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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고개'를 넘어 증산의꿈을 이루다!'

식량증산 활동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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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시영(李始榮) 부통령 권농일행사 모내기참여(1950), CET0043598(12-1)

    이시영(李始榮) 부통령 권농일행사
    모내기참여(1950),
    CET004359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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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라남도담양군 WFP(세계식량계획) 치수사업공사3(1968), CET0068081(3-1)

    전라남도담양군 WFP
    (세계식량계획)
    치수사업공사3 (1968),
    CET00680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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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콤바인으로 벼베기3(1979), CET0041737(12-1)

    콤바인으로 벼베기3
    (1979),
    CET0041737(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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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협 국무총리 식량증산유공자 표창(1983), CET0070698(1-1)

    김상협 국무총리
    식량증산유공자 표창
    (1983),
    CET007069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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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민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은 예로부터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이자 최우선적인 국정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대대로 살고 있는 한반도는 겨울이 춥고 여름은 고온다습한 몬순기후대에 속해있는데, 이러한 농업환경에 적합한 작물로서 쌀은 수천년간 우리의 주곡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비좁은 국토 면적에 비해 많은 인구가 모여 살다 보니 식량사정이 풍족했던 시기는 거의 없었고 늘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부족한 식량을 자급하기 위한 증산은 우리 민족의 오랜 염원이었으며, 특히 주곡인 쌀의 자급은 농정의 최우선 순위가 될 정도로 그 비중이 지대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시기별로 식량증산 사업과 배경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한 일제는 1910년 토지조사사업을 필두로 자기들의 기호에 맞는 쌀 생산과 일본시장으로의 수출 확대를 목표로 1918년부터 3차에 걸친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였다. 조선 최대의 산업정책이라고 하던 산미증식계획은 초기부터 실적이 부진하였으나 일제는 자국의 식량공급, 군량미 조달 등을 위하여 미곡공출제를 강제로 시행하였다. 8.15 광복 전까지 일본으로 반출된 미곡은 최소 200만석에서 최대 1,100만석까지로 우리나라 전체 쌀 생산량의 41%까지 반출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만성적인 식량난에 허덕이던 우리나라는 만주산 잡곡에 의존하였고 그나마 절대량이 부족하여 콩깻묵이나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한 마디로 일제의 증산정책은 자기들의 부족한 식량을 한반도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책략이었다. 다만 이러한 식량수탈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수리시설 증설, 근대적인 농업관련조직의 발전, 신품종개발 보급 등에 따라 농업생산성이 증대되는 등의 부수적 효과도 일부 있었다.

