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북한군이 소련고문단과 함께 작성한 작전계획에 따라 남침함으로써 북한군 대 한국군의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북한의 '선제타격작전계획'은 전투명령서, 부대이동계획, 병참보급계획, 기만계획 등을 포함한 공격계획이었고, 3일내에 서울 부근의 한국군 주력부대를 포위 섬멸한 후 그 전과를 확대하여 남해안까지 진출한다는 3단계로 수립되었다.
최초 북한은 기습작전에서 큰 성과를 달성하였다. 병력과 화력이 우세한 북한군은 기만전술의 차원에서 제기된 평화공세에 힘입어 한국군을 기습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공격을 받은 한국군 전방 사단들은 사단장들이 불과 며칠 전 단행된 인사이동으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거나 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습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웠다. 한국군은 소련이 북한군에 공급해준 T-34탱크를 멈추게 할 무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전투기도 보유하고 있지 못하였다.
한국군은 취약한 전력으로 인해 기습의 충격력을 흡수하지 못하였고 결국 3일 만에 서울을 상실하였다. 한국군은 도강수단도 없이 경황 중에 한강을 건너 방어선을 형성하고 가능한 빠른 시기에 반격한다는 막연한 목표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기습에 성공하고서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하고 있었다. 개전직후 평양과 모스크바 사이에 오고간 전문내용에 의하면 그러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즉, 북한군이 황급하게 소련에게 추가적인 탄약과 보급을 요청한 것, 한국군 전력이나 방어태세를 지나치게 경시한 나머지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점, 그리고 작전 협조를 위한 지휘체계가 미흡했다는 점 등이 확인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보조 공격부대가 춘천 지역에서 작전 차질을 빚음으로써 서울을 점령한 주력부대와 협조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데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남로당의 대규모 봉기를 기대한 점, 그리고 한강 도강을 위한 장비가 부족했던 점, 서울 점령 이후 자축 분위기에 젖어 있었던 점 등도 부분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전쟁 초기 한국 정부가 당면했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민심의 동요를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전에 비상계획이나 철수계획을 수립한 적도 없었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데 분주하였다. 정부 지도자와 관료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서울 시민을 포함한 피난민들은 피난 보따리를 ‘매다 풀다’를 반복하면서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점령초기 미처 피난하지 못한 많은 우익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인민재판을 받아 희생되었고 또 한때 좌익에 가담하였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전쟁이 가져올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살인․방화․약탈 등은 확대보복과 무차별적인 연쇄반응을 가져왔으며, 민족간의 이념전쟁이 얼마나 참혹할 수 있는가를 극렬하게 보여주었다.
한편 전쟁발발 직후 미국 정부는 주한외국인을 철수시키고 즉각 한반도 사태를 안전보장이사회에 제기하는 한편 해․공군을 운용하도록 지시하였으며, 유엔 안보리는 6월 26일 공산군에게 무력도발의 정지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6월 28일에는 한국에 대한 원조의 제공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각각 채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