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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속 실록 이야기

1. 대동법은 어떻게 시행되었을까?

1) 대동법의 시행 배경 – 방납의 폐단

조선왕조의 부세제도는 토지세[租]와 역[役], 공물[貢物]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중 각 읍에서 거두는 공물은 국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물론, 중앙각사 및 지방관아의 행정 경비로 쓰였기 때문에 국가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다. 조선전기에는 각 읍의 토산현물을 공안(貢案)1)에 기록하고 이를 근거로 매년 공물을 거두었는데, 이러한 부세운영 방식을 현물공납제라 한다.
문제는 이러한 현물공납제가 15세기 후반부터 여러 폐단을 야기하였다는 점이다. 공물에는 밭작물 외에도 각종 임산, 해산 자원이 포함되었는데, 기후조건과 생태환경에 따라 자원의 수량이 변하여서 매년 정기적으로 바쳐야 하는 공물 수량을 맞추기 어려웠다. 또 공물을 포장하여 중앙에까지 안전하게 수송해야 하는 책임이 해당 고을에 주어졌기 때문에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고을에 부과된 공물을 대신 마련해 상납해주는 방납인(防納人)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대부분 왕실 혹은 세도가와 연결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방납업자들은 공물을 마련하는 값보다 몇 배 높은 값을 고을 백성들에게 요구하였기 때문에, 공물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백성들은 방납인들에게 더 많은 공물가를 지불해야 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방납의 폐단’이다. 더욱이 공물을 납부할 때 세력 있는 부호들은 징수 대상에서 제외되고, 가난하고 힘없는 가호에 공물 징수가 집중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공물을 바치는 과정에서도 여러 폐단이 나타났다. 우선 공물은 매년 바쳐야 하는 액수가 정해져 있었지만, 왕실과 각사의 필요에 따라 추가 징수하는 관행이 나타났다. 또 이렇게 바친 공물과 진상을 중앙의 관원이 검사하여 품질이 좋지 않을 경우 퇴짜를 놓을 수 있었다. 이를 점퇴(點退)라 하는데, 중앙관서의 하급 서리나 사옹원(司饔院)2)의 관원들이 점퇴를 빌미로 지방에서 공물이나 진상을 바치러 온 자들에게 뇌물을 요구하였다.
공납제의 폐단이 이처럼 다각도로 야기되는 가운데,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방에서는 수령의 주도 하에 백성들에게 쌀을 거두어 공물을 대신 마련해 상납하는 사대동(私大同)이 행해졌으며, 임진왜란기에는 공물 대신 쌀을 거두어 군량을 보완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수미법(收米法) 시행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전란이 종식된 후 이러한 공물변통논의는 광해군 즉위년에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 1) 조선시대 중앙의 각 궁(宮)과 사(司)가 지방 여러 관부에 부과하고 수납할 연간 공물과 세금의 품목, 수량을 기록한 책.
  • 2) 조선 시대 왕의 식사나 궁중의 음식 공급과 관련된 일을 맡아 보던 관청.

2) 광해군대 경기선혜법이 시행되다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년(1608년) 5월,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이라는 명칭으로 반포되었다. 광해군이 선혜법을 시행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아래 실록 기사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실록사료1>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였다. 전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의논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배하는 공물(貢物)이 각사(各司)의 방납인(防納人)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십 배, 몇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 기전(畿甸)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廳)을 설치하여 매년 봄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結)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本廳)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말 가운데 매번 1말씩을 감하여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사 비용으로 삼게 하고, 또한 일로(一路) 곁의 고을은 사객(使客)이 많으니 덧붙인 수를 감하고 주어 1년에 두 번 쌀을 거두는 외에는 백성들에게서 한 되라도 더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오직 산릉(山陵)과 조사(詔使)의 일에는 이러한 제한에 구애되지 말고 한결같이 시행하도록 하소서.”하니, 따랐다. 그런데 전교 가운데에 ‘선혜(宣惠)’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이 청의 명칭을 삼은 것이다. 의정(議政)을 도제조(都提調)로 삼고, 호조 판서가 부제조를 겸하도록 하였으며, 낭청 2원(員)을 두었다.
이 뒤로 수령이 못된 자일 경우 정해진 법밖에 더 거두어도 금할 수 없었고, 혹은 연호(烟戶)를 침탈해서 법으로 정한 뜻을 다 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전의 전결에 대한 역(役)은 이에 힘입어 조금 나아졌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권4, 1608년(광해 즉위년) 5월 7일(임진), 두 번째 기사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경기선혜법은 광해군 1608년(광해군 즉위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 발의하고 광해군이 이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제정되었다. 이원익은 경기의 경우 방납의 폐단이 가장 심하기 때문에 이를 개선할 별도의 관청을 설치하고, 봄, 가을로 나누어 1결당 8말의 쌀을 각각 거두어 서울에서 물건을 구매해 쓰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하면 방납인들에게 높은 값의 공물가를 지급할 필요가 없어져 백성들이 공물 부담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원익의 언급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경기 각 고을에 16말의 쌀을 거두어 한 말씩은 수령의 공사비용으로 주되 사행로 인근의 고을은 더 주도록 하고, 그밖에 추가로 공물 혹은 쌀을 거두는 일을 금지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오직 산릉(山陵)과 조사(詔使)의 일에는 구애되지 말고 한결같이 시행하도록 예외조항을 두고 있다. 여기서 산릉은 왕릉을 조성하는 역이며, 조사는 명나라 사신 접대를 의미한다. 경기지역은 조선 전기 이래 왕릉이 조성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경기 백성들은 국상 기간에 능역 조성에 일차적으로 동원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왜병에 의해 왕릉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전후 복구 차원에서 왕릉을 재조성하는 역이 경기의 백성들에게 지워졌다.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통하는 의주로를 비롯해 전국의 주요 도로가 경기를 거쳐 도성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성을 오가는 중국 사신 및 왕실 구성원, 관원들의 행차 시 이들을 수발들고 접대하는 역에 경기민들이 수시로 동원되었다.
임진왜란이 종식되고 명 사신의 왕래가 빈번해지자 조정에서는 명 사신 접대에 많은 경비를 지출하는 한편, 명 사신이 도성에 도착할 때까지 각 고을에서 사신 접대를 극진히 하도록 하였다.
경기선혜법 시행 당시 이원익이 산릉과 조사의 역에 있어서만 예외로 두고 추가 징수를 용인한 배경에는 이처럼 임진왜란 이후 전후 복구를 위한 산릉역과 대명 사신 접대의 역이 경기민들에게 과중하게 부과되었던 상황이 놓여 있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경기선혜법을 반포하기 두 달 전인 1608년 3월, 좌찬성 유근(柳根), 병조판서 이정귀(李廷龜), 예조 참의 유인길(柳寅吉), 호조판서 김신원(金信元), 이조판서 정창연(鄭昌衍) 등에게 하교를 내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에게 보내 명 사신 접대를 비롯한 국정 현안을 상의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광해군에게 명 사신 접대를 위한 관반사(館伴使)와 접반사(接伴使)를 차출하고 의식절차와 접대 물품, 동원할 군사 등의 문제를 호조, 예조, 병조와 상의하여 시행할 것을 아뢰는 한편,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지방의 해묵은 포흠(逋欠)3)과 긴급하지 않은 공물 등을 혁파하라는 광해군의 전교를 받들어 별도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아래의 실록 기사를 살펴보자.

