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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휴전협정 67주년,
휴전을 넘어 종전과 평화 염원

7월 27일은 6.25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67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과 분단의 아픔을 남긴 채 휴전협정으로 잠시 멈춘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e-기록 속으로」 7월호는 ‘6.25전쟁 휴전협정 67주년’을 기획특집으로 준비했다.

  • 정전반대 시민 궐기대회 모습(1951)

  •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수용소 시찰(1952)

유엔군과 조·중연합군은 1951년 6월 한반도문제를 더 이상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협상에 의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종료될 무렵인 1951년 6월 3일 당시 주 소련 미국대사였던 조지 케난이 휴전을 위한 미·소 회담의 개최를 제의하였고 6월 23일 조·중연합군측이 유엔주재 소련대사 말리크를 통해 호응함으로써 정전회담 개최에 합의하게 되었다.

‘휴전협정’은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예비회담을 개최한 이후 협정체결시까지 159회의 본회담, 179회의 분과위원회 회담 등 총 765회의 회담을 치루는 등 진통 끝에 성사되었다.

양측은 최초 휴전회담에서 군사분계선 설정문제를 비롯하여 휴전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협정, 전쟁포로, 양측 관계 정부에 대한 권고사항 등 4개 의제를 토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6주 정도면 타결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였고 매 의제마다 장시간 설전을 벌였다.

그 주된 이유는 중공군측이 협상을 이용하여 손실을 보충하여 군사적 우위를 회복하려 하였고, 또 무엇보다 스탈린이 줄곧 정전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담과 작전의 양면에서 팽팽한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가운데 길고도 지루한 교착상태가 계속되었다.

양측은 별도의 협의가 없는 한 군사작전은 계속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회담 기간 중에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군사작전은 휴전회담의 추이와 밀접한 관련 하에 전개되었다. 이때부터 전투는 국지전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심리적인 주도권 쟁탈을 위한 소모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대체로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전선의 병력들은 한 눈으로는 회담장을 주시하고 또 다른 한 눈은 전방을 주시하면서 전투를 수행하는 특이한 양상을 되풀이하였다. 그야말로 휴전천막과 전장 사이를 오가는 지루한 상황이 2년 여간 지속되었다.

휴전협정 체결까지 2년여 동안 양측은 38선상에서 피의 능선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저격능선 전투, 금성 전투 등 수많은 고지쟁탈전을 수행하였다. 주요 고지를 놓고 하루에도 몇 차례나 주인이 뒤바뀌는 혈전을 전개하였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과 비용손실을 내었다.

한편 휴전회담에서 가장 큰 난제로 부각된 의제는 포로문제였다. 유엔군은 포로의 자유송환을, 공산군은 강제송환을 각각 주장함에 따라 협상은 오랫동안 교착상태에 접어들었으나, 1953년 1월에 이르러 미국의 아이젠하워 신임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확전 주장을 일축하고 공산군에 정치·군사적 압력을 가중시키면서 휴전에 임하도록 압박하였다. 1953년 3월 5일 반대했던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휴전회담은 급진전되었다.

줄곧 휴전을 반대해온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심각한 정치적 대립을 겪었고 ‘이승만 제거계획’이라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휴전협정을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경제원조 그리고 한국군 한국군 증강 등의 약속을 받아 내었다.

휴전협정문의 정식 명칭은 ‘유엔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대한민국은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중국군 철수, 북한의 무장해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등을 내세우며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6.25전쟁의 기록(중공개입, UN군 철수, 반공포로석방, 휴전협정)

  •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Mark Wayne Clark)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金日成),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彭德懷)가 서명함으로써 협정이 체결되었다.

    휴전협정문은 영문·한글·중문으로 작성되었는데, 서언과 전문 제5조 제63항, 부록 제11조 제26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 휴전협정(1953)-유엔측 윌리엄 해리슨

  • 휴전협정(1953)-조중대표 남일

  • 휴전조인

  • ‘휴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37개월간의 치열했던 한국전쟁은 일시적으로 정지되어 휴전상태에 들어가고, 남북한 사이에는 현재와 같이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 설치되었다. 또한 ‘휴전협정’실시를 감독하기 위해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가 판문점에 설치되고, 스위스·스웨덴·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로 구성된 중립국감시위원단도 구성되었다. 이후 남북한은 67년간 이 협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국제관례상 ‘휴전협정’이 이토록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나라는 한반도가 유일하다.

    2018년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에서는 65년 만에 북미의 두 정상이 회담을 가지고 악수를 나눴다. 이후 비핵화 문제, UN제재 문제 등으로 협상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휴전협정 이후 67년이 지났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의 열매가 열릴 그 날을 기대해 본다.
  • 휴전 방송 관련 환호병사(1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