일제 말기 전시경제체제하에서 피폐해진 농업은 광복 이후의 혼란과 6.25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생산력을 회복하지 못하였고, 국민은 만성적인 식량부족으로 고통을 겪었다. 추수 직후에는 쌀값이 폭락하다가 이듬해의 단경기가 되면 폭등하는 현상이 해마다 되풀이되었으며 쌀값폭등이 당시 인플레이션의 주요인이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정부는 민생문제해결의 관건은 농업증산에 있다고 보고 쌀과 맥류 증산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증산 3개년계획(1949~1951년)을 수립하였으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목표달성을 하지 못하고 끝났다. 1953년부터 2차에 걸쳐 추진된 농업증산 5개년 계획(1차 1953~1957년, 2차 1958~1962년)에서는 비료증시, 종자개량, 경종법 개선을 통한 식량증산에 목표를 두었으며 간척사업도 추진하였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 1955년에는 쌀 2,054만석을 생산하여 처음으로 쌀 2,000만석 시대를 열었으며, 맥류의 생산량도 대체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미국 잉여농산물의 도입과 풍흉의 심한 기복 등으로 곡물가격이 불안정하여 농가경제의 침체는 계속되었으며, 특히 농업증산계획의 중점을 물가안정에 두고 농민들의 희생 위에 시행함으로써 그만큼 증산 효과도 극대화하지 못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도 식량사정은 개선되지 않아 보릿고개가 연례적으로 반복되어 국민들이 배고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식랑자급은 여전히 시급한 현안 문제였다. 그 동안의 증산계획은 농업생산기반의 열악, 투자 재원부족, 비료․농약․농기계 등 영농자재산업의 후진성으로 말미암아 계획만큼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 농업부문의 주요 목표를 농업증산과 생산과정의 근대화에 두고 구체적으로는 식량자급을 위한 양곡 증산과 공업용 및 수출용 농산물의 증산을 목표로 하였다. 식량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제3차 농업증산5개년계획(1962~1966년)과 이를 수정한 식량증산 7개년계획(1965~1971년)이 수립되었으며, 주요 시책으로서 농지확대를 위한 개간․간척사업과 생산기반정비를 위한 경지정리․관배수 사업, 농업생산성 증대를 위한 연구․지도․보급 사업 등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증산노력에도 불구하고 계획기간 동안 양곡의 생산 증가율은 오히려 3.5% 감소하였다. 양곡 생산실적이 계획보다 저조하였던 것은 한발 등 기상조건의 영향도 있지만 식부면적의 감소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1970년대 들어 정부는 농정의 최우선 과제를 식량 증산에 두고, 그중에서도 주곡인 쌀의 자급에 집중하였다. 주곡자급이 국정 주요과제가 되면서 범정부 차원에서 식랑증산을 추진하였고, 중앙과 지방의 전 행정력을 동원하여 치밀한 증산계획과 집행으로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 농업용수의 개발, 경지정리와 배수개선, 농지의 보전과 확대 등 농업생산기반조성에 주력하는 한편, 농업기계화 사업, 다수확 벼품종의 개발 보급, 농산물가격 지지정책 등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에 개발된 다수확 신품종인 통일벼의 수확성이 당시 다른 품종 보다 30% 이상 높게 나타나자 정부는 통일벼 보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정부의 강력한 추진력에 의해 실시된 통일품종 재배는 보급 과정에서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치기도 하였으나 계속 재배면적을 확대하였다. 그 결과 1974년에는 쌀 3,000만석 시대를 열었고, 1977년에는 4,000만 석을 돌파하여 주곡의 자급을 달성하였다. 특히 1974년부터는 광복 후 30년 가까이 지속됐던 외국산 쌀의 도입을 중단함으로써 쌀 자급이라는 민족의 숙원을 이루었다. 1970년대 들어 기상재해에도 불구하고 식량증산의 목표 달성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동안 통일품종 특성에 알맞은 재배기술을 개발․실천할 수 있었고, 정부의 강한 의지로 주도면밀한 증산정책을 추진된 것에 힘입은 바 컸다.

식량의 자급이 가능해짐에 따라 증산 위주의 농정에 대한 비판론이 일어나면서 양곡관리 특별회계의 적자해소와 인플레 유발 등을 이유로 이중곡가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8년부터 주곡자급의 주역인 통일벼의 도열병 발생과 자연재해 등으로 쌀 자급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특히 1980년 사상 초유의 냉해피해로 쌀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외국쌀을 대량 수입해야만 했다. 1978~1980년 연속 3년간 흉작이 계속되자 정부는 통일형 품종을 중심으로 한 식량증산정책을 재검토하고 재배안전성이 높으면서 양질성, 다수성인 품종의 개발을 서둘렀다.

1981년 이후 통일벼를 개량한 신품종이 속속 개발되어 보급됨으로써 매년 풍작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나 통일벼 재배면적은 계속 감소하였다. 이렇듯 1980년 초의 식량위기를 겪으면서 국가 차원에서 증산계획이 재추진되고 쌀 자급이 다시 가능해졌다.

1980년대는 계속된 풍작으로 쌀 재고가 적정량을 크게 초과할 정도로 자급기반을 갖추었으나 1990년대에는 쌀 시장 개방화로 쌀 재배면적의 감소, 농지 전용 완화, 잦은 재해 등으로 식량문제가 다시 불거졌고, 이에 정부는 1996년 쌀 산업발전 종합대책을 발표 시행하였다. 그 결과 2001년에는 쌀 생산량이 5,515,000톤에 달하면서 자급수준에 도달하였고 이후에도 안정적인 쌀 수급이 가능해 졌다

  • 곡가폭등에 관한 건, 국무총리비서실(1951), BA0135103(14-1)

    곡가폭등에 관한 건,
    국무총리비서실(1951),
    BA013510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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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미곡년도 식량수급계획안(1950), BG0002263(9-6)

    1951미곡년도
    식량수급계획안(1950),
    BG000226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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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량증산대책(안)(1963), BA0138584(16-1)

    식량증산대책(안)(1963),
    BA0138584(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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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벼 우량품종 육성시험결과보고(1969),EA0005404(1)

    벼 우량품종
    육성시험결과보고(1969),
    EA0005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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