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도시, 서울
올림픽공원
오늘날의 올림픽공원 역시 그 역사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시는 미래의 국제 대회에 대비해 메인스타디움을 포함하는 '국립종합경기장' 건설 후보지를 수차례 검토하였다. 당시 서울의 유일한 종합운동장이던 서울운동장과 효창운동장의 기능을 확대 흡수한다는 구상 아래, 1961년 성동구 중곡동(현 광진구 중곡동), 1964년 한강 건너 잠실리 용마공원을 후보지로 검토했다가, 1970년 아시안게임에 대비한다는 목적으로 세 번째로 지정된 곳이 현재 올림픽공원이 자리한 방이동 일대(당시 모이동)였다. 다만 당시 언론이 전하듯 "예산의 뒷받침이 어려워 구체적인 건립 계획은 없는" 상태의 지정이었다. 1968년 건설부고시 제212호로 후보지가 결정되고 1979년 도시계획시설로 확정되었지만, 잠실종합운동장 건설이 먼저 추진된 데다 부지 안에 기존 건물들과 문화재인 몽촌토성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1981년까지도 구체적인 계획은 수립되지 못했다.
1966년 국립종합경기장 후보지
국립종합경기장 후보지 표시도
전환점은 1981년 올림픽 유치 확정 이후 찾아왔다. 유치 직후 조직위원회의 시설 구상안은 종목별 경기장 대부분을 잠실종합운동장에 배치하고 있었지만, 이미 경기장이 과밀하게 들어선 잠실에 시설을 추가하기는 어려웠다. 올림픽 시설 배치의 전면 재검토가 불가피해진 것이다. 1982년 6월 28일 국무총리실을 중심으로 확정된 "올림픽 및 아시아 경기대회 주요 시설 배치 조정 방안"은 국립경기장 부지에 사이클경기장과 체조경기장을 필수로 신설하고 2개의 실내체육관과 선수·기자촌 아파트를 건설하며, 잠실의 체육학교를 이전시켜 대단위 체육공원으로서 세계적인 명소가 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두 달 뒤 체육부가 수립한 "86아시아, 88올림픽 대회 총합계획"은 시설 건립의 원칙을 '알맞게'라는 말로 요약했다. 과욕을 부린 나머지 대회 후 후유증을 겪은 해외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기존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고 신축은 억제하되 새로 짓는 시설은 민족의 기념비적 유산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관중 동원력이 큰 경기장이 이미 잠실에 있었기에, 면적상 잠실종합운동장보다 훨씬 큰 올림픽공원의 개발 방향은 단순한 체육시설 단지가 아니라 경기장과 체육학교, 공원, 몽촌토성과 야외공연장을 아우르는 복합 체육문화단지로 설정되었다.
사업의 추진 체계는 1983년 2월 총리지시 제8호를 통해 정리되었다. 부지 매입과 계획 수립, 경기장 건설의 주체는 서울시로 일원화되었고 경기장 건설 재원은 조직위원회가 부담하기로 하였다. 매립지에 조성되어 토지수용이 필요 없던 잠실종합운동장과 달리, 국립경기장 부지에는 사유지 930필지와 무허가 건물 663채를 포함한 918채의 건물이 산재해 있어 토지 확보부터가 큰 과제였다. 서울시는 인접한 가락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과 연계하여 체비지로 부지를 확보하고, 선수·기자촌 부지 등은 보상을 통해 수용하였다.
계획안 마련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1983년 실시된 국립경기장 단지계획 현상 공모에는 13개 작품이 접수되었으나 심사 결과 당선작 없이 가작 3점과 입선작 3점만 선정되었다. 이에 서울시는 공모작들의 구상을 제3자적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분석·발전시키기 위해 전문 학술기관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부설 환경계획연구소와 용역 계약을 체결했고, 그 결과물이 1984년 4월 완성된 "국립경기장 기본계획 및 설계"였다.
서울특별시, 국립경기장단지계획 경쟁 현상공모 요강
국립경기장단지계획 현상공모 작품 심사결과 발표
이 계획은 올림픽공원(1984년 12월 '올림픽공원'으로 공식 명칭 변경)의 성격을 '체육과 역사'를 주제로 '모든 시민에게 개방되는' 공원으로 규정하고, 올림픽 기간의 최대 방문객이 아니라 대회 이후의 일상적 이용 인구를 기준으로 시설 규모를 정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백제의 토성과 최신 경기장을 한자리에 공존시킨 발상이다. 경기장들은 몽촌토성을 위압하지 않도록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에 토성보다 낮은 높이로 설계되었다. 전통과 쇄신, 자연과 인공이 마주 보게 한 이 구도야말로 올림픽공원의 정체성이 되었다. 완성된 계획의 짜임새는 간명했다. 한가운데에는 전체 면적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몽촌토성이 보존과 학습의 공간으로 남고, 그 둘레를 다섯 개의 경기장이 감싸며, 도시와 만나는 네 모퉁이는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갖는다. 잠실 쪽 입구는 올림픽을 기념하는 '공원의 얼굴'인 선린기념공원으로, 남쪽은 대회 후 시민들이 쓸 참여형 체육공원으로, 동쪽은 잠실에서 이전해 온 체육학교들이 공원과 시가지 사이의 완충이 되도록 한 것이다.
