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발생했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조선과 일본을 중심으로 명나라까지 참여하게 되면서 국제전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의 구원 요청에 응하는 형태로 대규모 병력을 전쟁에 파견했다. 하지만 조선을 돕는다는 것은 표면적 이유였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일본이 조선을 넘어 명나라까지 공격하는 상황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명나라가 타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군을 파견하면서 참전했던 것은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 전쟁에 참여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상황을 여러 방향에서 살펴보았다. 이 때문에 명나라는 요동 지역의 부총병(副總兵)1)이었던 조승훈(祖承訓)을 사령관으로 약 3,500명의 병력을 먼저 파견했다. 하지만 이들은 명나라의 중앙군이 아니라 요동 지역의 수비군이었다. 조승훈 등이 지휘하는 부대가 전투에서 패배하자 이후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기까지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결국 명나라는 1592년 12월 무장으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던 이여송(李如松)에게 43,000여 명의 대군을 주어 조선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당시 명나라의 최고 명장이었던 이여송이 이끄는 대군이 파견되면서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명나라 연합군(이하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군과 결전을 통해 전쟁을 최대한 빨리 결말지으려 했던 조선과 강화 협상을 통해 최대한 병력의 손실을 줄이려 했던 명군의 이해관계는 계속 충돌하게 되었다. 조선과 명이라는 두 국가의 군사·외교적 연합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은 전쟁의 상황을 역전시키고 평양성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명군의 큰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전쟁 기간 동안 명나라와의 사이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문제 때문에 일본군과는 다른 형태의 대립 국면을 조성하게 되었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문제는 전쟁과 일본군에 대한 태도가 일치하지 않으면서 발생했던 것이었다. 명군은 일본군과는 다른 부분에서 조선 조정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다음의 실록 기사들에는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하면서 갖게 되었던 실제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이를 통해 명나라가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면서 조선과 일본의 전쟁에 참여했던 실제 원인들을 살펴볼 수 있다.
<실록사료1> 돌아보건대 안타깝게 여겨야 할 상황은 조선에 문제가 있지 않고 우리나라의 강역에 있다는 점이며 어리석은 제가 깊이 염려하는 바는 강역에만 그치지 않고 내지(內地)까지 진동할까 하는 점입니다. 그러니 군사를 징발하는 것을 한 순간인들 늦출 수 있겠습니까. 대저 요진(遼鎭)은 경사(京師)의 팔과 같으며 조선은 요진의 울타리와 같습니다. (중략) 천진(天津)은 경사의 문정(門庭)입니다. 2백 년 동안 복건성(福建省)과 절강성(浙江省)이 항상 왜적의 화를 당하면서도 요양과 천진에까지 이르지 않았던 것은 조선이 울타리처럼 막아주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선조수정실록』 권26, 1592년(선조 25년) 9월 1일(정사), 여섯 번째 기사
위 기사는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명나라 사신 설번(薛藩)이 자신의 조정에 보고했던 내용 중 일부이다. 설번은 명나라에서 행인사행인(行人司行人)2)의 관직에 있었고, 임진왜란 초기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이었다. 위의 내용을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더 걱정해야 될 상황은 조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명나라의 영토 문제입니다. 제가 더욱 걱정하는 것은 전쟁의 영향이 명나라의 국경 지역에만 그치지 않고 국토 안쪽까지 미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명나라 군사를 빨리 징발해서 파견해야 합니다. 요동은 수도 북경의 팔과 같으며, 조선은 요동의 울타리와 같습니다. …… 천진(天津)은 수도북경의 대문과 마당에 해당합니다. 2백 년 동안 복건성(福建省)과 절강성(浙江省)이 항상 왜적의 피해를 당하면서도 요양·천진 지역에는 피해가 없었던 것은 조선이 울타리처럼 막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설번은 명나라가 건국한 이후 일본의 왜구 등이 복건성이나 절강성 지역에 많은 피해를 입혔지만 요동과 천진 지역에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던 것이 조선이 울타리 역할을 해줬기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이 일본에 패하게 되면 명나라의 국경과 내륙 전체가 위험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설번이 주장했던 내용은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만약 조선이 일본에게 패배하게 된다면 명나라의 요동이나 천진 지역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고, 새로운 전쟁의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는 걱정이었다. 조선의 구원 요청에 따라 대군을 파견한다는 명분은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전쟁에 참여했던 원인을 잘 설명해 주는 기록이라 하겠다.
