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는 1910년 9월 30일 농상공부(農商工部) 식산국(殖産局) 아래 임정기관(林政機關)으로서 산림과(山林課)를 두고 삼림에 관한 사무를 담당토록 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 조림 자본을 보다 쉽게 유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1911년 삼림법을 폐지하고 <삼림령(森林令)>을 새로 제정하였다. 이후 1919년 6월 9일 영림창(營林廠) 관할 구역 외 중요 삼림지역 10개소에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하 산림과 출장소가 설치됨으로서 조선총독부는 전국적인 산림 경영 체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국유림 자원 수탈의 체제를 갖추게 된다. 임야 조사사업을 통해 국유림과 민유림의 소유권이 확립되자 조선총독부는 본격적인 한반도 임정을 추진하고자 1926년 ‘조선임정계획(朝鮮林政計劃)’을 수립함과 동시에 분산되어 있던 산림 행정을 일원화하기 위해 1926년 6월 <조선총독부영림서관제(朝鮮總督府營林署官制)>를 공포하였다. 영림창 및 산림과 출장소를 폐지하고 산림부(山林部) 아래에 36개소의 영림서(營林署)를 설치하고 국유림 보호 사무는 영림서 아래에 142개소의 삼림보호구를 설치하여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후, 영림서는 1929년 영림서 개편에 따라 그 수가 19개로 축소되고, 이후 몇 차례의 개편을 통해 10여 곳으로 축소 통합되어 운영되었다. 한편 1937년에는 경성·강릉·강계영림서 관내에서 관영 제재 사업이 시작되었으며, 1941년부터는 군사적 요구에 따라 국유림 개발과 군수용 조달과는 점점 밀접한 결합을 보이게 된다.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총독부 영림서의 도면은 모두 64매이나 몇몇 영림서의 도면만이 남아 있어 그 전모를 알기는 어렵다. 영림서에 관한 도면은 모두 10개 시설에 대한 것으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명칭 | 연도 | 지역 | 도면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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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영림서 (1940) | 1926-1932, 1937-1945 | 경성부 | 15 |
복계영림서 (1926) | 1926-1929 | 강원도 | 3 |
신의주영림서 (1937) | 1926-1945 | 평안북도 | 17 |
초산영림서 (1928) | 1926-1929 | 평안북도 | 4 |
춘천영림서 (1929) | 1926-1932, 1935-1945 | 강원도 | 3 |
하갈우영림서 (1926) | 1926-1929 | 함경남도 | 1 |
함흥영림서 (1927) | 1926-1945 | 함경남도 | 4 |
후창영림서 (1931) | 1926-1945 | 평안북도 | 5 |
무산영림서 성진목재판매소 | 1934 | 함경북도 | 7 |
신의주영림서 평양목재판매소 | 1934 | 평안북도 | 5 |
※ 설치년도는 ‘『朝鮮總督府官報』’ 및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1910~1941’을 참고로 조사하였다. 다만, 직원록이 1941년까지 확인 가능하므로, 그 이후는 유지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
일제강점기 동안 운영되었던 영림서는 모두 37개소로 시기에 따라 11~36곳에 설치되어 운영되었으며 그 내용은 아래의 표와 같다. 주로 산림자원이 풍부한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지역에 설치되었으며, 충청도 이남 지역에는 경상북도의 봉화영림서, 전라남도의 제주도영림서, 충청북도 충주영림서 이렇게 세 곳 만이 초기에 운영되다, 봉화영림서와 충주영림서는 1929년에, 제주도영림서는 1932년에 폐지되었다.
