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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종목선수권대회 - 세계 속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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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보스톤마라톤선수경무대예방

CEN0000032(2-1) 보스톤마라톤선수경무대예방

8.15 광복 이후 우리나라가 국제스포츠무대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47년 부터였다. 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7년 4월, 미국 보스턴에서 개최된 제 51회 보스턴 세계마라톤대회에 서윤복 선수가 당당히 세계를 제패함으로써 '36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을 하고도 나라 잃은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던 민족의 한을 풀어주었다. 이어서 1950년 4월, 역시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세계마라톤대회는 신생국 대한민국의 영예를 다시 한 번 전 세계에 떨친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각각 1,2,3위를 한 것은 세계마라톤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후 이봉주의 제105회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진한 감동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역도

제24회서울올림픽역도52KG급준우승자한국의전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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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서울올림픽역도52KG급
준우승자한국의전병관

1947년 9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 한국선수단이 출전했다. 당시 재미동포 정웰타의 안내로 필라델피아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한국선수단은 박동욱 50kg급 4위, 남수일 60kg급 2위, 김성집 75kg급 3위를 차지하였다. 이후 1991년 9월 27일 독일 도나우에싱겐에서 개막된 제64회 세계역도선수권대회 55kg급에 출전한 전병관 선수가 세계랭킹 1위인 중국의 류소빈을 제치고 용상부문과 합계해서 금메달 2개를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동안 한국역도는 아시아 강국으로 군림해오면서도 유독 세계선수권대회나 올림픽대회에서는 금메달을 한 번도 차지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전병관 선수가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반세기 동안의 오랜 숙원을 풀게 되었다.

탁구

영광의개선(제32회세계탁구선수권대회여자단체전우승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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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개선(제32회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여자단체전우승귀국)

한국탁구팀이 세계무대에 처음 진출한 것은 1956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23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였다. 이 때 위성숙이 개인단식에서 준준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세계정상까지는 너무나 멀고 험했다. 1959년 3월 제25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여자단체가 2위를 차지했으나 세계제패는 그로부터 12년을 더 기다려야했다. 1973년 유고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전에서 마침내 정현숙·이애리사·박미라 팀이 강적 중국을 제압하고 한국 최초의 구기 종목 세계제패라는 기적을 이루었다. 그 후 1991년 4월 24일부터 5월 6일까지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최초의 남북한 선수들로 구성된 코리아팀이 여자단체전(현정화·이분희)에서 강적 중국을 꺾고 우승했으며, 여자단식 2위, 남자단식과 혼합복식 각각 3위를 기록했다. 이 대회는 단순한 세계선수권대회의 차원을 넘어 남·북 통일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는 의미 있는 대회였다.

레슬링

장창선레슬링선수세계제패환영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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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선레슬링선수세계제패환영대회

레슬링이 세계를 제패하기 시작한 것은 1966년 6월 미국 오하이오 주 톨레도 시에서 열린 제16회 세계아마추어레슬링선수권대회부터였다. 한국은 하경대를 단장으로 한 6명의 선수단이 이 대회에 참가했다. 당초에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으나 플라이급에서 장창선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여 레슬링계를 놀라게 했다. 장창선은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와 1964년 도쿄올림픽대회에서 은메달을 딴 선수였으나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우승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던 선수였다. 그러나 장창선은 불굴의 투지로 금메달을 따냈고 한국스포츠 발전의 선봉이 되었다. 그 후 1989년 스위스 마티니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김종신 선수가 42kg급에서 우승을 하여 장창선 선수의 뒤를 이었다.

여자농구

체코세계여자농구대회한국선수단경기중활약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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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세계여자농구대회
한국선수단경기중활약광경

1967년 4월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가 체코 프라하에서 12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예선전 1위로 통과한 한국선수단은 결승리그에 올라 아쉽게도 4승 1패의 성적으로 소련에 이어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같은 여자농구의 준우승은 1959년 서독 도르트문트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최경자·조경자·황율자로 짜여진 한국팀이 여자단체전에서 최초로 준우승에 오른데 이은 쾌거였다. 비록 여자농구팀이 소련의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당시 동유럽의 아성이었던 세계여자농구의 판도를 크게 뒤바꿔놓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만한 업적이었다.