<실록사료2>
무릇 천하의 일이란 이름은 절약한다 하면서도 도리어 허비가 많고 이름은 허비한다 하면서도 절약이 갑절일 수도 있다. 오늘날 구원병을 보내는 것의 늦고 빠름이 그러하다. 구원하는 것의 급속함은 싸움에 급해서가 아니라, 조선의 힘을 병합하여 지켜서 호랑이와 표범이 산속에 있는 형세를 만들자는 것이다. 다시 그들의 죄를 성토하여 꾸짖는다면 왜노(倭奴)가 반드시 마음에 가책을 받고 떠나가지 않는다 해도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못할 것이다.
군병이 일찍 출발하면 행량(行糧)은 좀 허비되겠지만, 조선을 보전하게 된다면 절약되는 바가 실로 많을 것이다. 군병이 늦게 출발하면 비록 행량은 좀 절약되겠지만 만에 하나 왜노가 우리가 방비하지 못한 틈을 타고서 장구히 몰아쳐 조선을 탈취한다면 이는 왜구에게 병기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싸다가 주는 결과가 되어 조선 땅이 또 한 번 일본에게 보태어질 것이니, 옛것을 다시 회복하려면 힘이 갑절이나 들게 되어 그 비용이 적지 않고 화 또한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옛사람은 큰일을 거행할 때, 작은 비용을 아끼지 않아서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을 해치는 예는 별로 없었다.
『선조실록』 권87, 1597(선조 30년) 4월 21일(신사), 여덟 번째 기사
위의 기사는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3) 형개(邢玠)가 조정에 올렸던 보고 중 일부이다. 원문 내용을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세상의 일은 절약한다 해도 허비할 때가 있고, 허비한다고 하지만 더 절약이 되는 경우도 있다. 명나라의 구원병을 조선에 보내는 것도 그렇다. 명나라가 구원병을 빨리 보내는 것은 조선이 힘을 다시 찾아 호랑이나 표범 같은 강력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다. 비록 군량이 사용되어 재정 지출이 있어도 명나라의 구원병이 빨리 도착한다면 일본군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두려워할 것이다. 구원병이 빨리 움직이면 비록 군량이 사용되겠지만 조선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으니 사실은 절약되는 것이 더 많다. 하지만 군량을 아끼려다 명나라의 구원병이 늦게 도착하고, 이 틈을 노려 일본군이 조선을 공격해 탈취한다면 더 큰 손해가 될 것이다. 큰일을 시행할 때에는 작은 비용을 아껴서는 안 된다.”
형개는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4)이 발발해 전쟁 상황이 다시 혼란스러워지게 되자 명나라가 조선에 추가 병력을 빨리 파견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구원병을 파견해 조선과 힘을 합쳐 일본을 제압하는 것이 명나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장기적으로는 경제적 이득까지 보장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동시에 명나라 조정 안에서도 전쟁 비용에 관한 경제적 문제를 고민하던 신료들이 많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의 참전을 결정했으면서도 이후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면서 다음 행동을 결정했다. 명군의 참전은 임진왜란 전황 회복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조선에게 지휘체계, 군량, 전쟁 기간 등에서 필요 이상의 많은 부담을 주기도 했다. 이 안에는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조선과 일본의 강화 협상을 추진하려는 명나라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특히 강화 협상 과정에서 전쟁의 주체였던 조선이 오히려 배제되는 상황이 나타나면서 조선과 명군의 관계는 순탄하게만 유지될 수는 없었다.