명칭 | 소재지 | 운영기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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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
경성영림서* | 경기도 | 경성부 | |||||||||||||||||||||
강릉영림서 | 강원도 | 강릉군 강릉면 | |||||||||||||||||||||
울진영림서 | 울진군 울진면 | ||||||||||||||||||||||
춘천영림서* | 춘천군 춘천면 | ||||||||||||||||||||||
복계영림서* | 평강군 복계리 | ||||||||||||||||||||||
양양영림서 | 양양군 양양면 | ||||||||||||||||||||||
인제영림서 | 인제군 인제면 | ||||||||||||||||||||||
통천영림서 | 통천군 통천면 | ||||||||||||||||||||||
평창영림서 | 평창군 평창면 | ||||||||||||||||||||||
봉화영림서 | 경상북도 | 봉화군 춘양면 | |||||||||||||||||||||
제주도영림서 | 전라남도 | 제주도 제주면 | |||||||||||||||||||||
충주영림서 | 충청북도 | 충주군 충주면 | |||||||||||||||||||||
영원영림서 | 평안남도 | 영원군 영원면 | |||||||||||||||||||||
강계영림서 | 평안북도 | 강계군 강계면 | |||||||||||||||||||||
신의주영림서* | 신의주부 | ||||||||||||||||||||||
위원영림서 | 위원군 밀산면 | ||||||||||||||||||||||
중강진 | 자성군 여정면 | ||||||||||||||||||||||
후창영림서* | 후창군 후창면 | ||||||||||||||||||||||
대유동 | 창성군 동창면 | ||||||||||||||||||||||
영흥영림서 | 위원군 홍인면 | ||||||||||||||||||||||
초산영림서* | 초산군 초산면 | ||||||||||||||||||||||
희천영림서 | 희천군 희천면 | ||||||||||||||||||||||
신갈파진 | 함경남도 | 삼수군 강진면 | |||||||||||||||||||||
함흥영림서* | 함흥군 함흥읍 | ||||||||||||||||||||||
혜산진영림서 | 갑산군 오존면 | ||||||||||||||||||||||
북청영림서 | 북청군 북청면 | ||||||||||||||||||||||
원산영림서 | 원산부 | ||||||||||||||||||||||
단천영림서 | 단천군 파도면 | ||||||||||||||||||||||
풍산영림서 | 풍산군 이인면 | ||||||||||||||||||||||
하갈우영림서* | 장진군 장진면 | ||||||||||||||||||||||
무산영림서 | 함경북도 | 무산군 | |||||||||||||||||||||
회령영림서 | 회령군 회령면 | ||||||||||||||||||||||
명천영림서 | 명천군 하운면 | ||||||||||||||||||||||
부령영림서 | 부령군 하무산면 | ||||||||||||||||||||||
곡산영림서 | 곡산군 곡산면 | ||||||||||||||||||||||
경성(鏡城)영림서 | 경성군 오존면 | ||||||||||||||||||||||
성진영림서 | 성진군 |
※ * : 국가기록원에 관련 도면이 남아있는 영림서 ※ 설치년도는 ‘『朝鮮總督府官報』’ 및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1910~1941’을 참고로 조사하였다. 다만, 직원록이 1941년까지 확인 가능하므로, 그 이후는 유지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조선총독부 영림서 중 국가기록원 소장 도면에서 확인되는 시설은 경성, 복계, 신의주, 초산, 춘천, 하갈우, 함흥, 후창영림서 등 8곳과 무산영림서 성진목재판매소, 신의주영림서 평양목재판매소 등 2곳의 목재판매소이다.
이들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영림서 계획을 확인할 수 있는 시설은 복계영림서와 하갈우영림서이다.( [도판1], [도판2] 참조) 남아 있는 두 곳의 도면 모두 1926년 영림서가 신설되면서 작성된 것이다. 하갈우영림서의 경우 배치도만 남아있으나 사무소의 평면 형태가 복계영림서의 사무소와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아, 신설 초기 대량의 사무소 공급에 공통도면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림서 청사는 비교적 소규모 시설로, 다른 지방 공공기관 청사 평면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전면에 사무실을 두고 뒤에 부속건물을 두어 복도로 연결하는 형식이다. 청사에는 전면으로 일부 돌출된 현관과 민원 업무를 처리하는 창구가 개설된 대기실이 작게 구성되었고, 그 외 사무실은 벽으로 구획을 나누지 않고 단일 공간으로 계획되었다. 부속건물은 부속건물에는 화장실과 세면대가 배치되었다. 양식목조 단층 건물로 일본식 목구조로 지붕을 구성하였으며 독일식 비늘판벽으로 외부를 마감하였다.
