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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사진)UN군 참전기념(터키), 1951 DH20000106

UN군 참전기념(터키), 1951 DH200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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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UN군 참전기념(터키),  1951, DH20000107

UN군 참전기념(터키), 1951, DH2000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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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영국을 제외하고 육군을 여단급 규모로 파견한 국가는 터키와 캐나다였다. 터키는 한때 중립을 표방하기도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말 연합군 측에 합류하면서 친 서방정책으로 선회했으며, 북한의 남침 직후 한국에 대한 유엔의 군사원조 결의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단시일 내에 4천5백 명 규모의 파병을 결정함으로써 유엔 회원국들의 환영을 받았다.

터키군은 육군 위주의 부대를 파견하면서 보병 외에 공병·수송·의무·병기·병과 부대를 포괄하는 전투단을 구성함으로써 독립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편성을 유지했다. 터키군은 1950년 중공군의 11월 공세(2차 전역) 당시 미 제2사단의 우익부대로 군우리 전투를 치르면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특히 장병들은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착검한 채 적진으로 돌격해 부대의 강한 군기를 보여 주었다.

터키여단은 군우리의 손실을 보충하고 미군의 울프하운드 작전, 선더볼트 작전 중 수리산 전투와 김량장 전투에서 자신들의 사상자에 비해 적에게 10배의 사상자를 내게 하는 전과를 올려 유엔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당시 터키군이 미군과의 연합작전에서 가장 큰 애로를 느꼈던 것은 언어소통 문제였다. 특히 상황이 급변하는 전장에서 충분치 못한 통역은 생소한 지형에서 한국군과 북한군을 구별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 터키군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