  • 3) 관청의 물건을 사사로이 써 버리는 것.

<실록사료2> 좌찬성 유근(柳根), 병조 판서 이정귀(李廷龜), 예조 참의 유인길(柳寅吉), 호조 판서 김신원(金信元), 이조 판서 정창연(鄭昌衍)이 아뢰기를, 전일의 전교(傳敎) 가운데 조사(詔使)를 접대하는 일이 더욱 긴급하니, 관반사(館伴使)와 원접사(遠接使)를 먼저 차출해야 됩니다. 그런 뒤에 의주(儀注)·지대(支待)·용군(用軍) 등에 관계된 일은 마땅히 호조·예조·병조 등과 함께 마련하여 시행하겠습니다. (중략) 이밖에 해묵은 포흠(逋欠), 긴급하지 않은 공물(貢物) 등 백성을 병들게 하는 폐단에 관계된 것은 일체 견면하고 혁파하고 통렬히 금하라는 것으로 전교가 있었기 때문에 차자에서 하나의 국(局)을 설치하여 전적으로 그 일을 주관하게 하라고 청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차자의 내용대로 백성들의 일을 잘 아는 사람 4, 5원(員)을 차출한 뒤 회의하여 마련해서 시행하게 하소서.

『광해군일기』 중초본 권2, 1608년(광해군 즉위년) 3월 27일(갑인), 두 번째 기사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광해군은 명 사신 접대의 일을 긴급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처리하는 일과 함께 경기민의 공물 부담을 줄여줄 것을 지시하였다. 광해군 즉위년에 시행된 선혜법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경기민들에게 부과된 공물 부담을 줄여주는 차원에서 기획되었다고 할 것이다.
경기선혜법 시행 이후 대동법의 효과를 목도한 지방민들의 상소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이 전국에 시행되는 데에는 100년의 시간이 걸렸다. 대동법의 확대 시행에 이처럼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3) 인조대 삼도대동법의 시행과 좌절

1623년(인조 1년) 당시 이조정랑이었던 포저 조익(趙翼, 1579~1655)이 대동청의 설립에 관한 절목을 작성하여 아뢰자4) 인조는 대동법에 대한 의혹을 해소하였다고 하면서, 곧바로 강원도와 충청도, 전라도에 대동세를 거두는 삼도대동청의 설치를 명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을 시행한 해에 수해와 한재로 전국에 흉년이 들면서 대동미를 제대로 거둘 수 없게 되었다. 중앙정부는 대동미를 줄여 거두고자 하였으나, 각 고을에서는 중앙에 바치는 대동미 외에도 지방 경비로 쓸 잡다한 공물과 역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부과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민간에서는 백성들이 대동법을 오히려 불편하게 여긴다는 보고가 올라왔다.5) 삼도대동법을 시행할 당시 서울에 바치는 공물에 대해서만 대동미로 전환하고, 각도와 군현에서 쓰는 경비는 미처 대동세에 포함시키지 못한 채, 전과 같이 자체적으로 공물과 역을 징수하였던 것이다. 삼도대동청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도, 군현의 경비를 조사하여 서울로 상납하는 쌀 9말 외에 지방경비로 쓸 5말을 추가로 거두자는 의견을 냈으나 인조는 이를 재가하지 않았다.
당시 조정의 관료들 역시 대동법 시행에 부정적이었다.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중앙에 올려 보낼 때 바람과 파도에 배가 뒤집히게 되면 그해 세입을 크게 잃게 되는 점을 우려하는 의견도 있었고, 토지를 많이 가진 자가 많은 세를 내게 되면 지방의 대가(大家)와 거족(巨族)들이 반발한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결국 삼도대동법은 시행된 지 삼년이 안 되어 경기선혜법을 처음 건의하였던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혁파되었다. 아래의 실록 기사를 통해 영의정 이원익이 인조에게 대동법 혁파를 건의하게 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 4) 『인조실록』 권3, 1623년(인조 1년) 9월 3일(경인), 두 번째 기사.
  • 5) 『인조실록』 권5, 1624년(인조 2년) 3월 8일(임술), 네 번째 기사.