그 2년 후인 1928년에 제작된 초산영림서의 계획도 부속건물의 규모가 커지고 연결 복도를 실내화한 점을 빼고는 평면계획 뿐 아니라 도면의 구성까지 거의 유사하다.( [도판3] 참조)
이와는 달리 1927년에 계획된 함흥영림서와 춘천(1929년 계획), 후창(1931년 계획)영림서 청사의 계획은 부속건물이 확장되고 숙직시설이 계획되는 변화를 보여준다.( [도판4], [도판5], [도판6] 참조) 함흥영림서의 경우 사무실 부분의 계획은 초산영림서와 동일하지만, 부속건물에 탕비소(湯沸所)와 온돌이 설치된 숙직실(宿直室)이 추가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춘천영림서 역시 부지 형태로 인하여 부속건물이 오른쪽에 배치된 점이 다를 뿐 청사와 부속건물(화장실+숙직실)로 계획되어 함흥 영림서와 동일한 구성을 하고 있다.
후창영림서의 경우에는 전체적인 청사의 평면 계획은 비슷하지만, 앞의 두 영림서에 비해 규모가 크게 계획되어 있다. 규모가 커지면서 사무실 영역에는 서장실(署長室)과 응접실(應接室)이, 부속건물에는 소사실(小使室)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건물의 구조는 양식 목조의 단층 건물로 동일하다.
이에 비해 신의주와 경성(京城)에 설치된 영림서는 상당히 큰 규모로 계획되었다. 개청 후 10여 년이 지난 후에 작성된 계획만 남아 있어 초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으나, 상당량의 목재거래가 이루어졌던 지역이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개청 초기 시설의 규모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도판7]은 1937년에 작성된 신의주영림서의 배치도이다.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부지에 서쪽에 면하여 청사를 배치하였다. 부지의 서쪽에는 저수지가, 남쪽으로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으며, 도로의 서쪽에는 먼저 설치된 목재보관창고(木材格納上家)가 배치되었다. 청사의 자세한 평면 계획은 [도판8]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청사 1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무실이 건물 양쪽에 구성되었다. 왼쪽에 위치한 사무실 전면에는 민원을 처리하는 창구와 민원인 출입구가 설치된 대기실(公衆溜)이 길게 계획되었다. 사무실의 오른쪽으로는 응접실(應接室)과 서무문서실(庶務文書室)이 배치되었는데, 서무문서실에는 현관 및 홀(廣間)과 연결된 창구가 설치되었다. 홀의 뒤로는 2층과 연결된 계단실이 있으며, 계단실을 통해 뒤쪽의 숙직실과 화장실로 연결되었다. 청사의 다른 부분과 달리 숙직실과 소사실에 돌출창이 설치된 점이 특징적인데, 이는 온돌과 함께 실의 난방을 위한 계획으로 보인다. 2층에는 서장실(署長室), 응접실, 식당, 인사실(人事室), 회의실이 배치되었다. 청사는 전체적으로는 철근콘크리트 혼용 벽돌조의 2층 건물로 평지붕으로 계획되었으며, ( [도판9] 참조) 왼쪽 사무실의 경우 폭이 넓은 공간의 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실 중간에 철근콘크리트 기둥을 사용하였다.( [도판10] 참조) 건물의 외관은 특별한 장식 없이 같은 형태의 창문을 반복 사용하여 단순하게 계획되었다.
[도판11]은 1940년에 작성된 경성영림서의 배치도이다. 경사지에 위치한 동서로 긴 장방형의 부지가 동쪽과 남쪽에 도로와 면하고 있고, 부지의 동남쪽으로 출입구가 계획되었다. 도면에 기존 건물과의 관계가 표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부지를 이전하여 신축한 것으로 보인다. 청사는 부지의 동쪽으로 치우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도판12]는 청사의 평면 계획도로, 중앙에 주출입 현관과 계단실이 있고 그 좌우에 실을 배치하는 동서로 긴 형태로 계획되었다. 전면으로 조금 돌출된 중앙 현관은 홀을 지나 뒤쪽의 계단실과 연결되어 있다. 현관 오른쪽으로는 창구가 개설된 서무계(庶務係)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 왼쪽으로는 보호계(保護係) 및 보호구계(保護区係) 사무실이 계획되었다. 계단실 뒤로는 후면의 부속건물(附屬家)로 연결되었다. 2층에는 중앙에 서장실(署長室)을 두었고 그 오른쪽으로는 업무계(業務係) 사무실이 있고, 왼쪽으로는 회의실과 또 다른 업무계 사무실이 배치되었다. 청사의 벽체와 바닥 모두 경골목구조로 계획되었으며, 지붕은 트러스를 사용하여 경사지붕을 구성하였다.