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의 편찬은 국가행사로 관례화되어 실록을 작성하고 편찬하며 관리하는 사관(史官)의 선발부터 편찬된 실록의 보관까지 모든 과정이 체계적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실록에는 왕과 관료의 인물정보, 국가의 중요 정책·사건의 시행 과정, 왕에게 올린 상소, 그밖에 의례, 천문 관측, 외교, 군사 관계 등 많은 종류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실록에 상세하고 방대한 내용이 담기게 된 것은 실록의 작성 주체인 사관의 역할이 컸습니다.
사관은 전임사관(專任史官)과 겸임사관(兼任史官)으로 나뉘었는데 예문관(藝文館)과 춘추관(春秋館) 소속의 관리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예문관은 왕의 명령을 글로 작성하는 일을 주로 맡았던 관서이고, 춘추관은 나랏일을 기록하기 위해 설치된 곳이었습니다. 춘추관은 향후 만들어진 실록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업무도 맡았는데, 편찬된 실록은 춘추관 사고와 지방의 외사고(外史庫)에 보관되었습니다.
전임사관은 예문관의 하급 관리인 봉교(奉敎, 정7품) 2명, 대교(待敎, 정8품) 2명, 검열(檢閱, 정9품) 4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을 한림(翰林) 8원이라 하였습니다. 사관의 선발은 자천제(自薦制)로 운영되었는데, 신임 사관을 뽑을 때 다른 한림들의 동의를 얻어 임용하였습니다.1) 사관이 될 후보자들은 가문에 하자가 없어야 하고, 역사서술 능력, 유교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통찰력 등 기본 소양을 갖춰야 했습니다.2)
전임사관 외에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홍문관(弘文館)·승정원(承政院)·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 등의 관리들은 춘추관의 사관 업무를 겸직하였습니다. 이들은 평소 업무 현장에서 일어난 사항을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가 춘추관에 보고하였습니다. 이 밖에 각 지방의 수령 등도 외사(外史)로 편재되어 주요 사안을 춘추관에 보고하였습니다.
사관의 주요 역할은 사초(史草) 및 시정기(時政記)의 작성, 실록의 편찬, 사고에 보관된 실록의 관리 등이었습니다. 이 중 가장 핵심인 업무는 실록 편찬의 주요 자료인 사초와 시정기의 작성이었습니다.
사초는 사관이 현장에서 매일의 시정(時政)을 기록한 것으로, 이를 입시사초(入侍史草)라 하였습니다. 사관은 경연(經筵), 왕이 평상시 거처하는 편전(便殿), 주요 국정 회의, 행사 등 왕과 관료들이 자리하는 곳에 항상 참석하여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입시사초는 춘추관에 보관되었고, 사초와 각 관청의 기록은 함께 정리·편철되어 시정기(時政記)로 남겨졌습니다.3)
사관은 시간순으로 일어난 사건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록을 보면 ‘사신은 말한다(史臣曰)’로 시작되는 부분에 주로 사건과 관련된 인물 등에 대한 사관의 평가가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사관이 퇴궐 후 집에서 내용을 정리한 가장사초(家藏史草)에 기록되었습니다. 가장사초는 입시사초와 마찬가지로 그 내용이 발설되지 않도록 관리하다가, 실록을 편찬할 시기가 되면 일정 기간 내 춘추관에 제출되었습니다.
실록은 왕의 사후에 편찬되었는데 임시기구로 실록찬수청(實錄纂修廳, 이하 실록청)을 설치하여 편찬을 맡을 총재관(總裁官)4), 당상관(堂上官), 낭청(郎廳)을 임명하였습니다. 총재관은 편찬의 총책임자로 고위 관직인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중 임명하였습니다. 당상관은 홍문관의 부제학, 성균관의 대사성 등을 임명하였고, 실제 실무를 담당하는 낭청은 하급 관리에서 뽑았는데 주로 사초를 작성하였던 사관들이었습니다.5)
실제 편찬 작업은 도청(都廳)과 삼방(三房)으로 나뉘어 이루어졌습니다. 각 방에서는 사관들이 춘추관에 보관하였던 시정기와 사관의 집에 두었다가 제출한 사초, 『승정원일기』6) 등을 참조하여 중요한 사실을 추려 1차로 원고를 작성하였습니다. 이를 초초(初草)라고 합니다. 도청에서는 초초에서 잘못된 곳을 고쳐, 2차 원고인 중초(中草)를 작성하였고, 총재관과 도청의 당상이 이를 검토하여 내용을 수정하면 최종 원고인 정초(正草)가 만들어졌습니다. 최종적으로 실록에 수록된 기사(記事)들은 향후 국정 운영 시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기준으로 선별된 것이었습니다.
