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분단현장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판문점소사(小史)
「조선왕조실록」 - 판문평(板門平) 표기, 임진왜란 때 유래 사실과 달라
판문점 전경(1958)
이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달 27일 전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역사적인 군사분계선 도보월경과 우리 민족의 염원을 담은 판문점선언을 통해 한반도에 더 이상의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8천만 우리 겨레와 전 제세에 엄숙히 천명했다. 당시 일산 킨텍스에 마련된 메인프레스센터에서는 기자들의 탄성과 환호가 계속되었다. 기자들마저도 손에 땀을 쥐게 한 이날 회담은 프레스센터에 설치된 대형 화면을 통해 9개국 언어로 동시통역되었으며, 역사상 최대 규모인 3천여 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실시간으로 소식을 전했다.
이처럼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세기의 이벤트이다 보니, 거의 모든 언론이 앞 다투어 판문점의 유래와 역사를 소개했는데, 아쉽게도 대부분은 잘못된 것이다.
몇몇 언론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들어 판문(板門)이라는 지명이 고려시대부터 유래되었다고 간략히 소개했으나, 대부분은 임진왜란 이후라고 설명했다. 1592년 4월 30일 왜군이 서울로 진격해오자 서둘러 경복궁을 빠져나온 선조 일행이 임진강에 도착한 것은 밤 9시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발만 구르고 있을 때 근처 정자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이 불길을 등불 삼아 무사히 강을 건넜는데, 이 정자가 율곡 이이의 석화정이고, 그의 아들이 선조를 위해 여기에 불을 지른 것. 동파리에서 한숨 돌린 일행이 길을 나섰으나, 이번에는 큰 비로 물이 불어난 사천강이 가로 막았다. 이에 인근 마을 백성들이 널빤지로 만든 문을 떼어다 다리를 만들어 임금을 건너게 했고, 이때부터 널문리라고 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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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 7일 북한 측이 회담장소로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 인근 널문리 주막거리를 제의했다. 유엔군이 이를 수용해 주막집 맞은 편 콩밭에 회담장을 마련했는데, 이 천막이 판문점의 시작이다. 당시 이곳에는 초가 세 채와 주막이 있었는데, 정전협상국 중 하나인 중국의 편의를 위해 널문의 한자 표기인 판문과 가게 점(店)을 합성해 판문점(板門店)으로 쓴 것이 공동경비구역(JSA)의 또 다른 이름이 된 것이다.
국내·외 언론이 소개한 내용 중 후자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전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4월 30일 새벽 피난길에 올라 다음 날 늦게 개성에 도착한 선조의 일정을 가장 잘 정리한 기록 중 하나가 선조실록인데, 이 기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 실록 이날 첫 번째 기사는 인정전(仁政殿) 앞 출발부터 벽제관 점심까지, 두 번째 기사는 점심부터 임진강 나루에 도착하기까지, 세 번째 기사는 강을 건너는 과정을, 5월 1일 첫 번째 기사는 임진강을 출발해 점심까지, 두 번째 기사는 개성까지를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널문리의 유래가 된 임진강 도강과 널문다리는 4월 30일 세 번째 기사부터 나와야 한다. 그러나 실록에는 석화정을 불태워 임금의 뱃길을 밝혔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오르기는 했으나, 등촉(燈燭)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늦은 시간 겨우 동파리에 도착한 임금은 타고 온 배는 가라앉히고, 나루터와 인가는 모두 철거하라 명했다. 이는 왜군이 이용할까 염려한 때문인데, 강을 건넌 백관은 절반도 되지 못했다. 5월 1일 아침 동파리를 출발한 일행은 이날 점심 쯤 널빤지를 떼어다 다리를 놓았다는 사천강에 도착했다. 그러나 실록에는 강을 건넜다는 내용이 아예 없고, “상이 동파관을 떠나 판문(板門)에서 점심을 들었다.”고만 적었다. 즉 이날 널빤지로 다리를 놓아 널문리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판문이라는 지명이 있어 이를 풀어 썼거나, 이전부터 널문다리가 있어 그런 지명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선조실록이 편찬된 것은 이 일이 있은 지 16년여가 지난 후여서 그날 일로 널문리라는 지명이 새로 붙여졌을 수 있고, 한자를 쓰는 실록의 특성상 이를 판문으로 표기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또한 다른 실록과 달리 선조실록은 임진왜란으로 사초를 분실해 훗날 호종한 신료들의 구술과 관련 자료를 근거로 편찬했기 때문에 이 같은 내용이 누락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가설일 뿐,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 보다 189년 앞선 태종실록과 107년 전 편찬된 생육신 남효온의 문집 「송경록(松京錄)」에 이곳의 지명을 이미 판문(널문)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태종실록 1403년 3월 16일 기사는 임금의 가마가 송림현 판적촌(板積村)에 머물자 의정부가 잔치를 준비했지만, 초례(醮禮, 혼인예식)를 위해 재계(齋戒,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 중이어서 아랫사람들에게 음식을 주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이곳은 훗날 행정구역 개편 때 개경부 송림현에서 장단군 송남현으로 편입되었는데, 송남은 송림의 남쪽이라는 의미였다. 1750년대 초 제작된 군현지도집인 「해동지도」등 몇몇 문헌에 여기를 판적이라 한 것으로 보아 사천강에 널빤지를 쌓아 만든 판적교(板積橋)에서 따온 지명으로 판문평과 함께 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2년이 지난 1415년 태종은 이곳에 또 들러 대소신료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개성 유후와 경기도관찰사가 모두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실록으로만 보면 판문을 가장 많이 방문한 임금은 태종이다.
