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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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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배경

광복과 국토의 분단

(사진)조국의 광복에 환호하는 국민들(1945) CET0041749(5-1)

조국의 광복에 환호하는 국민들(1945), CET00417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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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에게 암담하기만 하였던 주권 회복에 대한 꿈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전후처리를 위한 카이로선언(1943.12.1), 그리고 이를 재확인한 포츠담선언(1945.7.26) 등으로 그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을 맺게 되자, 한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새 역사의 꿈은 마침내 실현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종전과 함께 표면화하기 시작한 미·소간의 견해 차이는 한국문제에 예기치 않은 암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즉 1945년 추축국이 무너지자 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힘의 공백상태가 조성되고, 독일과 일본의 통치로부터 독립된 국가들은 미·소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지역으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와 같은 불행의 요인은 얄타회담(1945.2.11)에서부터 일찍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945년 8월 9일, 대일선전을 포고한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를 향하여 밀어닥치기 시작하였으며, 그 다음날인 8월 10일, 일본은 연합국측의 무조건 항복 권유를 수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미국은 한반도에 38도선을 설정하여 그 이북지역은 소련군이, 그 이남지역은 미군이 진주하여 각각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당시의 이러한 조치는 전후처리를 위한 순수한 군사적인 조치였으며, 한반도를 정치적으로 분단하기 위한 의도는 전혀 내포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측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 만주와 한반도를 겨냥한 소련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8월 13일 청진에, 22일 평양에 각각 도달하였으며 8월 말에는 이미 북한 전역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이미 38도선을 정치적인 구획선으로 인식하고 정치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