<실록사료3>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차자를 올려 대동법(大同法)을 속히 혁파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차자에, "신이 조정에 있어 온 이래 중외(中外)의 폐단이 대부분 부역(賦役)이 균등하지 못하고 멋대로 방납(防納)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동법을 신이 실제로 처음 착안하여 제신(諸臣)들과 뜻을 결정한 뒤 먼저 경기에서 시험해 보았는데, 몇 년을 시행해 보니 자못 효과가 있기에 강원도에도 병행하려 하다가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반정 초에 부름을 받고 올라와 삼가 보건대 성명께서 진실로 백성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시기에, 신은 이 법을 먼저 강원도에 시행하고 이어 다른 도에도 적용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백성의 병폐를 제거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성상의 뜻에 보답하려고 했는데, 처음 의정(議定)할 당시에 수재와 한재가 잇따라 해마다 크게 흉년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휴가 중이면서도 깊이 염려되기에 동료에게 통지하여 계달하게 하고 그 뒤에 또 차자를 올려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기를 청했는데 상께서 다시 의논하는 것을 윤허하지 않으셨으므로 마침내 그대로 시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날 호남에서 잇따라 상소가 올라오고 중외의 민심이 대단히 불편하게 여기기에 신이 또 동료에게 통지하는 한편 명을 받들어 진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도록 시행하느냐 혁파하느냐의 여부가 불확실한 채 결말을 볼 기약이 없게 되었는데, 고쳐진 규례가 많고 호령도 많이 제한을 받으므로 먼 외방의 민정이 날이 갈수록 더욱 어긋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사정은 양호(兩湖)가 거의 비슷하나 호남이 더욱 심한데, 근심하고 한탄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어디고 할 것이 없이 모두 그러합니다. 국가에서 어떤 일을 실행하려면 먼저 민정을 잘 살펴야 하는데, 민정이 이러하니, 어찌 억지로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본청(本廳)에 명하여 즉시 혁파하도록 하고, 이미 거둔 쌀과 베는 잘 조처하여 모두 민역(民役)의 대가(代價)로 충당하게 하여 중간에서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그러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인조실록』 권8, 1625년(인조 3년) 2월 7일(병술), 첫 번째 기사

이처럼 이원익의 건의로 삼도대동청이 혁파되는 가운데서도, 강원도만은 대동법이 유지되었다. 강원도민들이 대동법 시행을 매우 편리하게 여기고 있었고, 삼도대동법이 혁파된다는 소문이 돌자, 철원 유생들이 상소하여 대동법을 혁파하지 말 것을 청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1625년(인조 3년) 이후 대동법은 경기와 강원 두 도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후 대동법의 확대 시행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호서대동법이었다.

4) 호서대동법 이후 대동·상정법의 확대 시행 과정

효종이 즉위한 후 우의정 김육(金堉, 1580~1658)은 곧바로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조익 역시 얼마 안 있어 인조대 올린 ‘논선혜청소(論宣惠廳疎)’와 ‘논대동법소(論大同法疎)’ 등의 글을 책으로 엮어 효종에게 바침으로써 대동법 시행에 힘을 실었다. 아래의 실록기사는 오랜 논의 끝에 1651년(효종 2년) 호서대동법이 시행되었던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실록사료4> 호서의 대동법(大同法)을 비로소 정하였다. (중략) 영의정 김육(金堉)이 대동법을 극력 주장하였고, 또 충청도는 공법이 더욱 고르지 못하다고 하여 먼저 시험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누차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혹자는 그것이 편리하다고 말하고 혹자는 그것이 불편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와서 상이 김육 등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그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익히 강론하여 비로소 호서(湖西)에 먼저 행하기로 정하였다.【한 도를 통틀어서 1결(結)마다 쌀 10두(斗)씩을 징수하되, 봄·가을로 등분하여 각각 5두씩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산중에 있는 고을은 매 5두마다 대신 무명 1필(匹)씩을 공납하였다. 대읍(大邑)·중읍(中邑)·소읍(小邑)으로 나누어 관청의 수요를 제하여 주고, 또 남은 쌀을 각 고을에 맡겨 헤아려 주어서 한 도의 역(役)에 응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선혜청(宣惠廳)에 실어 올려서 각사(各司)의 역(役)에 응하게 하였다.】

