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길고 춥던 그 시절 겨울 풍경 “연탄재 쌓인 골목길”
이제는 사라져버린 풍경이지만, 골목길 한켠에 쌓인 연탄재는 시인의 젊은 시절, 어느 동네서나 볼 수 있는 낯익은 겨울풍경이었다. 지금도 일부 가정에서 사용하기는 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연탄은 서민들의 겨울나기 필수품이었다.
이에 『e-기록속으로』12월호는 「연탄재 쌓인 골목길」을 기획특집으로 준비하여 연탄의 역사를 살펴본다.
우리나라에서 석탄이 채굴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한제국기에 프랑스 기업이 평양지역의 무연탄을 채굴하면서부터이다. 평양 무연탄은 질이 매우 좋아 일본도 눈독을 들였는데, 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생산과 이용처를 철저히 통제하며 수탈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 정부는 연료문제에 대한 대책을 고민하다가 1953년 채굴된 무연탄을 생활연료로 활용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연탄이 가정용 난방연료로 시중에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1955년 생산된 ‘19공탄’이 주를 이루었고 지역에 따라 구멍의 숫자가 다른 연탄이 나오기도 했다. 1989년에 와서야 산업표준에 의하여 1~5호까지의 연탄규격이 정해졌는데, 흔히 사용되던 가정용 연탄이 지름 15.8cm, 높이 15.2cm의 2호 연탄이다. 1957년 만들어진 31공탄과 49공탄 등의 대형 연탄은 영업용으로 널리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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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제조 감독관 회의(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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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 연탄공장(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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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공장 작업광경(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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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공장 작업 광경(1963)
연탄의 편리함은 난방의 용도뿐만이 아니었다. 연탄의 도입은 누구에게 보다도 여성들에게 더욱 반가운 일이었다. 부엌 아궁이 앞에서 끼니마다 장작불을 지펴 음식을 해야 했던 그녀들에게 장작불보다 관리하기 편하고 일정한 열량을 유지할 수 있는 연탄불은 여러모로 유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부족한 연탄 공급량이었다. 겨울마다 연탄공장에서는 철야작업까지 했지만, 연탄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탄파동은 해마다 되풀이 되어, 결국 웃돈을 주거나 미리 사재기를 하는 집들이 많았다.
제1차 석유파동을 겪은 후인 1974년에는 겨울철 연탄 부족사태가 예상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때 아닌 한여름에 너도나도 연탄을 사재기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1960년대 들어 연탄 사용이 증가하면서 연탄가스 중독사고도 급증하여 한해 겨울에 수백 명이 희생되었다. 이렇다 보니 정부에서도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사고를 줄이기 위해 강습회를 열거나 관련 영화를 상영하는 등 집중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연탄가스 사고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1970~1980년대에는 오히려 더 증가하였다. 연탄가스 사고가 사라진 것은 1990년대 가스나 기름보일러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부터였다.
안도현 시인의 시구처럼 서민들의 안방을 뜨끈뜨끈하게 덥혀 주던 연탄, 골목길마다 수북이 쌓여있던 연탄재, 그리고 가스중독으로 일가족이 참사를 당했다는 안타까운 신문기사는 1990년대 초까지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겨울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