명량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음력 9월 16일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5) 이순신(李舜臣)이 명량(울돌목) 바다에서 13척의 전선으로 130여 척의 일본군 함대를 대파했던 해전(海戰)이다. 명량해전은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되었던 시기 중 진행되었던 전투였다.
조선 조정은 잘못된 판단으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元均)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원균이 지휘했던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6)에서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 최초이자 최대의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명량해전은 칠천량해전을 통해 궤멸 직전의 위기에 몰렸던 조선 수군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일본군의 전라도와 서해 진출을 막았던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이다.
일본군은 자신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었던 조선의 지휘관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계략을 사용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이 이순신을 모함하기 위해 펼쳤던 간첩 작전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조선의 정치적 상황까지 겹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파직하게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이 대신하게 되었다.
원균은 조선 수군을 이끌고 일본군의 본진이 있던 부산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칠천량 해전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단 한 차례의 패배였지만 조선 수군은 궤멸 직전의 상황에 내몰렸고, 국왕 선조는 수군 해체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칠천량 해전의 충격적 소식을 보고 받았던 조선 조정은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 상황을 수습하고자 했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난중일기(亂中日記)」의 기록에는 당시 이순신이 칠천량 해전 이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되어 패전 상황을 수습하는 상황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을 피해 남아 있던 전함을 인수하고, 각지로 흩어졌던 수군 병력들을 다시 결집시켰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 제해권(制海權)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군을 재건하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국왕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 수군 재건의 임무를 부여했다. 그렇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육군에 합류하도록 지시했다.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에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라는 유명한 장계(狀啓)7)를 올렸다. 그는 수군을 유지하면서 해전을 수행하려는 의지를 밝혔던 것이다.
이순신은 병력·무기·군량 등을 다시 모으고 일본군에 대한 정보 수집 활동을 강화하면서 전투를 준비했다. 특히 적은 병력으로 일본의 대군을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본진을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옮겼다. 그리고 부하 장수들에게 명량의 해로(海路)에서 일본군 함대를 저지하겠다는 작전 계획을 밝혔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이순신 함대는 13척의 전선으로만 133척에 달하는 일본 함대를 명량 해협에서 맞서 싸우게 되었다. 일본군은 대형 군선이 명량 해협을 통과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비교적 작고 기동력이 우수한 전선 133척으로 조선 수군을 공격했다.
전투 시작 초기에는 일본군 전함이 이순신의 대장선을 포위 공격하면서 위험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다른 조선 전함들은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이순신은 대장선의 병력들을 독려하며, 상당한 시간 동안 일본군의 공격을 홀로 버텼다. 이후 이순신의 질책에 다른 조선 전함이 함께 전투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이순신 함대는 31척의 일본 전함을 격파했고, 주요 장수를 사살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결국 일본군은 이순신 함대의 공격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면서 명량해전은 마무리 되었다. 다음의 실록 기사는 명량해전의 전투 상황 등을 잘 설명해준다. 명량해전에 관한 기록은 주로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실록 기사는 명량해전의 상황을 「난중일기」의 기록과 비교하면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실록사료> 삼도수군통제사(兼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치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가 거의 다 유실되었습니다. 신이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金億秋)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哨探船)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海南縣) 해로의 요구(要口)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적의 전선 1백 30여 척이 이진포(梨津浦) 앞바다로 들어오기에 신이 수사(水使) 김억추,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거제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 등과 함께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운바,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뜨리니 사살이 매우 많아 적들이 모두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으며, 머리를 벤 것도 8급이나 되었습니다. 적선 중 큰 배 한 척이 우보(羽葆)와 홍기(紅旗)를 세우고 청라장(靑羅帳)을 두르고서 여러 적선을 지휘하여 우리 전선을 에워싸는 것을 녹도만호(鹿島萬戶) 송여종(宋汝宗)·영등만호(永登萬戶) 정응두(丁應斗)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깨뜨리자 적이 크게 꺾였고 나머지 적들도 멀리 물러갔는데, (중략)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부터 남쪽의 수로(水路)에 적선이 종횡하여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현재 소방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봉(賊鋒)이 조금 좌절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선조실록』 권94, 1597년(선조 30년) 11월 10일(정유), 다섯 번째 기사
위의 기사는 조선 조정에서 명군 제독부에 명량해전의 상황과 전쟁의 공적 등을 정리해서 알렸던 내용이다. 조선 조정은 이순신의 보고를 바탕으로 명량해전의 상황과 전쟁의 성과 등을 정리해 명군에 알렸다.