『효종실록』 권7, 1651년(효종 2년) 8월 24일(기사), 세 번째 기사

효종이 즉위한 1649년 11월부터 김육은 지속적으로 대동법 시행을 주장하였으나,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경석(李景奭)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고, 김집(金集)과 조석윤(趙錫胤), 원두표(元斗杓) 등은 대동법 시행을 반대하였다. 조석윤은 대동청 당상에 임명되자 직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호조판서 원두표는 대동법 시행에 관해 김육과 일절 상의하는 바가 없이 감정적으로 그와 대립하였다. 김육은 원두표에 대해 본래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어 자기 마음에 싫은 것은 하지 않으려 한다고 비난하기까지 하였다.6)
대동법을 반대하는 자들은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보다 각 고을에 마련된 공안을 현실에 맞게 바로잡는 일이 백성들을 더 편하게 하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조선 전기 이래 공안에 기록된 물품들 중에는 그 지방에서 나지 않거나, 중앙에서 필요로 하는 양보다 많게 책정된 공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공안에 있는 물종을 개선하고 그 수량을 줄이게 되면 공납의 폐단은 자연히 개선될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안 개정론자들의 주장은 토지를 많이 보유한 지주들의 이해를 반영한 것이었으며, 한편으로 지방 경비를 백성들에게 임의로 부과하여 경비로 충당하고 있던 지방관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었다.
대동법은 공물세를 토지세로 전환한 세제개혁안이었기 때문에 토지를 많이 가진 자들에게 대동세가 많이 부과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 거둔 대동미로 중앙 관서의 공물가와 지방 경비를 모두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지주층과 고을 수령들이 대동법을 반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동법이 충청도와 전라도에 확대 시행되면서 공안개정을 우선해야 한다는 자들과 대동법을 확대 시행해야 한다는 자들로 입장이 나뉘어 논쟁이 가속화되었다. 결국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시행하고자 한 김육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하고 충청도에만 먼저 시행되었다. 그러나 호서대동법은 이후 대동법의 확대 시행 과정에서 전범(典範)으로 활용되었다. 실제로 1658년(효종 9년) 전라도 연해의 27개 읍에, 1662년(현종 3년) 전라도 내륙 산군의 26개 읍에 대동법이 확대 시행되었으며, 1678년(숙종 4년)에는 경상도 전역에 대동법이 반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1666년(현종 7년)과 1708년(숙종 34년)에는 함경도와 황해도에 상정법(詳定法)이 시행됨으로써, 토지가 적고 토질이 척박한 지역에도 상정세를 차등 있게 거두게 되었다.
대동법은 현물공납제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를 개선하고, 백성들의 세 부담을 줄여준, 조선후기 최고의 개혁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백성들은 잡다한 공물을 대동미로 간편하게 납부하면 되었고, 중앙에서는 이렇게 거둔 쌀을 조달상인[공인]들에게 나누어 주어 시장에서 구매해 씀으로써 서울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백성들에게 거둔 쌀의 일부만 중앙으로 상납하고, 나머지는 지방에 유치하여 경비로 지출함으로써 예산제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다만, 대동세는 공물과 달리 추가징수의 관행을 엄격히 금지하였기 때문에 한 번 거둔 쌀로 중앙과 지방의 한 해 경비를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늘어나는 경비를 줄이고, 세입을 아껴 써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되었다.

  • 6) 『효종실록』 권7, 효종 2년 8월 3일(무신) 두 번째 기사.
참고문헌 내용펼쳐보기
  • 한영국, 「대동법의 실시」, 『한국사』 13, 국사편찬위원회.
  • 이정철,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 최주희, 『조선후기 선혜청의 운영과 중앙재정구조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2014.

2. 영조는 왜 균역법을 시행하였나?

1) 양역변통 논의의 배경 – 군역의 납포화와 군영의 창설

양역은 조선시대 16~60세의 양인 장정에게 일정기간 군역을 지우던 제도를 일컫는다. 조선시대 군역제는 직접 번을 서는 정군(正軍)과 정군의 생활자금을 지원하는 보인(保人)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15세기 후반부터 일정한 대가를 받고 정군 대신 군역을 지는 대립군들이 출현하였으며, 1541년(중종 36년)에는 기왕의 대립 관행을 제도화하여, 정군들이 번을 서는 대신 군포를 납부케 하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가 시행되었다.
이처럼 군역의 납포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발발로 17세기 전반 양인 장정 수가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문제는 전쟁을 겪으면서 훈련도감을 비롯한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금위영 등 신설 군문이 17세기 중후반에 걸쳐 차례로 신설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병조뿐 아니라 중앙 군영에 확보해야 하는 군인의 수[軍額]는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인조 대 호패법을 시행하여 군안(軍案)에 파악되지 않은 양인 장정을 찾아내고자 하였으나, 신설 군영이 창설되는 과정에서 병조를 비롯한 지방 병영의 군액을 채우기는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현종 대와 숙종 대에는 각각 경신대기근(1670~1671)과 을병대기근(1695~1700)이 닥쳐 전국적으로 많은 사망자와 유리민이 발생하였고, 양인 장정의 색출은 더욱 어려워졌다. 병조와 신설 군영들은 부족한 군액을 채우기 위해 각종 불법을 자행하였는데, 어린아이[黃口簽丁]와 이미 죽은 사람[白骨徵布]에게 군포를 부과하거나, 이웃[隣徵]과 친족[族徵]에게 군포 상납을 전가하는 방식이었다.
중앙정부는 양역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병조와 각 군영에 속한 군인의 액수를 조사한 뒤, 현실에 맞게 수를 줄이고 정액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숙종 대부터 시작된 군액의 감축, 정액화 노력은 영조 대 『양역실총(良役實摠)』의 간행으로 일단락되었다. 아래 첫 번째 기사는 1743년(영조 19년)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이 『양역실총』을 작성하여 각 군영의 군액을 줄이고, 6도 각 읍에 군액수를 할당한 내역을 보고해 올리는 내용이다. 이때 작성된 『양역실총』은 수정, 보완단계를 거쳐 균역법이 제정되기 2년 전인 1748년(영조 24년)에 최종 반포되었다. 두 번째 기사의 양역사정책자(良役査正冊子)가 바로 수정을 거쳐 완성된 『양역실총』이다.

