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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올림픽경기 - 올림픽경기대회

올림픽참가선수단출국전기념촬영

CET0052951(2-1) 올림픽참가선수단출국전기념촬영

올림픽대회는 국제스포츠교류의 꽃이다. 올림픽대회는 단순한 국제경기대회가 아니라 국가의 명예를 걸고 출전하는 스포츠외교의 정상무대이다. 1948년 7월 29일부터 런던에서 개최된 제14회 국제올림픽대회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독립한 한국의 모습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으로 우리로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런던올림픽대회에 꼭 출전해야만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했던 런던올림픽대회는 한국체육사에 신기원을 이룬 동시에 올림픽 역사에서도 뜻 깊은 대회였다.

지금 같으면 10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런던 길을 서울-부산-하까타-요코하마-상해-홍콩-캘거타-카이로-로마-암스테르담 등 10곳을 기차와 배 그리고 비행기를 갈아타며 무려 480시간의 살인적인 여정을 밟아 찾아갔다. 출전한 선수들 대부분이 30세 이상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잘 싸워서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국위를 크게 선양했다. 특히 역도 미들급에 출전한 김성집 선수에 이어 복식 플라이급에 출전한 한수안 선수가 각각 동메달을 획득하여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시상대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당시 3천만 우리 민족에게 뜨거운 감격을 안겨주었다.

선수단파견에관한건의이송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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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단파견에관한건의이송의건

6.25 전란의 비극이 이 땅을 뒤덮고 있는 속에서도 제15회 헬싱키올림픽대회가 다가왔다. 당시 사회 일부에서는 젊은이들이 전선에서 목숨을 바치고 있는 때에 올림픽대회에 나가는 것은 국민적 입장에서 마땅치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오히려 체육을 통한 국제친선 외교를 강화하여 국제적 입지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함께 나왔다. 이런 와중에 헬싱키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는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내왔고, 1952년 1월에 브런디지 IOC 위원장이 한국의 참가를 권유하는 서한을 보내옴에 따라 마침내 국회는 만장일치로 헬싱키올림픽 파견을 가결했다.

1952년 7월 19일부터 8월 31일까지의 헬싱키올림픽대회에 참가할 한국선수단은 총 43명으로 구성되었다. 선수단장 최순주를 비롯하여 총감독 이상백, 부감독 손기정, 총무 황대걸, 경기종목별 감독 김은배(육상), 김성집(역도), 김명곤(권투), 김옥규(레슬링) 등의 인솔 하에 육상·역도·복싱·사이클·승마 등 6개 종목에 출전했다.

올림픽후원회기부금모집상황에관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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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후원회기부금모집
상황에관한건

이때 헬싱키올림픽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와 성원은 전쟁 전에 개최되었던 런던올림픽대회에 못지않았다. 오히려 전쟁의 상처 속에서 거국적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국민들의 열기가 넘쳐흘렀다. 당시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거액인 출전경비 마련도 범국민적인 모금으로 가능했다. 정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구성된 올림픽후원회(회장 허정)는 기부금과 기념 뱃지 판매를 실시했고, 국회의원들도 세비의 10%를 내놓고, 공무원까지도 봉급에서 갹출하는 등 전 국민적 지원이 이루어졌다. 특히 전투에 참전하고 있는 국군들까지 모금에 적극 참여하여 제5사단 장병들이 480만원을 거두어 기탁했고, 참전 중인 미군병사들까지도 모금운동에 나섰으며, 미8군 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은 7,000달러씩 두 차례나 기부금을 내놓았다.

이승만대통령제16회호주멜버른하계올림픽출전한국선수단접견기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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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대통령제16회호주멜버른
하계올림픽출전한국선수단접견기수여

이러한 국민적 성원에 힘입어 한국선수단은 대회 참가국 69개국 가운데 37위를 마크했다. 국민들은 마라톤에 큰 기대를 걸었으나 제54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3위에 입상했던 최윤칠 선수가 4위에 그쳐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최윤칠의 4위 성적은 올림픽신기록이었다. 역도에서는 첫날 56kg급의 김해남이 처녀 출전하여 4위에 입상함으로써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둘째 날에는 67.5kg급에 김성집과 김창희가 출전하여 김창희가 4위에 입상하고, 김성집이 이집트의 라가브 선수와 팽팽한 접전을 벌인 끝에 동메달을 차지했다. 복싱에서도 강준호가 동메달을 추가하여 동메달 2개로 종합성적 37위를 하게 되었다.