원문 내용을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삼도수군통제사(兼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보고하기를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를 거의 다 잃어버렸습니다. 신(이순신)이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金億秋)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哨探船) 32척을 모아서 해남현(海南縣) 해로의 중요한 곳을 차단하고 있었는데, 적의 전선 1백 30여 척이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신이 부하 장수들과 전함을 준비해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습니다.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격파하니 사살한 적이 매우 많았고, 머리를 벤 적도 8명이나 되었습니다. 적의 전함 중 큰 배 한 척이 여러 적선을 지휘하여 우리 전함을 포위했지만 장수들이 열심히 싸워 11척을 깨트리자 적이 멀리 물러났습니다. …… 한산도의 수군 본진이 무너진 이후부터 남쪽 해안에 적선이 많아져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지금은 조선 수군이 다행히 승리를 거두어서 적의 기세가 좌절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의 전함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명량해전은 현격한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함대를 격파했던 이순신 함대의 대표적 전투이자 업적이다. 133척에 달하는 일본군 함대를 13척의 조선 함대가 격파했다는 사실은 물론 정유재란 이후 일본군이 서해와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다시 막아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큰 전투였다.
정유재란 이후 일본군의 계략에 따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파직하고, 대신 임명했던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하고, 이순신이 다시 복직해서 13척의 전함으로 명량 해협에서 일본 함대를 격파했던 일들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역사 관련 소재 중 하나이다. 이는 세 가지 사건이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명량해전의 역사적 의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칠천량 해전과의 관계 등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전투는 1592년 5월 1차 전투를 시작으로 1593년 1월까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전투가 이루어졌다. 평양성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1년 동안을 상징하는 대표적 전투에 해당한다.
평양성 1차 전투는 한양과 개성을 함락했던 일본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국왕 선조는 이미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한 상황이었다. 당시 평양성에는 조선의 군사와 백성의 수가 모두 합쳐 3,000∼4,000명 정도만 남아 있었다. 성을 지키기 위한 병력이나 전략 등이 모두 준비가 되지 않았던 상황으로 기세를 올리던 일본군을 방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선군은 평양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전력을 감당할 수 없었고, 방어 작전까지 실패하면서 평양성은 쉽게 함락되었다.
평양성 2차 전투는 1592년 7월에 진행되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참전을 결정하면서 먼저 요동 지역의 부총병(副總兵)이었던 조승훈(祖承訓)을 사령관으로 약 3,5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조승훈은 명나라에서 외적의 방어에 공적이 있었던 좋은 장수였지만 처음부터 일본군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조승훈은 당시 평양성에 남아 있는 일본군의 수가 적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조선군 3,000명과 함께 야간 공격을 시행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작전을 파악하지 못하고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게 되었다. 이 전투로 조·명 연합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명군은 주요 장수들이 전사하는 전멸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평양성 2차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이 일본에게 크게 패했던 사건은 조승훈 등의 요동군은 물론 명나라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조승훈은 평양성 전투 패배의 책임을 조선에 떠넘기려 했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3차 전투는 8월에 진행되었다. 2차 전투의 패배로 큰 충격을 받았던 명군은 평양성 공격에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다.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추가로 대군을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당장 실행되지는 않았다.