<실록사료1>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상신의 직임에서 해면시켜 주기를 원하고, 겸하여 양역사정안(良役査正案)을 올렸는데, 양역실총(良役實摠)이라고 이름하고 교서관으로 하여금 인쇄하여 여러 도에 반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영조실록』 권58, 1743년(영조 19년) 7월 5일(을유), 세 번째 기사

<실록사료2>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양역사정책자(良役査正冊子)를 올렸다. 양역에 대한 폐단은 그것이 이미 고질이 되었으므로 조현명이 건의하여 경외(京外) 각 고을의 명목을 가져다가 이정(釐正)하면서 남는 것은 덜고 부족한 것은 보태게 했는데, 모두 10책으로 되어 있었다. 수미(首尾)가 6, 7년이나 걸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었다.
사신은 말한다. "양역의 폐단은 반드시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하고야 말 것이다. 조현명의 건의는 듣기에는 기쁜 것 같았지만, 폐단의 근원은 막지 못하고 단지 말단만 바로잡았을 뿐이다. 경외의 간민(奸民)들 가운데 교묘하게 양역에서 피하여 누락되었던 자들로서 명목에 들어간 자가 겨우 열에 한둘뿐이었다. 여러 해 동안 청(廳)을 설치하여 실속없는 법을 만들어 일분의 이익을 추구하였으니, 계획을 세운 것이 또한 허술했다. 같이 일을 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완성시킬 수 없다고 했는데도 조현명이 더욱 극력 버티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책이 완성되었으나 백성들의 곤고는 그대로였다."

『영조실록』 권67, 1748년(영조 24년) 6월 17일(경오), 첫 번째 기사

그런데 두 번째 기사의 끝에 실린 사론에서 보듯이, 『양역실총』 의 간행 작업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양역에 누락되었던 자들로서 새로 군적에 포함된 자가 열에 한둘뿐이라는 혹평이 달렸다. 『양역실총』 의 간행만으로는 양인 장정을 색출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양역사정 조치와는 별도로, 정군과 보인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양역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변통논의를 다각도로 전개하였다.

2) 양역변통 논의의 전개 – 양역사조에서 감필급대로

17세기 후반부터 영조 대 균역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양역변통논의는 크게 네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를 양역사조(良役四條: 유포, 구포, 호포, 결포)라 한다. 아래 기사에서 정언 조명리(趙明履)는 양역사조를 논하기에 앞서 경비를 절약하는 방안을 근본적인 계책으로 제시하였다. 영조 역시 이에 원론적으로 동의하였지만, 한편으로 군포 수취 방식을 전면 개선하기 위한 변통 논의를 유도하였다.

<실록사료3> 정언(正言) 조명리(趙明履)가 상소(上疏)하여 세 가지 조목을 진달하였다. (중략) 민생(民生)을 구휼하는 데 대해 논하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논자(論者)들의 설명은 모두 네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호포(戶布), 결포(結布), 구전(口錢), 유포(遊布)입니다. 이 네 가지 법은 모두 양역(良役)의 편중(偏重)을 돌보기 위해 다른 백성들에게 더 부세(賦稅)하여 고통을 나누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대저 정치를 함에 있어 그 근본은 바로잡지 않은 채 그 말단만 바루려고 한다면 어떻게 제대로 구제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에 계책을 세운다면 용도(用度)를 절약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중략) 대저 이와 같이 한다면 양역(良役)의 가포(價布)를 양감(量感)하여 실제적인 혜택이 널리 흡족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서인(士庶人)의 사치스런 풍습과 수령들의 탐욕스런 행실과 이서(吏胥)들이 속이는 간계(奸計)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또 재정을 소모 시키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 가운데 큰 것이니, 반드시 더욱 경칙(警飭)을 가한 연후에야 백성을 보양(保養)하는 도리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영조실록』 권37, 1734년(영조 10년) 3월 3일(기묘), 여덟 번째 기사

양역사조 중 가장 먼저 제기된 안은 유포론(遊布論)이었는데, 이는 군역을 지지 않는 한유자 층7)에게 군포를 부과하자는 의견이었다. 구전(口錢) 혹은 구포(口布)는 양인 장정만이 아닌 일정한 연령대의 남녀 모두에게 신분에 상관없이 포목 또는 돈을 징수하자는 견해로 가장 파격적인 변통안이었다. 영조 즉위 전까지 유포론이나 구전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영조가 즉위한 후 두 논의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자 논의가 수그러들었다.
영조는 유포론에 대해, 한유자 층을 조사하고 군안에 포함시키는 과정에서 폐단이 야기될 것이며, 새로 편입되는 양역자수도 많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구전론의 경우는 면역의 특혜를 누리던 양반 사족과 부녀자 층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살 수밖에 없는 제도였기 때문에 애초에 실현 가능성이 낮았다. 결국 균역법 시행 직전까지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안은 호포와 결포였다. 호포론은 가호를 대호·중호·소호 등으로 구분하여 포를 부과하는 안이다. 구전론이 신분에 관계없이 사람에게 부과하는 방식이라면, 호포는 호에 일괄 부과하는 안으로서 구전론에 버금가는 파격적인 변통안이었다. 반면 결포론은 토지에 군포를 부과하는 안으로 김유(金楺)가 처음 제기하였는데, 1721년(경종 1년) 이건명(李健命)이 모든 양역자의 군포 수를 1필로 통일하고, 나머지 부족분을 토지에 부과하는 감필결포론을 제안함으로써 균역법에 가장 근접한 안이 되었다. 이 안은 1749년(영조 25년) 충청감사 홍계희(洪啟禧)에 의해 다시 제기되어 호포론과 함께 가장 유력한 변통안으로 논의되었다.
영조는 처음에는 박문수(朴文秀)가 제안한 호포론을 지지하였으며, 포 대신 돈을 거두는 호전론의 시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호적상에 양역자수가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데다가, 기존의 군포 수입을 고려하면 가호 당 1냥을 수취한다고 해도 수만 냥의 재정 부족이 예상되었다. 결국 영조는 1750년(영조 26년)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감필을 단행하는 한편, 군문을 비롯한 정부관청의 줄어든 군포 수입을 보충해주는 급대(給代)8) 방안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 7) 교생·군관·한량·업무·업유 등의 직역을 가지고 군역에서 면제된 자들.
  • 8) 부족한 재원을 대신 지급해주는 행위.