태권도

국제태권도연맹발기인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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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태권도연맹발기인대회

한국의 전통무예로서 출범한 태권도는 1950년대부터 해외로 진출한 한국인 사범들에 의해 전 세계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태권도의 본격적인 발전은 이와 같은 해외지도자들의 활동과 더불어 1971년 1월 대한태권도협회 제7대 회장으로 취임한 김운용의 야심찬 포부에서 비롯되었다. 김운용은 회장 취임사에서 공약한대로 1972년 11월 태권도의 중앙도장격인 국기원을 건립했고, 1973년 5월 25일에는 국기원에서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대회 마지막 날인 5월 28일에는 국기원에서 세계태권도연맹(WTF)이 창립되었으며, 총회에서 대한태권도협회장인 김운용을 만장일치로 임기 4년의 WTF 초대총재로 선임했다. 그 후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는 2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개최되었고 우리는 항상 상위권에 입상함으로써 종주국의 위상을 지켜왔다. 또한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부터는 태권도가 정식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양궁

양궁여자선수단귀국

CEN0004739(2-1) 양궁여자선수단귀국

한국의 양궁은 신화적 존재다. 1979년 7월 서베를린에서 개최된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 출전한 김진호·박영숙·안재순·황숙주 등은 여자단체 종합 1위와 여자개인 종합 1위로써 세계 정상에 올랐다. 특히 당시 고교생이었던 김진호는 이 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했고, 1983년 제33회 로스앤젤레스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도 5관왕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어 세계적인 양궁스타는 김수녕·이은경·이선희로 이어졌다. 1991년 8월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열린 제36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는 김수녕·이은경·이선희 조가 소련을 제치고 단체전에서 우승을 했으며, 동시에 정재헌·양창훈·전인수로 짜여진 남자팀에서도 영예의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세계대회 첫 남녀 동반우승이라는 쾌거를 만들어냈다. 또한 2003년 뉴욕 제42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도 한국은 남·녀 단체전과 여자개인전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다. 이로써 한국의 양궁은 1979년 이후 계속하여 세계정상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축구

한국축구단환송시가행진

CET0029079(5-1) 한국축구단환송시가행진

구기 종목 중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소개된 것은 축구였다. 현대식 축구가 언제 처음 도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1897년경 관립외국어학교의 외국인 교사들이 첫 선을 보였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국내 경기로는 1929년부터 1946년까지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며 열렸던 경·평(京·平)축구대회가 유명하다. 그 후 구기 종목 중 대표격인 축구는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오다가 드디어 1996년 5월 31일 스위스 취리히 국제축구연맹본부로부터 「2002 FIFA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라는 결정을 받아냈다. 2002월드컵은 개막식, 경기운영과 안전, 자원봉사자 참여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규모 또한 공동개최국인 일본보다 상대적으로 컸으며, 역대 FIFA월드컵 중 가장 훌륭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와 같은 성공적인 대회 운영과 한국대표팀 4강 신화창조, 길거리응원 문화 등으로 대한민국과 기업브랜드의 이미지가 크게 제고되었다.

야구

제5회아시아야구선수권제패기념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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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아시아야구선수권제패기념대회

야구는 1904년 미국인 질레트가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 회원들을 지도한데서 비롯되었다. 이 때는 아직 야구를 규칙적으로 지도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경기는 1906년 2월 11일 황성기독교청년회와 독일어학교의 두 팀이 훈련원과 마동산(馬東山)에서 가진 시합이다. 그 후 1909년 윤기현(尹冀鉉)을 비롯한 25명의 동경유학생 야구선수단이 서울·평양·개성·선천·안악·철산 등지를 순회하면서부터 우리나라 야구의 새로운 발전이 시작되었다. 한국 야구의 획기적인 사건으로는 1982년 9월 4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들 수 있다. 유럽과 미주 여러 나라들, 그리고 오세아니아의 호주와 한국·일본·대만 등 10개 팀이 참가한 이 대회 결승전에서 한국팀은 강호 일본을 제압하고 사상 최초로 세계야구 정상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대회 야구경기에서 한국 팀이 세계최강의 미국·쿠바·일본 등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영광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한국 야구사는 물론, 세계 야구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사격

제42회세계사격선수권대회.공기소총사격

CET0054710(75-1)
제42회세계사격선수권대회.공기소총사격

사격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군사적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04년 육군연성학교에서 교과목으로 선정되어 군사훈련의 정규교과과정 속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사격이 스포츠로서 일반화된 것은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 부터였다. 1974년 9월 18일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세계사격연맹총회에서 멕시코와 경합을 벌인 우리 한국은 62대40으로 제 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 개최권을 획득했다. 대회준비위원회는 태릉선수촌 근처에 국제규격의 사격장과 2,000여명의 선수가 투숙할 수 있는 워커힐 아파트 건설을 1977년 3월 30일에 시작하여 1978년 8월 30일에 완성했다. 1978년 9월 24일부터 10월 5일까지 개최된 이 대회에 주최국인 한국의 선수단 48명을 포함해 64개국에서 910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내지는 못했지만, 세계 정상급 사격대회에서 한 번도 입상하지 못한 전례를 깨며 은메달 3개, 동메달 5개로 종합순위 12위를 기록함으로써 한국 사격의 새 시대를 열어 놓았다.

제42회세계사격선수권대회개회식각국선수단입장

CET0059718(3-1) 제42회세계사격선수권대회개회식각국선수단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