제17회올림픽참가선수단출국

CET0052969(7-1) 제17회올림픽참가선수단출국

전쟁의 상흔을 딛고 당당한 모습으로 국제스포츠무대에 우뚝 선 한국대표선수단은 1956년 멜버른올림픽대회에 태극기가 선명하게 그려진 KNA CD-4 전세기를 타고 참가했다. 멜버른올림픽의 한국선수단은 임원 14명, 선수 35명 등 49명으로 구성되었다. 대회 셋째 날에 역도 라이트급의 김창희 선수가 동메달을 따내 멜버른 하늘에 첫 태극기를 올렸으며, 복싱의 송순천 선수가 은메달을 추가했다. 마라톤의 이창훈은 ‘인간기관차’로 불리는 자토벡을 제치고 4위를 차지했고, 런던 이후 세 번째 올림픽에 도전한 김성집은 이미 30대 후반의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5위에 올라 주위를 감탄케 했다. 한국선수단은 은메달과 동메달 각각 1개씩을 획득하여 참가국 69개 가운데 아르헨티나와 함께 종합성적 29위에 올랐다.

제18회도쿄올림픽대회레슬링자유형플라이급은메달리스트장창선선수집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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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도쿄올림픽대회레슬링자유형플라이급
은메달리스트장창선선수집입구

제19회멕시코하계올림픽대회(68.10.12-10.27)권투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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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멕시코하계올림픽대회(68.10.12-10.27)권투경기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대회는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개회식을 비롯한 주요경기 모습을 인공위성을 통해 전 세계의 TV 시청자들에게 중계했다. 한국은 전규홍을 단장으로 67명의 선수단이 이 대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로마올림픽대회 한국선수단은 올림픽대회 출정 사상 전무후무한 노메달이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남겼다.

1964년 개최된 제18회 도쿄올림픽대회는 아시아지역에서는 최초로 개최되는 올림픽대회였다. 또한 북한이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할 예정이어서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대결이 예상되는 대회였다. 특히 도쿄에는 60만 교포가 민단과 조총련으로 갈려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북한선수단이 국호문제와 금메달 예정 선수였던 신금단을 비롯한 6명의 북한선수들이 가네포(GANEFO) 사건에 연루되어 출전자격을 박탈당하는 사건으로 대회참가를 거부하고 철수하는 바람에 남북대결은 없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선수단은 그 규모에 비해 초라한 경기성적을 보이고 말았다. 도쿄올림픽대회 한국선수단은 사상최대 규모인 16종목에 224명(임원 59명, 선수 165명)이 출전했다. 이처럼 대규모로 구성한 이유는 북한이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하게 됨에 따라 스포츠외교와 경기 면에서 이들과 경쟁하고 특히 재일동포들의 사기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쿄올림픽대회의 결과는 참담했다. 한국은 일본, 미국, 소련,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은 선수단을 출전시켰지만 종합 성적에서는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로 겨우 27위에 머물렀다. 은메달은 레슬링 종목에서 장창선이 자유형 플라이급에 출전하여 획득했고, 복싱에서도 정신조가 아깝게 은메달에 머물렀으며, 유도에서 재일동포인 김의태가 동메달 하나를 추가한 것 외에는 성과가 없었다.