이곳을 판문으로 표기한 또 하나의 기록이 「송경록」이다. 이 문집은 추강 남효은이 성종 16년인 1485년 왕실 종친들과 개성을 유람하면서 남긴 것인데, 9월 7일 기록에 개성부 판문리가 나온다. 이날 비파 명수인 이정은이 말 한필과 어린 종을 보내와 따라 나섰는데, 당도해 보니 판문이었다. 이들은 늦은 밤까지 술과 음악을 즐긴 뒤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이로 보아 이곳은 오래전부터 판문이라는 지명으로 널리 쓰였고, 정전협정 때처럼 작은 촌락이 아니라, 의주가도(宜州街道)에 자리 잡은 제법 큰 고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엔군 경비대대와 북한군 경무대가 경비를 맞고 있는 공동경비구역(JSA) 일명 판문점에는 한때, 지금의 유엔군 경비병력 6백여 명 보다 5배 이상 많은 3천5백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기도 했었다. 짧은 재위기간이었지만, 군사 분야에 많은 치적을 남긴 문종이 1451년 1월 5일 의정부와 육조의 여러 대신을 불러 변방 수비대책을 논의했다. 각 도별 주둔지와 병력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도진무(都鎭撫, 당상관급 지휘관) 김윤수가 경기도 군사는 개성부에 두자고 건의했다. 이 제안을 수용한 임금은 즉석에서 김윤수를 경기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각 도 파견 무관직)로 임명했다. 임무에 착수한 김윤수는 13일 만인 1월 18일 마병(馬兵)과 보병 3천4백36명을 징집해 개성부 판문평(平, 넓은 들이라는 뜻으로 지명 뒤에 붙여 씀)에서 주둔을 시작했다.
임진왜란 1백여 년 후인 1697년 당대의 문장가이던 옥오재 송상기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시 한수를 남겼다.
이 시는 송상기의 시집 「옥오재집」에 실렸는데, 개성부 서북쪽에 위치한 천마산이 앞에 보이는 것으로 보아 한양을 떠나 청나라로 가는 길인 것 같다. 잠을 깬 물가는 사천강이었고, 다리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었으니 판문교가 평지 보다는 다소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임진왜란 100년 전에도, 후에도 이곳은 판문이었다. 이로 보아 선조를 위해 놓았다던 널빤지 다리가 지명의 유래가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세조도 판문을 지났다. 즉위 6년을 지나면서 왕권을 공고히 한 세조가 대규모 순행단을 꾸려 황해도와 평안도 순시에 나섰다. 명목은 순행이었지만, 임금의 권위와 공직기강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출발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1460년 10월 5일 일행이 파주에 머물 때 어실(御室)이 궁금한 남녀 2, 3명이 안쪽을 흘끔거리다 들켰다. 세조는 의금부에 명을 내려 이들 남녀와 파주목사 남윤 등 관리 여럿을 국문하게 했다. 개성부 유수 겸 병마절제사 권지와 강화진 첨절제사 정자원이 임진강까지 마중을 나왔으나, 작심하고 나선 세조의 관료 길들이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다음 날 대가(大駕, 임금이 탄 수레)가 판문평에 이르렀는데, 비가 오히려 거세지고 번개와 천둥, 바람까지 더해 졌다. 악천후로 길을 제대로 안내하지 못해 대가가 진흙구덩이에 빠졌다. 세조는 기다렸다는 듯 의금부를 시켜 유수 권지와 관리들을 국문하게 했다.
이 순행단은 영변까지 둘러 볼 계획이었으나, 행궁을 시작한지 14일 만인 10월 19일 순안을 끝으로 방향을 돌렸다. 세조는 가는 곳마다 지방수령과 관리들을 국문하거나 장을 치는 등 시종 공포분위기였다. 마지막 순행지인 순안도 예외는 아니어서 현령 권정과 실수로 집기를 깨트린 내관 등 여럿이 국문을 당했다.
개국 초기 장단부에 편입된 판문평을 개성부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이 수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 정조실록 1784년 12월 17일 세 번째 기사는 송남현을 되돌려 달라는 개성부 유수 정창손의 상소이다. 확실한 문적(文蹟)은 없지만, 마을이름과 전해져 오는 전설을 종합해 보면, 옛 송도에서 떼어 준 것이 확실하다. 역대 유수들도 여러 차례 상소했으나, 그 때마다 조정에 사정이 있어 차일피일하다가 지금에 이르렀다. 1720년 선왕(경종)의 송도 행차 때 지역 선비와 백성들이 한목소리로 호소하자, 개성부 유수에게 사리를 따져 조치할 것을 주상께서 직접 명했다고 전해 들었다. 개성 백성들이 이처럼 송남면(판문평)을 요구하는 것은 원래 개성 땅이던 것을 장단부에 떼어주다 보니 개성의 영문(營門, 병영의 문)이 장단부 경계에서 1백여 보(步)에 불과해 개 짖는 소리까지 들린다. 또한 개성은 사방이 80십여 리이지만, 장단은 3백여 리에 이르고 있어, 한 개 면을 떼어주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창손은 이밖에도 세 가지 이유를 더 들어 개성부 편입을 요구했다.
임금이 정창손의 상소를 적극 검토하라 지시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전협정 이후 판문평은 두 개의 주소를 갖게 되었다. 북한은 개성특별시 판문군 판문리, 우리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이다. 주소만 놓고 본다면, 2백여 년이 지나서야 정창손의 상소가 절반만 이루어진 셈이다. 역사는 돌고, 또 돈다. 긴 여정이 되겠지만, 넘고 풀며 헤쳐가다 보면 그 옛날 우리가 하나였으니, 다시 하나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