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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발발

한국전선에서 협의하고 있는 팽덕회(좌)와 김일성, 전쟁기념관

한국전선에서 협의하고 있는 팽덕회(좌)와 김일성, 전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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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북한, 소련, 중국 북방 공산 3국이 사전에 긴밀히 협의하고 합의한 후 일으킨 전쟁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전쟁 지원을 약속하면서 사전에 반드시 중국의 모택동과 협의하도록 했다.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모택동은 만약 미국이 6·25전쟁에 개입하여 북한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중공군을 보내 돕겠다고 약속했다. 북한은 1950년 2월초부터 소련에서 직접 파견된 소련군사고문단과 함께 3단계로 된 ‘선제타격계획’을 치밀하게 수립했다.

제1단계에서는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국군 주력을 섬멸한 후 3일 이내에 서울을 점령한다.

그리고 서울·수원·원주·삼척까지 진출한다. 제2단계에서는 제1단계의 전투 성과를 확대하여 군산·대구·포항까지 진출한다. 제3단계에서는 남해안으로 진출하여 부산·여수·목포로 전개하여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는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이 작전 계획에 따라 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40분 38선상에서 대규모 대포공격을 시작으로 기습남침을 감행했다. 그러나 북한의 작전계획은 국군의 완강한 저항과 유엔군의 신속한 개입으로 인하여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북한이 1950년 봄 남침을 개시할 것이라는 것을 가상하여 방어계획이 수립되었다. 1950년 3월 25일 방어계획은 ‘작전명령 38’로 확정되었고 각 사단에 하달되었다. 이 작전계획에 기초하여 각 사단은 자체 방어계획을 수립했다. 작전계획에 따르면 38선 획정시 육로가 없었던 옹진반도의 육군 부대는 북한의 남침시 즉시 인천으로 철수하도록 했다. 개성 지역의 국군 부대는 적의 남진을 지연시키면서 임진강 남안으로 철수하여 방어하도록 했다. 38선상에서 적을 격퇴시키지 못할 경우 작전계획은 순차적으로 한강방어선, 대전방어선, 낙동강방어선을 방어하도록 했다. 그러나 육군본부의 방어계획에 기초하여 각 사단은 자체 작전계획을 수립한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맞게 되었다. 그 결과 사단 자체의 기동훈련은 물론이고 사단들 사이의 합동훈련도 실시해 보지 못한 채 북한의 기습 남침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은 유엔과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모든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