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를 자본도입 형태에 따라 구분하면, 1950년대는 '원조경제의 시기', 1960년대 이후에는 '차관경제의 시기'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1960년대 이후 경제원조가 감소하고 차관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역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한 198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경제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경제성장에 필요한 투자재원을 국내저축을 통해 조달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원조를 받던 나라(원조 수혜국)'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원조 공여국)'로 한국경제의 지위가 상승하였다.
원조가 한국경제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시기는 해방 이후 1950년대였다. 이 시기 동안 한국경제가 받은 원조액은 29억 75백만 달러였는데, 이 시기 최고의 수출액이 40백만 달러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당시 경제규모에 비해 막대한 원조가 도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1950년대에 왜 이렇게 막대한 원조를 받았을까?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남북분단으로 경제활동이 급격히 위축된 것을 들 수 있다.
북한에는 지하자원과 중화학공업이 발달한 반면, 남한에는 농업과 경공업이 발달하여 두 지역 사이에는 경제적 보완성이 매우 높았는데, 남북분단으로 이런
효과가 거의 발휘되지 못했다. 게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여 그나마 남아있던 산업시설이 심각히 파괴되어 생산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재건은 정부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였으나 이에 필요한 재원을 한국 스스로 조달할 수 없어 외국의 경제원조에 의존하였던 것이다.(1)
이론적으로 원조에는 장기 저리의 유상차관도 포함되나 1950년대에 제공된 원조는 모두 무상 증여의 원조였다. 어떤 나라가 우리에게 이런 원조를 제공했을까?
미군정 기에는 통치 당국인 미군정(미국)이 구호 원조의 성격을 갖는 원조를 제공하였다. 원조는 종전(終戰)이 임박한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두 경로를 통해 원조가 제공되었다. 하나는 유엔을 통해 원조가 제공되었다. 이를 위해 유엔은 1951년 7월에 유엔 한국재건단(UNKRA)을 설치했고 한국 내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다른 하나는 미국 정부가 직접 원조를 제공하였다. 미국 정부는 유엔군 형식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것처럼 한국경제의 재건도 유엔을 통해 추진하고자
했으나 유엔 회원국의 참여 부진으로 유엔과 다른 원조기구를 설치하여 원조를 직접 제공하였다. 1950년대 원조액에서 미국 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은 75%였다.
물론 유엔을 통한 원조에서도 미국의 출연금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에 이 시기 원조의 대부분은 미국이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원조 형태는 한국 경제에 매우 중요했다. 가령 식량 증산을 위해 비료를 도입하는 것과 비료의 국내 생산을 위해 비료공장 건설에 필요한 생산재를 도입하는 것은 향후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에서 엄청난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한국정부와 미국정부는 이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을 복구·확충하기 위해 생산재 중심의 물자 도입을 요구한 반면, 미국 정부는 국민들의 현재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소비재나 그 생산에 소요되는 원료 등을 도입하고자 주장하였다. 결국 원조 물자는 원조 공여국인 미국정부의 의사가 많이 반영되어 소비재 및 그 원료가 72% 정도를 차지하여 식료품공업, 섬유공업 등과 같이 소비재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비중은 낮지만 원조는 전쟁으로 파괴된 철도, 전력시설 등과 같은 사회간접자본의 복구 및 확충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원조는 재건과정에서 국내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거나 국내 수요는 있지만 국내 생산이 미미하여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판유리, 시멘트, 비료 공장과 같이 중요한 기간산업의 건설에도 기여하였다.
195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의 원조정책은 변화하여 무상 증여의 원조는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1957년 3억 83백만 달러로 최고 수준을 보인 이후 원조는 계속 감소하여 1965년에는 1억 31백만 달러, 1973년에는 2백만 달러로 줄어들어 사실상 완전 폐지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공업화에 성공한 한국경제는 경제규모를 빠르게 확대시켰고 1986년 최초의 무역수지 흑자 달성을 계기로 대외 경제협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1986년 12월 ‘대외경제협력기금법(법률 제3863호)’을 제정하여 1987년부터 공식적으로 개발도상국의 산업개발과 경제협력을 위한 장기 저리의 유상차관을 제공하였고, 1991년에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설립하여 무상 원조를 본격 제공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