조선은 사신을 보내 명군의 출병을 요청했지만 추가 조치는 계속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조승훈 군대의 출동을 요청했지만 이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조선군의 도원수(都元帥)8)였던 김명원(金命元)은 일본군이 평양 이북으로 진격하지 않고, 세력이 약해졌다는 보고를 받고 다시 평양성 공격을 진행했다. 명군을 제외하고 조선군이 단독으로 평양성 수복을 위해 진행한 전투였다. 평양성 3차 전투의 초반에는 조선군이 일본군 선봉 부대를 제압하면서 기세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본대가 개입하면서 조선군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패배하게 되었다.
1592년 12월 하순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이 43,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명 연합군은 다시 평양성 공격을 준비하게 되었다.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했던 2차 전투 후 5개월 정도가 지난 뒤의 일이었다.
이여송은 당시 명나라에서 최고의 장수로 평가받던 인물이었다. 조선에서도 이여송이 명나라 최고의 장수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여송은 조선 조정에 3개월 안에 전 국토를 수복하겠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이여송 역시 조승훈처럼 일본군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명군의 전력으로 일본군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오해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1593년 1월 대규모로 평양성을 다시 공격했다. 이 전투가 평양성 4차 전투이다. 평양성을 차지하고 농성 중이었던 일본군의 전력으로는 조·명 연합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일본군은 크게 패하고 한양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조·명 연합군은 이후 한양 근처까지 일본군을 추격하지만 이 과정에서 명군이 일본군의 반격에 크게 패배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한양 수복까지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다음의 실록 기사들에는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 전투를 수행했던 모습들이 잘 나타나 있다. 이를 통해서 임진왜란 초기 공방을 거듭했던 평양성 전투의 다양한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다.
<실록사료1>
(조)승훈은 본래 용장(勇將)으로서 오랑캐들과의 전투에 익숙하였으므로 왜적을 가볍게 여겼다. 또 평양에 주둔한 왜적의 수효가 적다는 것을 듣고 틀림없이 완전 승리하여 공을 취할 것이라고 여겼다. 가산(嘉山)에 이르러 평양의 왜적이 그대로 있다는 것을 물어서 알고는 술잔을 들어 하늘에 축하하며 말하기를 ‘왜적이 아직도 물러가지 않은 것은 하늘이 나의 성공을 도우려는 것이다.’ 하였다.
이날 순안(順安)에서 3경(更)에 군사를 출발시켜 곧바로 평양성 밖에 다가갔는데 도원수가 장수를 파견하여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따르게 하였다. 뜻밖에 군사가 이르자 왜인들이 성을 미처 지키지 못하고 성 안에서 요소에 웅거하여 군사를 잠복시키고 기다렸다. 두 장수가 군사를 풀어 곧바로 칠성문(七星門)으로 들어가니 적이 좌우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대었다. 마침 많은 비가 내려 진창이 되었으므로 중국의 군사와 말이 빠졌는데, 사유(史儒)가 먼저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승훈은 급히 퇴각하였으나 후군(後軍)은 대부분 살상을 당하였고 조변(朝弁)과 천총(千摠) 장국충(張國忠)·마세륭(馬世隆) 등도 모두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조변은 군령(軍令)이 매우 엄숙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여겼었는데, 그가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더욱 애통하며 애석하게 여겼다.