제21회몬트리올올림픽참가선수단개선및전적보고(안)(제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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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몬트리올올림픽참가선수단
개선및전적보고(안)(제59회)

제21회몬트리올하계올림픽대회(76.07.17-08.01)공동취재반전송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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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몬트리올하계올림픽대회
(76.07.17-08.01)공동취재반전송사진

올림픽 금메달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의 교훈을 되새기며 체육진흥6개년계획을 착실히 추진하여 1968년 멕시코올림픽과 1972년 뮌헨올림픽을 거쳐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 와서야 겨우 금메달 하나를 따게 되었다. 몬트리올올림픽 이전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면, 1968년 멕시코대회에는 이병희를 단장으로 비교적 소규모인 76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멕시코대회에서도 기대했던 유망주들이 초반에 탈락하는 고배를 피할 수 없었다. 그나마 복싱의 지용주가 라이트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하고 장순길이 밴텀급에서 동메달을 건져 체면은 유지했다. 이 대회에서의 종합성적은 112개국 중 32위였다.

1972년 뮌헨올림픽대회에는 김성집을 단장으로 62명의 한국선수단이 참가했다. 이 대회에는 북한이 처음으로 참가하여 사격 소구경 복사에서 이호준 선수가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획득했고, 복싱 라이트플라이급에서 김우길이 은메달,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에서 김광형, 유도 라이트급에서 김용익, 여자배구에서 각각 동메달을 따내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한국은 여자배구 3·4위전에서 북한에 패배하여 메달획득에 실패했고, 유도 미들급에서 오승립이 은메달 하나를 따내 겨우 노메달의 수치를 면할 수 있었다. 대회 종합성적은 북한이 22위, 한국은 33위로서 올림픽대회 첫 남북대결에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대회에서 한국은 드디어 광복 이후 빛나는 첫 금메달을 일구어 냈다. 최재구 단장을 인솔자로 72명의 한국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 출전한 양정모 선수가 몽고의 오이도프를 물리치고 대망의 금메달을 따냈다.

양정모의 쾌거는 일제하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이후 40년만의 쾌거였다. 양정모 선수의 금메달에 힙 입어 한국선수단은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 등 모두 6개의 메달을 획득함으로써 금 1개, 은 1개에 그친 북한을 누르고 종합성적 19위를 차지했다.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따낸 양정모의 금메달은 단순히 금메달 하나가 아니라 한국 스포츠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또한 뮌헨올림픽 때 한발 뒤쳐졌던 남북대결에서 역전을 이루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소련의LA올림픽불참관련88올림픽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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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LA올림픽불참
관련88올림픽대책

몇 차례 위기를 맞으면서 잘 이어져 왔던 올림픽운동은 몬트리올올림픽 이후 동·서 양대 진영의 정치적 대립으로 분단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대회는 양쪽 진영이 번갈아 가며 보이콧을 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소련이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친소(親蘇) 정권을 세우자 소련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면서 다각도의 보복대응책을 마련했다. 그 일환으로 미국정부는 1980년 2월에 제22회 모스크바올림픽 불참을 공식 선언했으며 서방국가들도 속속 동조하기 시작했다. 대한올림픽위원회(KOC)도 한국정부의 뜻을 받아들여 4월 20일 미국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모스크바올림픽대회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67개 국가가 불참한 가운데 1980년 7월 19일부터 8월 3일까지 반쪽 대회로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모스크바올림픽대회 여파로 제23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대회도 반쪽 대회로 개최되었다. 이번에는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이 신변위협 등의 이유로 불참한 가운데 1984년 7월 28일부터 8월 12일까지 열렸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은 전 세계 140개국 7,800여명의 선수가 참가한 이 대회에 21개 종목 284명이란 큰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하여 금메달 6개, 은메달 7개, 동메달 7개를 따냄으로써 종합성적 10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초부터 메달획득이 예상됐던 유도·레슬링·복싱에서 금메달 5개, 양궁에서 1개의 금메달을 따낸 것은 메달박스로서의 가능성을 내다보게 했다.

LA올림픽개선선수단카퍼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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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올림픽개선선수단카퍼레이드

제24회서울올림픽개회식후공연한마당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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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서울올림픽개회식후공연한마당전경

특히 8명의 선수가 나선 유도는 금메달 2, 은메달 2, 동메달 1개로 5명의 선수가 입상함으로써 체급경기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적을 올렸다. 레슬링에서도 14명이 출전하여 금메달 2, 은메달 1, 동메달 4개 등 모두 7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또한 한국양궁 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서향순 선수는 당시 나이가 17세에 불과하여 향후 국제무대에서의 금메달 가능성을 한층 더 밝게 해주었다. 그리고 여자농구와 여자핸드볼 팀이 구기 종목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강호들을 연파하고 각각 은메달을 따낸 것도 한국체육사에 기록될 만한 쾌거였다.

