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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서울올림픽대회

CEQ0000150(1-1) 벽을넘어서(88서울올림픽하이라이트)

88올림픽서울유치결과보고

HA0001887(0001)
88올림픽서울유치결과보고

캘거리IOC총회조치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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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거리IOC총회조치계획

대한체육회는 1978년 9월 24일부터 10월 5일까지 태릉 국제사격장에서 개최된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대성공을 거둔 것에 고무되어 올림픽대회 유치에 대한 구상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1979년 2월 제25대 대한체육회장에 취임한 박종규 대한사격연맹 회장은 취임과 동시에 조상호·김세원 두 전직 대사를 부회장으로 영입하여 스포츠외교력을 강화하고, 실무연구반인 전문위원실을 설치하여 올림픽 유치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1979년 10월 8일 정상천 서울특별시장은 박종규 대한체육회장, 김택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정주영 전국경제인연합회장, 박충훈 무역협회장 등이 배석한 가운데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외 기자회견을 갖고 1988년 제24회 올림픽대회를 한국의 수도 서울에 유치할 것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가 있은 지 18일 후인 1979년 10월 26일 제4공화국의 종국을 가져온 10.26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했다. 올림픽대회 유치의 결단을 내렸던 박정희 대통령이 숨지고, 올림픽 유치운동을 주도해 온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남에 따라 올림픽 유치운동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1980년 제5공화국 출범 이후 대한체육회는 올림픽 유치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때 전두환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이 결심하여 국내외에 공표한 일을 별다른 이유 없이 변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역사적인 사업을 추진해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패배의식 속에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여 유치계획이 다시 추진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기관회의를 거쳐 1981년 5월 19일 올림픽대회 유치 대책실무위원회를 구성했다.

1981년 9월 30일 80명의 국제올림픽위원들은 제24회 올림픽의 개최신청을 한 서울과 나고야 중 한 쪽을 선택하는 역사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 외부와의 출입이 통제된 회의실에 모였고, 그로부터 1시간 45분 뒤에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장이 위원들의 투표결과 집계표를 들고 발표장에 나타났다. 한국과 일본의 모든 국민들은 생중계로 방영된 TV를 통해 사마란치 위원장의 발표장면을 직접 지켜볼 수 있었다. 결과는 서울이 52표, 나고야가 27표로 예상치 못한 서울의 압승이었다.

86아시아88올림픽대회총합계획

HA0003770(0001)
86아시아88올림픽대회총합계획

’76몬트리올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동서 양진영이 함께 모여 펼친 제24회 ’88서울올림픽대회는 사상 최대 참가국(161개국), 최대 참가선수단 인원(13,600명)을 기록하면서 16일간 23개 정식종목, 3개 시범종목, 2개 전시종목에서 과거 어느 대회보다 수준 높고 치열한 격전을 펼쳐 보여 주었다. 서울올림픽대회는 체제와 이념, 종교와 인종의 차이를 초월하여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스포츠를 통한 친목과 우의를 다지고 궁극적으로 세계평화 건설에 이바지하는 것을 대회 이념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같은 대회의 이념은 최다의 참가, 최상의 화합, 최고의 성과, 최적의 안전 및 봉사, 최대의 절약을 목표로 내세워 대회운영의 묘를 추구했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 참가한 인력자원을 넓은 범위로 보면 대회운영에 직접 참여한 운영요원 49,712명, 개폐회식 등에 출연한 대회출연자 26,143명, 안전업무에 기여한 대회 안전요원 112,009명, 그리스로부터 개회식장까지 성화 봉송에 참가한 성화주자 21,207명, 운영업체에서 대회 운영요원이나 다름없이 근무한 용역 요원 14,822명 등 총합 223,893명에 달했다. 이 같은 방대한 인력자원은 1988년 9월 서울올림픽대회가 개최된 달에 한국을 찾은 선수·임원 등 올림픽 패밀리와 일반 관객들을 합한 약240,000여명에 거의 맞먹는 숫자였다.

서울올림픽의의의와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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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의의의와성과

1988년 9월 17일 서울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장엄하고 화려한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의 막이 올랐다. 개회식은 161개국 13,600명의 선수단과 10만 관중, 50억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장엄한 용고를 앞세운 사전마당에 이어 펼쳐진 공식행사는 각국 민요를 편곡해 만든 행진곡에 맞추어 올림픽의 발생지 그리스 선수단을 선두로 하여 한글 가나다 순서로 각국 선수단이 입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국선수단은 관례에 따라 마지막으로 입장했다. 이어 박세직 조직위원장이 개회사를,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장이 환영사를, 이학래 한양대 교수 겸 국제심판이 올림픽 임원대표선서를, 허재 선수와 손미나 선수가 선수대표선서를 했다. 그리고 노태우 대통령의 개회선언에 이어 그리스 올림피아의 헤라신전에서 채화된 성화가 점화됨으로써 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88서울올림픽은 완벽한 시설, 하늘이 준 화창한 날씨와 봉사정신에 가득 찬 운영요원들의 열의가 조화를 이룬 가운데 33개의 세계신기록과 227개의 올림픽신기록을 수립했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슬로건과 같이 50억 전 세계의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감동시키며, ‘서울 코리아’의 이미지를 새롭게 해준 역사적인 이 대회에서 한국선수단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한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한 종합성적 4위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제24회서울올림픽성화인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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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서울올림픽성화인수식

서울올림픽대회는 “우리는 해냈다”는 자긍심과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민족적 자긍심을 확고히 하게 된 것이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사회와 광복 후 강대국의 간섭 하에서 형성된 민족적 열등감이라는 심리적 대외 종속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서울올림픽대회는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도 다양하고 광범했다.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분단상황, 개발도상국, 올림픽의 정치적 이용, 상업화 경영 등의 국내외적으로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서울올림픽을 대성공으로 이끌어낸 점을 평가하여 알림"으로써 한국의 발전상과 저력이 국제사회에서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게 하는데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