『선조수정실록』 권26, 1592년(선조 25년) 7월 1일(무오), 열네 번째 기사
위의 기사는 명군으로 처음 조선에 들어왔던 조승훈의 행동과 평양성 2차 전투의 상황을 기록한 내용 중 일부이다. 원문 내용을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조승훈은 용맹한 장수로 전투에 능숙했기 때문에 일본군을 가볍게 여겼다. 또 평양에 주둔한 일본군의 병력수가 적다는 것을 듣고 승리를 확신했다. 평양성에 일본군이 계속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술잔을 들어 하늘에 축하하며 ‘일본군이 아직 도망가지 않고 평양성에 그대로 있는 것은 하늘이 나의 성공을 돕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승훈 부대가 공격을 위해 평양성에 접근하니 조선군도 3천 명의 병력을 함께 보냈다. 조·명 연합군의 공격에 일본군은 바로 방어하지 못하고 성 안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명군이 평양성의 성문 중 하나였던 칠성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일본군의 조총 사격과 진흙탕 때문에 보병과 기병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명군 장수 사유가 먼저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결국 조승훈은 간신히 도망에 성공했지만 명군의 다른 주요 장수들은 대부분 전사했다.”
조승훈은 명군의 선봉 부대로 조선에 들어와 평양성 전투를 주도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 일본군의 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고, 성급한 공격으로 전멸 수준의 패배를 경험하게 되었다. 조·명 연합군의 첫 출동이었던 평양성 2차 전투는 대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 패배는 조선은 물론 명나라 조정까지 충격에 빠지도록 했다. 몇 개월 후 이여송의 대군이 다시 파견되기까지 조·명 연합군의 활동이 사실상 중지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다만 일본군도 명군의 정식 참전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록사료2> 8일 제독이 3영에 명령을 전하여 일시에 군사를 전진시키고 성을 둘러 진을 치게 하였다. 우리 군사는 남쪽 성에 육박하고 절강(浙江)의 군사는 서쪽 성을 공격하였는데, 제독은 말을 달려 오가며 전투를 독려하였다. 온갖 포를 일제히 발사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대낮인데도 캄캄하였다. (중략) 제독이 장세작(張世爵) 등과 함께 칠성문(七星門)을 공격, 대포로 문을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갔다. 이에 이여백(李如栢)은 함구문(含毬門)을, 양원(楊元)은 보통문(普通門)을 통해 승세를 타고 앞을 다투어 들어갔다. 그리하여 1천 2백 80여 명을 참획(斬獲)하고 불태워 죽인 수도 절반이 넘었는데, 이와 함께 왜적에게 투항했던 절강인(浙江人) 장대선(張大膳)을 사로잡고, 포로가 되었던 우리나라 사람 남녀 1천 2백여 인을 구출하였으며, 노획한 마필(馬匹)과 기계(器械)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권27, 1593년(선조 26년) 1월 1일(병진), 두 번째 기사
위의 기사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지휘했던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4차 전투의 상황을 기록한 내용 중 일부이다. 원문 내용을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1593년 음력 1월 8일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조·명 연합군에 명령하여 평양성 앞으로 진격한 후 성을 포위하면서 진을 치도록 했다. 조선군은 평양성의 남쪽을, 명군은 평양성의 서쪽을 공격했는데, 제독 이여송이 공격을 지휘하면서 독려했다. 모든 포를 함께 발사하니 소리가 진동하고 화약 연기가 해를 가려 캄캄할 정도였다. …… 제독 이여송이 명군 장수 장세작 등과 함께 칠성문을 공격, 대포로 문을 부수고 군사를 이끌고 돌입했다. 다른 장수들은 평양성의 성문을 공격해 열고 돌입했다. 일본군 1,28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불태워 죽인 적군의 수도 많았다. 또 일본군에게 항복했던 중국인을 사로잡았고, 포로가 되었던 조선 백성 1,200여 명을 구출했다. 노획한 말과 장비의 수량도 매우 많았다.”
평양성 1차~3차 전투와 달리 4차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조·명 연합군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평양성을 수복했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한양까지 되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임진왜란의 전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평양성 전투는 명군의 임진왜란 참전과 조·명 연합군의 연합 작전이 처음 이루어졌던 사건으로 의의가 있다. 특히 평양성 전투를 계기로 임진왜란의 육상 전투 전황이 크게 전환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집필자 : 이규철,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