3) 균역법의 단행 – 군포 수취를 2필에서 1필로 줄이다

아래 기사에서 보듯이 영조는 재위 26년 7월 9일 양역사조 중 구전과 호포, 결포의 문제를 열거하며 1필을 감하라는 명을 내렸다. 문제는 아래 기사에서 보듯이 영조는 감필의 명을 내리면서 부족한 군포 수입을 보충할 대책을 구체적으로 마련해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1필을 감한 대체를 강구하라는 명은, 곧 급대 방안을 세우라는 뜻이었다. 당시 필요한 급대 재원은 100만 냥으로 추산되었다.

<실록사료4> 양역(良役)의 절반을 감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과 비국 당상 및 육조 당상, 양사 제신을 불러 두루 양역의 변통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구전(口錢)은 한 집안에서 거두는 것이니 주인과 노비의 명분이 문란하며, 결포(結布)는 이미 정해진 세율이 있으니 결코 더 부과하기가 어렵고, 호포(戶布)가 조금 나을 것 같아 1필을 감하고 호전(戶錢)을 걷기로 하였으나 마음은 매우 불쾌하다. 영상은 비록 경하게 걷는 것이 옳다고 하나 절목(節目)을 보면 이 역시 호구를 수괄(搜括)하는 것이다. 백성의 뜻을 알고 싶어서 재차 궐문에 임하였더니, 몇 사람의 유생이 ‘전하께서는 백성을 해친 일이 없는데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을 신은 실로 마음 아프게 여깁니다.’라고 말하고, 방민(坊民)들은 입술을 삐쭉거리면서 불평하고 있다고 말하니, 비록 강구(康衢)에 노닌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군포(軍布)는 나라의 반쪽이 원망하고 호포는 일국이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민심은 진정을 시켜야지 선동을 해서는 안 된다. 지금 내가 어탑에 앉지 않는 것은 마음에 겸연(歉然)한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경 등은 알겠는가? 호포나 결포나 모두 구애되는 사단은 있기 마련이다. 이제는 1필은 감하는 정사로 온전히 돌아가야 할 것이니, 1필을 감한 대체를 경 등은 잘 강구하라." 하였다.

『영조실록』 권71, 1750년(영조 26년) 7월 9일(기유), 첫 번째 기사

균역법의 시행 세칙인 「균역사목」이 작성된 시기가 감필의 명이 내려진 1750년(영조 26년)이 아닌 1752년(영조 28년)인 것은 사목 안에 감필의 후속조치인 급대 방안이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감필 조치 이후 중앙정부는 각 군영의 군액과 관서의 불필요한 경비를 일차적으로 삭감하였으며, 궁방에 속해 있던 어염선세(漁鹽船稅)9)와 각 고을의 은여결(隱餘結)10)을 균역청에 귀속시키는 한편, 한유자 층에게는 별도 선무군관포를 거두는 방식으로 급대재원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에 토지 1결당 쌀 2말 혹은 돈 5전을 부과하는 한편, 대동세의 출납기관인 선혜청의 재원 일부를 가져다 급대재원으로 충당하였다. 이렇게 마련한 급대 재원은 60만 냥 정도에 달했다. 감필급대 이후 부족할 것으로 예상했던 100만 냥에는 미치지 못하는 액수였지만, 중앙정부는 한편으로 군영과 관서의 경비를 절감함으로써 감필로 인한 재정 부족 문제를 만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각 군영과 관서에 지급해야 하는 급대 재원은 늘어났고, 이는 중앙의 재정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균역법은 조선후기 대동법과 더불어 백성들의 양역 부담을 줄여준 혁신적인 개혁안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래 군역의 납포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군포 수취 방식을 전면 개선하지 않고, 감필급대로 매듭지음에 따라 양역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소하지 못하는 한계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급대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지방 경비로 묵인해오던 은여결을 균역청에 귀속시킴으로써 지방 관아의 재정부족을 초래하게 되었다.

  • 9) 왕실궁가에 지급되는 어전세, 염분세, 선세 등을 일컬음.
  • 10) 토지대장에 기재하지 않고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세를 거두기 위해 경작하던 땅.
참고문헌 내용펼쳐보기
  • 차문섭, 「均役法의 實施」, 『한국사』 13, 국사편찬위원회, 1976.
  • 정연식, 『영조대의 양역정책과 균역법』,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
  • 정연식, 「均役法 施行 이후의 지방재정의 변화」, 『진단학보』 67, 1989.
  • 송양섭, 「均役法 施行 以後 軍役制 變動의 推移와 洞布制의 運營」, 『군사』 31. 국방군사연구소, 1995.

3. 1862년 임술민란은 왜 일어났을까?

1) 임술민란의 주도세력

19세기 조선사회는 ‘민란의 시대’라 부를 만큼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의 수렴첨정과 안동 김문의 외척세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비변사 중심의 중앙 정치세력은 통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현안 처리에만 몰두하였고 사족, 농민들의 계층분화에 따른 지방사회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정치구조 상의 경직성은 18세기 경향분기와 노론주도의 정국운영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18세기 이래 한양 출신 노론 가문 자제들이 과거에 다수 합격하여 주요 관직에 진출하면서 지방 출신 사족, 유생들의 과거 합격 및 정계 진출의 기회는 줄어들고 있었고, 중앙과 지방 간 학문 네트워크와 지식 정보 교류 역시 약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를 ‘경향분기’라 한다. 한편 지방에서는 수령과 향리 중심의 통치구조가 강화되는 가운데, 양반사족들이 향촌의 운영[鄕政]에서도 점차 소외되어 양반으로서의 위상과 가격(家格)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에 처했다.
1811년(순조 11년) 서북지역 차별에 반발한 몰락 양반 홍경래의 주도로 평안도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이후 50년이 지난 1862년(철종 13년) 단성출신 양반 김인섭의 주도로 단성민란이 촉발되었다. 단성민란은 곧 인접지역인 진주로 번져 삼남의 70여개 고을에서 대규모 농민봉기가 야기되었다. 단성민란의 주도자 역시 단성 출신 양반이었던 단계리의 김인섭(金麟燮)이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성균관, 사간원 등에서 관직생활을 하였으나 한양에 머무는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부친의 병환으로 낙향과 상경을 반복하다가 결국 관직을 단념하고 단성으로 내려와 가계 경영에 힘썼다. 이 과정에서 단성현의 향정에 관여하며, 부세운영의 모순과 관리의 탐학을 비판하는 상소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뜻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단성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현감과 향리를 축출하는 민란을 주도하였다.