국립경기장 기본계획 및 설계 보고
국립경기장 기본계획 및 설계(서울특별시, 1984)
1984년 8월 27일 8개 공구로 나뉘어 시작된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어 약 2년 만인 1986년 4월 말 사이클·역도·펜싱·체조 4개 경기장이 준공되었다. 수영경기장은 당초 계획이 국제 규격에 맞지 않아 변경을 거쳐 1988년 5월에 완공되었고, 경희대 수원분교에 지어질 예정이던 테니스경기장도 사업 부진으로 1985년 올림픽공원 내 건설로 변경되어 대회 전에 완공되었다. 이로써 총 6개의 경기장과 올림픽회관, 체육학교, 야외공연장, 복원된 몽촌토성과 성내천의 인공호수로 구성된 복합 체육공원이 완성되었다.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높이 24m의 상징 조형물 '평화의 문'이 대회 직전인 1988년 8월 완공되어 공원의 얼굴이 되었다. 올림픽공원 건설에는 서울시와 조직위원회의 예산을 합쳐 총 1,581억 여 원이 투입되었다.
올림픽공원과 인접한 올림픽 선수·기자촌 아파트 역시 1982년을 기점으로 속도감 있게 추진되었다. 올림픽 헌장은 대회 개최국이 선수와 임원이 함께 숙박할 선수촌을 주경기장 가까이에 설치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당초 조직위원회는 선수촌을 잠실종합운동장 인근(현 아시아 선수촌아파트 부지)에, 기자촌을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나 석촌호수 인근에 두는 방안을 구상했으나, 이미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잠실 일대는 부지가 협소했다. 결국 1982년 6월의 시설 배치조정 방안에 따라 선수촌은 아시아선수촌과 올림픽선수촌으로 나뉘어, 올림픽 선수·기자촌은 올림픽공원 부지에 건립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올림픽선수·기자촌 건설계획 보고
86아시아 경기대회준비 아시아선수촌 건설 보도자료(서울특별시)
계획 수립에서부터 여섯 가지 기본 방향이 설정되었다. 진취적인 주거 문화 유형의 제안, 친목과 화합의 상징적 표현, 불특정 다수 시민을 위한 주거환경 마련, 최상의 경기력 유지를 위한 환경 제공, 개발과 관리의 합리성, 그리고 올림픽 이후의 민간 분양을 위한 조건 만족이 그것이다. 대회 기간에는 세계 각국 선수단의 숙소로, 대회 후에는 일반 시민의 주거지로 쓰여야 하는 이원적 성격이 계획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서울시는 1984년 11월 총상금 1억 8천만 원을 내건 국제 현상 설계 공모를 실시하여 올림픽공원의 진입 광장 축을 이어받는 지점을 구심점으로 삼은 방사형 배치가 선정되었다. 부챗살처럼 펼쳐진 단지의 구심점, 즉 올림픽공원과 만나는 입구에는 가장 낮은 6층 주거동을 두고 바깥으로 갈수록 8~16층, 다시 외곽에는 24층의 고층 주거동을 배치하여 점증적으로 변화하는 다채로운 스카이라인을 만들었다. 단지 외곽은 주변 도시의 격자형 가로 패턴을 받아들이되 고층 건물들이 단지 전체의 담장 역할을 하도록 하여, 한국적 도시공간의 특성인 '내향성'을 현대적 아파트 단지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방사형의 구심점에 자리한 중심 상가는 대회 기간 중 식당, 은행, 극장, 오락실, 디스코텍까지 갖춘 선수회관으로 운영되었고, 중심 광장에는 각국 올림픽위원회의 깃발이 게양되어 축제의 중심이 되었다.
부대시설은 대회 이후의 활용을 고려하여 계획되었다. 동사무소와 파출소, 노인정 등의 복지시설과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가 단지의 내부와 외곽에 배치되었다. 기자촌의 부대시설은 대회 이후 선수촌과 기자촌이 하나의 단지가 되는 점을 고려하여 가급적 임시 가설 건물로 계획하고, 대회가 끝난 뒤 철거하여 다른 시설로 이용될 수 있도록 하였다.
총면적 약 66만 2천㎡(20만여 평)에 122개동 5,540세대(선수촌 86동 3,692세대, 기자촌 36동 1,848세대)를 짓는 대공사는 1986년 11월에야 착공되었다. 대회까지 2년이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단지를 13개 공구로 나누어 13개 컨소시엄이 동시에 시공하는 방식으로 공기를 단축했고, 착공 약 19개월 만인 1988년 5월 30일 완공에 이르렀다. 1988년 9월 3일 개촌한 올림픽 선수·기자촌은 대회 폐막까지 33일간 161개국 1만 4,691명의 선수와 임원을 품은 "하나의 잘 설계된 국제도시"로 기능하였다. 대회가 끝난 뒤 서울시가 시설 보완 공사를 거쳐 그해 12월 31일부터 분양 당첨자들의 입주가 시작되었고, 분양 가격은 국민주택 규모 평당 105만 원, 초과 규모 평당 134만 원으로 책정되었다. 부채꼴로 펼쳐진 이 단지는 오늘날까지도 올림픽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주거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