원고가 완성되면 이를 활자로 인쇄하여 편찬이 마무리되었습니다. 편찬에 쓰이지 않은 초초와 중초는 물에 씻어 내용을 흘려버리는 ‘세초(洗草)’ 과정을 거쳐 내용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세초를 마치고 나면 세초연(洗草宴)을 거행하여 실록의 편찬이 마무리된 것을 축하하였습니다. 이후에는 봉안식(奉安式)을 거쳐 춘추관 사고와 각 외사고에 보관되었습니다.
연번 | 왕 | 실록 표제 | 왕 재위 기간 | 편찬 연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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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태조 | 태조실록 | 1392 ~ 1398 | 1413(태종 13년) | |
2 | 정종 | 정종대왕실록 | 1399 ~ 1400 | 1426(세종 8년) | |
3 | 태종 | 태종실록 | 1401 ~ 1418 | 1431(세종 13년) | |
4 | 세종 | 세종장헌대왕실록 | 1418 ~ 1450 | 1454(단종 2년) | |
5 | 문종 | 문종공순대왕실록 | 1450 ~ 1452 | 1455(세조 1년) | 11권 결락 |
6 | 단종 | 단종대왕실록 | 1452 ~ 1455 | 1469(예종 1년) | 부록(1권) 포함 |
7 | 세조 | 세조혜장대왕실록 | 1455 ~ 1468 | 1471(성종 2년) | |
8 | 예종 | 예종양도대왕실록 | 1468 ~ 1469 | 1472(성종 3년) | |
9 | 성종 | 성종대왕실록 | 1469 ~ 1494 | 1499(연산군 5년) | |
10 | 연산군 | 연산군일기 | 1494 ~ 1506 | 1509(중종 4년) | |
11 | 중종 | 중종대왕실록 | 1506 ~ 1544 | 1550(명종 5년) | |
12 | 인종 | 인종대왕실록 | 1545 ~ 1545 | 1550(명종 5년) | |
13 | 명종 | 명종대왕실록 | 1545 ~ 1567 | 1571(선조 4년) | |
14 | 선조 | 선조소경대왕실록 | 1567 ~ 1608 | 1616(광해군 8년) | |
선조소경대왕수정실록 | 1567 ~ 1608 | 1657(효종 8년) | |||
15 | 광해군 | 광해군일기(중초본) | 1608 ~ 1623 | 1633(인조 11년) | 태백산사고본 |
광해군일기(정초본) | 1608 ~ 1623 | 1653(효종 4년) | 정족산사고본 | ||
16 | 인조 | 인조대왕실록 | 1623 ~ 1649 | 1653(효종 4년) | |
17 | 효종 | 효종대왕실록 | 1649 ~ 1659 | 1661(현종 2년) | |
18 | 현종 | 현종대왕실록 | 1659 ~ 1674 | 1677(숙종 3년) | |
현종대왕개수실록 | 1659 ~ 1674 | 1683(숙종 9년) | |||
19 | 숙종 | 숙종대왕실록 | 1674 ~ 1720 | 1728(영조 4년) | 부록에 보궐정오 수록 |
20 | 경종 | 경종대왕실록 | 1720 ~ 1724 | 1732(영조 8년) | |
경종대왕수정실록 | 1720 ~ 1724 | 1781(정조 5년) | |||
21 | 영조 | 영종대왕실록 | 1724 ~ 1776 | 1781(정조 5년) | |
22 | 정조 | 정종대왕실록 | 1776 ~ 1800 | 1805(순조 5년) | |
23 | 순조 | 순조대왕실록 | 1800 ~ 1834 | 1838(헌종 4년) | |
24 | 헌종 | 헌종대왕실록 | 1834 ~ 1849 | 1851(철종 2년) | |
25 | 철종 | 철종대왕실록 | 1849 ~ 1863 | 1865(고종 2년) |
제1대 태조부터 제25대 철종까지 편찬된 실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실록의 표제를 보면 왕의 묘호와 시호가 붙은 실록 외에 ‘일기’로 편찬된 것이 있고, 내용이 수정·보완되어 개정된 실록도 있습니다.
