보고이다. 각 도에서 심중청이 상당히 산출되고 있는데, 아전들이 숨기고 내놓지 않는다. 각 수령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감사를 벌이게 하고, 심중청을 발견하여 보고하면, 중인이나 양민은 관직을, 향리는 각종 역(役)을 면제, 천민에게는 돈으로 보상할 것을 건의했고, 임금이 이를 허락했다. 그 이후 각 지방에서 심중청석 채취 보고가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극중에서처럼 고급은 아니지만, 초보적인 단계의 제품은 유통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여서 그간의 사극은 대부분 수양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이번 「대군」에서는 적어도 5대 5이거나, 4대 6을 안평이 차지하고 있다. 인물 묘사도 실제와 흡사한데, 두 주인공의 혼인관계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 진양대군의 부인 윤나겸은 쇠락한 명문가의 차녀로 계획적으로 접근해 결혼에 성공한 야심가이다. 실제로도 음직으로 관직을 얻어 군기부정(군기감 종4품)이던 윤번의 둘째 딸이었다. 수양보다 한 살 아래로 11살에 결혼한 윤씨는 세종이 직접 간택했다. 자녀들 결혼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던 세종이 혼인도 올리기 전에 보모상궁과 감찰상궁을 윤번의 집에 보내 미래 며느리감인 첫째 딸을 돌보게 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변고가 발생했다. 파견된 상궁과 주변의 일치된 전언이 둘째가 훨씬 더 비범하고 예쁘다는 것. 세종은 즉시 둘째로 바꾸어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의도적으로 접근한 설정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이 며느리가 훗날 정희왕후로 예쁘고 야심가였음이 일치한다. 당대의 품절남 안평은 11살에 좌부대언 정연의 딸과 결혼해 미혼인 극중 설정과 다르다. 다만 1418년생인 형수 윤씨와 여주인공 자현이 친구이므로 1418년생인 은성대군과 그녀는 동갑내기 연인이었다.
드라마 ‘공주의 남자’
사진출처: KBS 홈페이지 (http://www.kbs.co.kr/drama/princess/)이 드라마의 배경인 계유정난에는 또 다른 드라마의 모티브가 되고도 남을 만한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었다. 조카를 죽이고 동생을 베어야 했던 피의 정쟁 속에서도 부부의 연을 맺은 세조의 딸과 정적인 김종서의 손자가 그 주인공이다. 정사는 아니지만, 수백 년을 구전되어 온 설화치고는 내용이 구체적이고, 지금도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일대에는 그들의 전설이 담긴 장소가 있다.
이들의 금지된 사랑은 계유정난이 있은 지 420년이 지난 1873년 전 의령현감 서유영이 편찬한 설화집 「금계필담」에 비교적 상세히 전해진다. 세조에게는 딸이 한 명 있었다. 이 딸은 계유정난으로 왕실과 조정에 피바람이 부는 것을 직접 보면서, 엄청난 공포와 회의를 느꼈다. 아버지에게 제발 여기서 멈추어 달라 간청했지만, 세조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정희왕후 윤씨는 딸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염려해 공주의 방에 불을 내 죽었다고 속여 도망치게 했다. 유모와 함께 어머니가 준 보물을 가지고 충청도 보은에 이르렀을 즈음, 계유정난을 피해 피난 중이라는 준수한 외모의 한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함께 산지 1년여가 지났을 때 서로가 원수의 자손임을 알게 되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세조도 그들의 생존소식을 듣고 돌아올 것을 요청했으나, 또 다시 잠적해 소식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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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필담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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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금계필담」에는 이들이 보은에서 살다가 사라졌는데, 그들의 흔적은 경상도 상주에 남아 있다. 등산객들에게 제법 알려진 백악산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사담리와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에 걸쳐 있는데, 입석리 쪽 등산로를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보굴이라는 석굴이 있다. 1989년 발행된 상주지(尙州誌)는 세조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가 이곳에서 산 것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예종실록 1468년 11월 28일 기사는 세조와 정희왕후 사이의 자녀에 대한 설명이다. 장남인 의경세자와 둘째 예종, 셋째 의숙공주를 두었는데, 공주는 일대좌리공신 정현조에게 시집갔다는 것. 「금계필담」의 저자 서유영은 글의 말미에 출처를 밝히며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했고, 실록은 하나뿐인 공주가 정현조에게 시집갔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이 이야기를 사실로 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그렇지만 입석리와 「금계필담」의 보은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당시에는 같은 지역일 수 있고, 400여 년 넘게 민간에 구전되어 온 이야기치고는 내용이 구체적이어서 사실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계유정난 4년 후 있었던 금성대군의 단종 복귀기도 때도 사랑의 불장난이 있었다. 경상도 순흥에 유배 중이던 금성에게 금연이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단종 복귀를 위해 이보흠 순흥부사를 자주 만나는 과정에서 이 부사의 종인 이동과 눈이 맞았다. 이들은 큰 보상을 꿈꾸며 금연은 금성이 작성한 격문을 훔쳐냈고, 이동은 격문을 들고 서울로 내달렸다. 곳곳에 숨어 있던 감시원들이 즉시 이를 보고했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풍기군수는 격문을 빼앗았고, 판중추부사 이징석은 이동을 붙잡아 각각 역모를 고변했다. 이 같은 내용은 세조실록 1457년 6월 27일, 같은 해 10월 9일 기사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그런데 실록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변의 일등공신인 이동을 참형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결국 사랑에 눈먼 두 남녀의 무모한 탐욕은 비극으로 끝났다.
동서고금에는 사랑으로 나라를 구하기도 하고, 금지된 사랑 때문에 패망하기도 한다. 사랑을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지구상에 인류가 있은 이후 가장 숭고한 불변의 가치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잠든 뿌리를 봄비로 흔들어 깨우는 사월도 어느덧 저물어 간다. 아직도 몸과 마음이 얼어붙은 어려운 이웃은 없는지 살펴보고, 사랑을 실천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