<실록사료1> 비변사(備邊司)에서 영남 선무사 이삼현(李參鉉)이 주달한 단성(丹城)의 전 정언(正言) 김인섭(金麟燮)의 일로 인하여 아뢰기를,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신하가 난민들의 대열에 섞여 들어가서 읍론(邑論)을 주장(主張)했으니, 듣기에 놀랍고 통분스러운지 오래 되었습니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철종실록』 권14, 1862년(철종 13년) 6월 2일(계축), 세 번째 기사

위의 기사는 김인섭이 단성민란을 주도하였다는 사실이 중앙에 보고되자, 비변사에서 시종신(侍從臣)11)을 지낸 자가 난민의 대열에 섞여 읍론을 주장하였다고 비판하면서, 김인섭을 의금부로 잡아들여 심문하도록 한 내용이다. 1862년 대규모 농민봉기가 양반관료 출신인 김인섭의 주도하에 야기되었다는 사실은 임술민란을 단순히 기층 민중의 저항으로만 평가할 수 없게 만드는 지점이다. 실제로 진주지역 민란 역시 양반출신 유계춘, 이명윤 등이 주도하였으며 이들은 향회를 통해 관권의 불합리한 부세 행정에 저항하였다. 19세기 민란은 결국 향촌사회의 계층 분화 양상을 총체적으로 반영한 결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만, 농민들은 초기 양반, 사족들이 주도하는 봉기에 참여하던 방식에서 나아가 자체적으로 세를 확장하여 관아를 습격하고, 중앙정부에 강력히 저항하는 흐름을 형성해갔다. 그리하여 단성에서 진주로 이어진 농민봉기가 전국 70개 군현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농민 조직 중에는 땔감을 채취하여 파는 초군(樵軍)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래 기사는 임술민란 당시 공주 지역 각 면에 조직된 초군들이 야기한 민란의 상황을 중앙에 보고한 내용이다.

  • 11)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는 신하.

<실록사료2> 충청감사 유장환(兪章煥)이 회덕(懷德)의 초군(樵軍)들이 청주목(淸州牧) 읍촌(邑村)의 인호(人戶)에 불을 지른 일을 치계(馳啓)하니, 하교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철종실록』 권14, 1862년(철종 13년) 5월 22일(계묘), 두 번째 기사

초군들은 지방 농민 출신들로 조직되었으며, 농한기 때 야산에서 땔감을 채취해 내다팔면서 지역 간 정보 교류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면 1862년(철종 13년) 임술민란이 이처럼 대규모 농민봉기의 형태로 전개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18세기부터 누적된 재정구조의 모순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2) 임술민란의 배경 – 삼정의 문란

18세기 들어 각도 감사가 매년 풍흉을 고려한 전세 및 대동세의 상납액을 조정에 보고하면 중앙정부가 이를 승인하는 방식으로 세입을 확보하였는데 이러한 수취 방식을 비총제(比摠制)라 한다. 문제는 중앙으로 상납되는 전세와 대동세 등의 수입이 19세기 전반 내내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으나 중앙정부로서는 별다른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세입을 늘리려면 경작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20년마다 한 번씩 양전사업을 시행하는 것을 법전에 성문화하였다. 그러나 숙종 대 삼남에 경자양전12)을 시행한 후로는, 문제가 되는 몇몇 고을만 조금씩 양전을 시행할 뿐이었기 때문에 세입이 늘어나기 어려운 구조였으며, 왕실궁가와 정부관청에 속한 면세결도 19세기 전반 늘어나고 있었다. 더욱이 중앙정부는 매년 각도 감사가 보고해 올리는 수조안(收租案: 전세·대동미를 거둘 수 있는 토지 결수를 중앙에 보고해 올리던 문서)에 근거해 세입을 확보하였는데, 여기에는 매년 재해로 조세를 상납할 수 없는 토지결수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매년 양안에 실린 토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결수에 세금을 부과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지방 수령과 향리는 자체적으로 경비로 쓸 잡다한 명목의 세를 토지에 부과하는 한편, 중간에 사적으로 탈취한 세를 보충하기 위해 법정 세율보다 높게 토지세를 거두었다. 이를 도결(都結)이라 한다. 19세기 토지에 부과된 중앙의 세입이 줄어드는 가운데, 지방의 농민들은 도결과 같은 중간수탈을 자행하는 수령과 아전의 탐학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군정에 있어서도 문제가 지속되었다. 조선후기 군역 문제는 조정의 큰 골칫거리였는데, 영조 대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군포 상납 부담이 절반으로 줄어들기는 했지만, 군영 입장에서는 균역청으로부터 급대 받지 못하는 군포 수입을 백골징포(白骨徵布), 황구첨정(黃口簽丁), 족징(族徵), 인징(隣徵) 등과 같은 불법적 방식으로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다산 정약용은 「애절양」을 지어 19세기 군정의 고질적인 폐단을 비판하였다.
여기에 18세기 후반부터 크게 늘어난 환곡(還穀)13)이 농민들을 착취하는 또 하나의 부세로 작동하고 있었다. 중앙정부는 재정 부족분을 만회하기 위해 지방에 각종 환곡을 신설하였다. 19세기 초 무렵에는 전국의 환곡이 천만 석에 달할 정도로 크게 증가하였으며, 환곡이 설치된 고을 백성들은 각자의 필요와 상관없이 토지 혹은 호 단위로 환곡을 분급 받고 가을에 이자곡과 함께 상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수령과 향리가 환곡을 불법적으로 운영하고 장부를 조작하여 곡식을 도둑질하는 등의 폐단이 야기되었다.
1862년(철종 13년) 대규모 농민봉기의 주원인으로 꼽히는, 삼정[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은 위와 같은 재정구조가 19세기 전반까지 장기화되어 야기된 문제였다. 이중 농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으로 여겨진 것은 단연 환곡이었다. 아래 기사는 진주안핵사 박규수(朴珪壽)가 임술농민봉기가 진주 일대를 규찰하고 중앙에 보고한 내용이다.