( [도판13], [도판14] 참조) 본 시설은 신의주영림서보다 4년이나 늦게 계획되었음에도 철근콘크리트나 벽돌조를 사용하지 않고 경골목구조로 계획되었는데, 이는 전시 상황에서 긴축재정이 실시되던 시기적인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외벽은 모르타르로 마감하였으며, 전면의 중앙현관을 약 0.9m(3척) 돌출시키고, 지붕 트러스의 하현재를 돌출시켜 처마를 형성한 것 외에 특별한 외부의 장식은 없다. ( [도판15] 참조) [도판16]은 청사 후면에 복도(渡廊下)로 연결된 부속건물의 계획도이다. 부속건물은 숙직(宿直)시설로 탕비장(湯沸場), 욕실, 화장실(便所), 소사실(小使室), 숙직실로 구성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단층 목조 건물로 일식 목구조로 경사지붕을 구성하였다. 난방은 촌강식(村岡式) 아궁이를 둔 온돌을 이용하였다. ( [도판17] 참조)
한편 영림서의 산하기관인 목재판매소(木材販賣所)는 직접 목재를 판매하던 곳으로 앞서 살펴본 영림서에 비하여 시설 부지가 크게 계획되고 천(川)에 인접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넓은 부지는 다량의 목재 보관을 위한 것으로 판단되며, 인접한 천의 경우 그 규모가 어떠한지는 도면상에서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목재 이동의 주요 수단이었던 수상 운송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도판18]은 1934년에 작성된 무산영림서 성진목재판매소의 배치도이다. 부지 주변의 도로들이 모두 신설 도로로 계획된 것으로 보아 목재판매소를 설치하기 위해 상당한 대규모의 부지 조성계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쪽도로는 천(川)과 인접하고 있다. 본 도판은 신축청사의 위치를 변경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건물 크기에 비해 넓게 조성된 대지가 주목된다. 청사 북쪽의 넓은 부지는 모두 목재보관 예정부지(貯木場豫定敷地)로 확보되었는데, 이를 통해 상당한 수량의 목재 거래를 위한 시설임을 예상할 수 있다. 청사는 남북으로 긴 장방형 부지의 남쪽 모퉁이에 배치되었다. 청사는 사무실 건물과 부속건물이 복도로 연결된 형태로 초기 영림서의 일반적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 자세한 계획은 [도판19]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앞에 위치한 사무실은 전면 중앙에 현관을 두었고 별도의 구획을 하지 않은 사무실의 오른쪽에 소장실(所長室)을 두었다. 복도로 연결된 숙직기능의 부속건물에는 숙직실, 소사실, 탕비실, 욕실, 화장실이 계획되었다. 양식 목조 단층 건물로 트러스를 사용하여 경사지붕을 구성하였으며, 사무실 현관에는 부분적으로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구조를 보강하였다. 건물의 외부는 모르타르(モルタル)로 단순하게 마감하였으나, 창문을 돌출시키고 하부에는 석재를 사용하여 장식하는 등의 변화를 주었다. 지붕은 석면 슬레이트(石綿スレート)로 마감하였다.
[도판20]은 신의주영림서 평양목재판매소의 배치도이다. 부지는 주변이 모두 밭(田)과 천(川)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도로가 별도로 표시되지 않은 것을 볼 때 대지로 구획되지 않은 전답지역에 부지를 새로 마련하여 시설을 신축하려는 계획으로 보인다. 평양목재판매소는 국가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다른 영림서 청사와 달리 사무실영역과 숙직영역이 일체화 되어 있으며, 숙직영역이 사무실영역보다 더 넓게 계획된 것이 특징이다. ( [도판21] 참조) 좌우로 길게 계획된 청사의 왼쪽에 사무실이 배치되고 오른쪽에 숙직영역이 구성되었다. 사무실의 출입은 사무실 왼쪽의 현관으로 하도록 하였으며, 숙직영역은 남쪽으로 별도의 출입구를 두었다. 현관의 북쪽으로 화장실, 사무실과 연결되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욕실과 취사장(炊事場), 2개의 온돌방과 1개의 다다미방으로 계획되었다. 방은 사무실과 달리 창을 돌출시켜 2중창으로 계획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난방을 위한 배려로 보인다. 양식 목조 단층 건물로 일식 구조로 된 지붕틀로 경사지붕을 구성하였다.
[참고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