태백산사고본 실록 표지
처음으로 수정된 실록은 『선조실록』이었습니다. 광해군 대에 편찬된 『선조실록』을 1623년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았던 서인(西人)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수정 의견이 나왔던 것입니다. 『현종개수실록』는 서인과 남인(南人)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남인들이 대거 축출되어 서인들이 정권을 잡은 뒤, 『현종실록』의 기록이 부정확하다는 공론이 있었던 것입니다. 『숙종실록보궐정오』와 『경종수정실록』은 소론(小論)과 노론(老論)의 정치적 입장 차이로 인해 수정되었습니다. 그중 「숙종실록보궐정오」는 별도로 편철하지 않고, 빠진 기사를 보충하고 추가하여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다는 ‘보궐정오’를 숙종실록 각 권 말미에 첨부하게 되었습니다.8)
이미 편찬된 실록을 수정한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대립하는 정책과 사건에 대한 견해차를 실록에 반영하여 남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정 이전의 실록을 없애지 않고 수정된 실록과 함께 남기도록 하여, 그 정당성에 대해서 후대의 평가를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영종대왕실록청의궤』의 표지 및 찬수범례9)
실록의 편찬과 보존 과정은 그 역시 기록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의궤(儀軌)는 조선 시대 주요 국가행사의 전체 과정을 기록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실록의 편찬은 국가의 주요 의례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실록청의궤(實錄廳儀軌)』로 남겼습니다. 실록청의궤 역시 실록처럼 의궤청(儀軌廳)을 따로 설치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실록이 춘추관 사고에 봉안된 후, 실록 제작을 주관했던 실록청의 당상과 낭청 중 일부를 의궤청으로 차출하여 의궤의 제작을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10)
실록청의궤에는 실록 편찬 과정과 관련된 문서, 편찬 시 각 부서별로 담당한 업무 등 실록 편찬의 전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실록의 제작에 쓰인 활자, 종이, 도구 등 각종 물품의 내역과 수량, 제작에 투입된 인원 등 상세한 정보를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편찬된 실록을 보관하였던 실록궤의 규격과 재료 등도 자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11) 제작을 마친 실록청의궤는 실록과 마찬가지로 사고에 1부씩 봉안되었습니다.
실록청의궤는 실록을 누가 편찬하고, 어떤 재질로 만들어, 어떻게 보존하였는지 실록과 관련된 모든 과정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습니다. 현존하는 실록들을 과학적으로 잘 보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확인해야 할 중요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종대왕실록형지안』12)
『실록형지안(實錄形止案)』은 『실록청의궤』 못지않게 실록 보존 시 참고해야 할 중요한 자료입니다. 실록의 봉안과 포쇄(暴曬)13), 고출(考出)14), 사고 건물의 보수 등으로 사관이 실록을 열람하거나 실록을 점검할 때, 그 사유와 보관되어 있던 실록의 상태를 기록한 것으로 일종의 상태조사보고서에 해당합니다.15)
실록형지안에는 누가 어느 시기에 어떤 경위로 실록을 열람했는지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편찬 이후 사관들이 정기적으로 실록을 점검하고 보존하는 데 활용하였습니다. 실록형지안의 종류는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실록청에서 간행을 마치고 춘추관 사고에 실록을 봉안할 때 작성한 형지안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방의 외사고(外史庫)에서 실록을 점검한 후 역대 모든 실록의 보관 상황을 정리하여 기록한 형지안으로 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후자에 해당합니다.16) 실록형지안은 각 사고별로 봉안되어 있던 실록의 보존 상태와 사고의 변화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실록이 어떻게 보관되어 왔는지 그 연원을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