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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고개'를 넘어 증산의꿈을 이루다!'

1980년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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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 식량의 안정적 공급이 가능하게 되자 증산위주의 농정에 대한 비판론이 등장하였다. 이에 농어민 소득증대 사업과 농산물 가격의 안정, 유통 근대화, 그리고 농어촌 생활환경 개선 등 농정목표를 다양화하였다.

이중곡가제로 인하여 양곡관리 특별회계의 적자가 누적되고, 이로 인하여 재정적자와 인플레를 유발하므로 이중곡가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이중곡가제는 생산자 보호라기보다는 소비자 보호의 측면이 강했다. 수매가는 생산비를 보장하지 못하는 수준인데, 방출가는 원가 이하로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양정을 둘러싼 논쟁은 나아가 국내 시장을 개방하고 비교우위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양곡 수매가격을 억제하고 축산물 등 부족한 농산물을 수입하여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개방농정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78년에 신품종 노풍벼의 냉해피해가 크게 발생한데다 통일벼의 소비가 줄고 그에 따라 통일벼 식부면적이 감소하면서 쌀 생산량이 급감하여 다시 쌀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으로 바뀌었다. 더욱이 1980년에는 벼의 생장기간 동안 저온, 일조부족 현상이 계속되는 사상 초유의 냉해피해로 쌀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였다. 1980년의 쌀 생산량은 355만톤으로 1979년 대비 71%에 불과하였으며 10a당 수량도 339kg로 1971년 이후 최저 수확량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외국에서 쌀을 다시 대량으로 수입해야만 했고 농림어업 성장률도 -22%를 기록할 만큼 농업생산이 크게 위축되었다.

1978~1980년 연속 3년간의 흉작은 통일형 품종을 중심으로 한 식량증산정책의 재검토와 함께 재배안전성도 높으면서 양질성, 다수성인 품종의 개발을 서두르게 하였다. 이는 산업화에 따른 국민소득의 증가로 다소 가격이 비싸더라도 밥맛 좋은 쌀을 선호하는 국민정서에도 부합하는 일이었다.

이후 화학비료의 공급과 냉해에 강한 다수확 품종개량 등으로 쌀 생산량이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안전수확기술보급에 역점을 두고 시한영농을 강력히 추진하여 연속 풍작을 이루었다. 그리고 국민들의 양질미 선호추세에 따라 통일벼 재배면적은 감소한 반면 미질이 좋은 품종 위주로 쌀 생산량이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계속된 풍작으로 쌀 재고가 적정물량인 600만석을 초과하여 1991년 1,487만석에 달하는 등 식량이 남아돌게 되자 쌀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견이 개진되었다. 식량증산위주로 편제되어 있던 일선 행정․지도조직도 단기간에 타 작목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게다가 농림부를 비롯 농촌진흥청의 직제도 개정하여 미산과, 전작과 등을 폐지하고 관련국도 대폭 축소하였다. 농민들은 벼농사 중심에서 소득작물 위주로 작목을 전환하고 그나마 벼를 재배하는 경우에도 과거의 철저한 관리의식을 포기한 채 일손부족 등을 이유로 관리를 소홀히 하였다.

1988년 풍작 이후 1989년 쌀 재고가 1,000만 석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정부는 품질이 낮아 소비자가 외면하는 통일벼의 재배를 억제하기로 하고 1989년부터 일반벼와 통일벼의 수매가를 차등적용하고 이후 추곡가 인상률에도 차이를 둬 차등 폭을 크게 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재배면적을 줄여나갔다. 1992년부터는 통일벼 수매를 중단하여 사실상 통일품종의 재배를 포기, 1970년대 이후 식량자급의 주역이었던 통일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쌀 수매가격도 1988년 16%, 1989년 14%를 인상한 이래 매년 인상률을 낮추어 1993년에는 흉작에도 불구 5% 인상에 그쳤으며 1994~1995년에는 연속 동결하였다. 이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의 진전과 타결, 더 나아가 WTO체제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이중곡가제가 사실상 폐지되고 쌀 소득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타 작물로의 전환과 타 용도 전용이 크게 늘어 쌀 생산량 급감에 따른 식량위기를 유발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통일벼의 수매중단, 대체소득 작목으로의 급격한 전환과 농지전용 등의 완화, 증산 행정의 포기 및 잦은 재해로 쌀 재고는 순식간에 적정재고랑에 훨씬 미달되는 200만석까지 감소하여 다시 외미를 도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관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1995년 실수확량 조사결과 1996년도의 쌀 재고가 278만 석 이하로 낮아질 것으로 판단되자, 정부는 대책반을 긴급히 구성하여 1995년 12월 쌀 생산종합대책을 수립하고 이와 함께 1996년말 농지보전기능을 다시 강화하는 내용으로 농지법시행령을 개정하였다.

종합적인 대책의 추진결과 전체 벼 재배면적 중 양질다수품종 재배면적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이처럼 기존품종이 급격히 양질다수품종으로 대체되면서 평균 단당 생산량은 1992~1995년 평균 479kg에서 1996년 489kg, 1997년 499kg으로 크게 높아졌다. 신품종육성 보급만으로도 수량성이 20kg이나 향상되는 효과를 보면서 1997년 이후 풍작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쌀 생산량도 1995년 3,260만 석에서 1996년 3,696만 석, 1997년 3,784만 석, 1998년 3,540만 석으로 연간 수요량을 크게 초과함으로써, 1996년 말 170만석에 불과했던 쌀 재고량은 1997년말 339만석, 1998년말 737만석으로 크게 늘었다.

  • 농사시험연구사업 중장기계획(안) (1985), BA0241338(5-1)

    농사시험연구사업
    중장기계획(안)
    (1985), BA024133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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