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동염전(德洞鹽田)은 1920년 평안남도 용강군에 설치된 천일염전이다. 햇빛·바람을 이용하여 소금을 생산하는 천일염전(天日鹽田)은 화력을 이용하는 재래식의 전오염전(煎熬鹽田)과 비교하면 근대적인 제염 방식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본인에 의해 1907년 인천 주안(朱安)에 시험적으로 설치되었다. 천일염 제조법이 한반도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된 이후, 일본 전오제염 생산량 감축에 따른 일본 내 소금 수급 문제의 해결, 청국으로부터 소금의 수입 방지, 독점개발을 통한 재정수입의 확보를 위해 서해안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천일염전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소금과 염전에 대한 업무는 조선총독부 전매국(專賣局)에서 총괄하였다. 광복 이전까지 개발되었던 염전은 약 7,000ha로서, 주로 북한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당시 황해도의 연백염전(延白鹽田), 평안남도의 귀성염전(貴城鹽田), 평안북도의 청천염전(淸川鹽田) 등은 모두 그 면적이 1,000ha를 훨씬 넘는 대규모의 염전이었다.
현재 국가기록원에는 평안남도의 덕동염전과 관련된 도면 14매가 소장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명칭 | 연도 | 도면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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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동염전 | 1920-1945 | 14 |
1919년 계획 당시 덕동염전의 전체적인 배치는 [도판1]과 [도판2]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덕동염전은 각각 화도리(火島里)·수일리(水日里)에 위치한 2개의 부지에 계획되었다. 염전은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염부들을 위한 주거공간과 부속시설이 전체 부지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외에 창고와 염전을 관리하는 청사가 주요한 시설이었다. 화도리 부지의 배치를 살펴보면, 부지를 관통하는 예정도로의 북쪽으로 창고, 청사, 부속가 및 갑(甲)호 숙사 2동이 연이어 계획되었다. 수일리 부지에는 을(乙)호 숙사 7동과 임시사무소(仮事務所) 및 공동목욕탕(公同浴場)이 계획되었다.
단일건물로서 가장 규모가 큰 시설인 염고(鹽庫)는 소금을 소비지로 운송하기 전, 혹은 비축염으로 보관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 [도판3] 참조) 건물은 길이 120척(약 36m), 폭 30척(약 9m) 규모의 장방형 무주 공간으로 계획되었으며, 이를 위해 지붕가구로 왕대공 트러스가 사용되었다. 건물의 외벽은 목조 기둥과 기둥 사이를 목재 판재로 마감하는 방식으로 구축되었으며, 비·바람과 소금의 압력에 견딜 수 있게 사면의 벽체가 안쪽으로 쏠리도록 계획되었다. 염고의 이러한 구조 방식은 천일염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덕동염전 청사의 내부는 전면의 업무공간과 후면의 보조생활공간으로 구성되었다. ( [도판4] 참조) 업무공간에는 바닥에 마루를 깐 사무실과 응접실이 설치되었다. 사무실에서 복도로 연결되는 보조공간에는 온돌을 설치한 숙직실과 소사실(小使室) 및 탕비소(湯沸所) 등이 계획되었다. 이러한 공간의 분리는 청사의 입면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전체 건물은 양식목조로 계획되었는데, 전면의 사무동은 외벽 전체가 모르타르로 마감된 반면, 후면 부속가의 외벽 하부 절반은 세로 비늘판벽으로 마무리되었다.
[참고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