동·서 양진영의 정치적 문제로 두 번씩이나 연이어 반쪽짜리 대회가 됐던 끝에 1988년 9월 17일부터 열린 ’88서울올림픽대회는 다행이 북한과 쿠바 등 몇 개국만 참가하지 않았을 뿐,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동·서 양진의 국가 절대 다수가 참가하여 모처럼 인류화합의 장으로서의 올림픽 이념을 발휘한 성공적인 대회가 되었다. 한국선수단은 161개국에서 13,600여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 전 종목에 걸쳐 올림픽 참가사상 최대 규모인 644명의 선수단을 출전시켜 금메달 12개, 은메달 16개, 동메달 11개를 따내 종합성적 세계 4위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수립했다.

1992년 7월 스페인의 항구도시에서 개최된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대회는 여러 측면에서 뜻 깊은 대회였다. 바르셀로나올림픽대회는 그 동안 정치적 갈등에 시달려 온 과거의 모습을 떨쳐 버리고 보다 순수하게 올림픽이념에 충실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편, 과거에는 참가가 거부되었던 프로선수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여 일종의 무한 경쟁시대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한국으로서는 마라톤의 황영조가 손기정 이후 56년 만에 올림픽 마라톤 우승의 신화를 재현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컸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달려 국가 잃은 설움을 당해야 했지만, 황영조는 당당히 태극기를 가슴에 새기고 몬주익 경기장에 달려 들어와 8만 관중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이 때 황영조의 우승은 그때까지 올림픽대회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한 아시아권 선수가 손기정, 황영조 외에는 없었다는 사실로 더욱 빛났다.

제25회바르셀로나올림픽종합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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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바르셀로나올림픽종합대책

바르셀로나올림픽대회는 한국선수단에게 88서울올림픽대회의 성적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대회가 되었다. 서울대회에서 금메달 12개, 은메달 16개, 동메달 11개로 소련·미국·동독에 이어 4위를 차지했으나, 이는 개최지의 이점을 안고 얻은 성과여서 그 가치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국선수단은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서울올림픽 때와 똑 같은 12개의 금메달을 획득하고 메달 순위 세계 7위를 차지하여 로스앤젤레스대회와 서울대회에 이어 3연속 세계 10위권 내에 들게 되었다.

구소련이 붕괴된 후 15개 공화국으로 분리되어 참가했기 때문에 역대 최대 규모인 197개국이 경합한 1996년 제26회 애틀란타올림픽대회는 어느 대회보다 메달경쟁이 치열했다. 한국은 이 대회에 ’88서울올림픽을 제외한 사상 최대 규모인 503명을 파견하여 금메달 7개, 은메달 15개, 동메달 5개 등 총 27개의 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세계 8위에 올라 여전히 스포츠 강국임을 입증했다.

2000년 9월 15일부터 시작된 제27회 시드니올림픽대회에서는 올림픽 참가 사상 처음으로 개회식 남북 동반입장이 이루어져 남북의 화해 분위기 조성 및 남북스포츠 교류에 획기적인 장을 열었다. 한국은 시드니올림픽대회에 398명의 대형 선수단을 파견했다. 당초 목표는 금메달 10~12개를 획득하여 10위권을 목표로 정했으나 금 8개, 은 10개, 동 10개로 12위에 그치고 말았다.

제28회 올림픽대회는 2004년 8월 13일부터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전 세계 202개국이 참가하여 역대 올림픽 중 가장 많은 참가국을 기록했다. 24개 종목에 376명으로 구성된 한국선수단은 금 9개, 은 12개, 동 9개 등 총 30개의 메달을 획득하여 종합성적 9위를 함으로써 ’84 L.A 올림픽 이후 다섯 번째로 올림픽 10위권 강국의 모습을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