  • 12) 숙종 46년(1720)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을 일컫는다.
  • 13) 조선시대 국가가 백성들에게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일정비율의 이자곡과 함께 빌려준 곡식을 거두었던 제도.

<실록사료3> 진주 안핵사 박규수(朴珪壽)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난민(亂民)들이 스스로 죄에 빠진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삼정(三政)이 모두 문란해진 것에 불과한데, 살을 베어내고 뼈를 깎는 것 같은 고통은 환향(還餉)이 제일 큰 일입니다. 진주(晋州)의 허포(虛逋)에 대해서는 이미 사계(査啓)에서 전적으로 논하였고, 단성현(丹城縣)은 호수(戶數)가 수천에 불과하지만 환향(還餉)의 각곡(各穀)이 9만 9천여 석(石)이고, 적량진은 호수가 1백에 불과하지만 환향의 각곡이 10만 8천 9백여 석인데, 이를 보충시킬 방도는 모두 정도를 어기고 사리를 해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조가(朝家)에서 탕감시키는 은전(恩典)을 또 어떻게 계문하는 대로 번번이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병폐를 받는 것은 우리 백성들뿐입니다. 마땅히 이런 때에 미쳐서는 특별히 하나의 국(局)을 설치하고, 적임자를 잘 선발하여 위임시켜 조리(條理)를 상세히 갖추게 하되, 혹은 전의 것을 따라 수식(修飾)하기도 하고 혹은 옛것을 본받아 증손(增損)시키기도 하면서 윤색(潤色)하여 두루 상세히 갖추게 한 후에 이를 먼저 한 도에다가 시험하여 보고 차례로 통행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고도 폐단이 제거되지 않고 백성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은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철종실록』 권14, 1862년(철종 13년) 5월 22일(계묘), 네 번째 기사

기사에서 박규수는 난민들이 민란을 일으킨 것은 삼정이 문란해졌기 때문이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환향(還餉) 즉 환곡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박규수는 진주에서 운영하는 환곡 중 장부 상에만 있고 실제 원곡 혹은 이자곡이 존재하지 않는 포흠[虛逋]에 대해 조사하여 먼저 중앙에 보고하였다. 이어서 단성과 경상 우병영에 속해 있던 적량진의 문제를 환다민소(還多民少)14)로 규정하고 조사한 바를 중앙에 아뢰었다. 이를 바탕으로 민란의 배경이 되는 삼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기구를 별도로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박규수의 보고를 바탕으로 중앙정부는 당해 5월 임술농민봉기의 주동자를 처벌하는 한편, 삼정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을 설치하였다.
삼정이정청에서는 각 지역 농민들의 요구를 수렴하여 당해 8월 삼정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절목(節目)을 반포하였다. 절목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전정에 있어서는 양전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도결과 각종 부가세를 폐단을 혁파하는 내용이 담겼다. 군정에 있어서는 각 읍의 군총(軍摠)15)을 고르게 파악하여 불법 징수를 엄금하는 한편, 마을민이 공동으로 군포를 바치는 동포제(洞布制)가 채택되었다. 환정의 경우 환곡을 혁파하고 대신 토지세를 거두는 파환귀결(罷還歸結)의 원칙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환곡에 대한 재정의존도가 컸던 지방관청의 반발로 파환귀결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1862년 농민봉기를 통해 중앙정치의 경직성과 부세제도의 문란과 같은 사회 구조적 모순이 표출되었다. 그러나 삼정이정청을 통해 중앙정부가 내놓은 개선방안은 농민들의 요구에 부응할 만한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하였다. 정부의 이 같은 미온적인 대처로 농민항쟁의 열기는 고종 대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 14) 환곡을 분급할 호수는 적은데, 환곡량은 과다한 상황.
  • 15) 조선시대 부대별 정원 규정에 의한 군사의 총 수.
참고문헌 내용펼쳐보기
  • 송양섭, 「임술민란기 부세문제 인식과 三政改革의 방향」, 『한국사학보』 49, 2012.
  • 송찬섭, 「1862년 三政釐整廳의 구성과 삼정이정책」, 『한국사학보』 49, 2012.
  • 안병욱, 「19세기 壬戌民亂에 있어서의 ‘鄕會’와 ‘饒戶’」, 『한국사론』 14, 1986.
  • 전병철, 「1862년 丹城抗爭의 원인과 金麟燮의 사회적 실천 자각」, 『남도문화연구』 39, 2020.
  • 정진영, 「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 在村 兩班地主家의 농업경영 - 경상도 단성 金麟燮家의 家作地 경영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62, 2008.

(집필자 : 최주희,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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