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위기상황에 대비하여 국가의 중요 기록을 여러 지역에 분산하여 보관하도록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중요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수도 한양에 내사고(內史庫)인 춘추관사고를 두고, 지방에 외사고(外史庫)를 따로 설치하였습니다. 이러한 운영방식은 고려시대 북방의 침략에 대비하여 실록의 복본을 해인사에 보관한 이후 이어져 왔습니다.
사고보관 시 실록의 봉안 모습(재현)
실록의 간행이 완료되면 관례에 따라 봉안식(奉安式)을 거친 뒤 길일을 정하여 춘추관본과 외사고본 총 5부를 춘추관에 함께 봉안하였습니다. 이후 세초(洗草)와 세초연(洗草宴)을 시행한 뒤 다시 적당한 시기에 4곳의 외사고에 봉안할 길일을 정했습니다.1)
봉안을 위해 실록함(實錄函)은 견고한 재질의 활엽수인 피나무 등으로 제작하여,2) 천궁(川芎)과 창포(菖蒲)라는 약재를 함께 보관하였는데 천궁은 해충을 쫓아주는 역할을 하고, 창포는 방균과 방향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봉안의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궁과 창포를 면포에 담아 실록함 바닥에 두고, 한지로 덮어둔 다음, 습기를 막기 위해 기름을 먹인 종이에 실록을 감싸고, 다시 붉은 비단으로 포장합니다. 포장된 실록 위에 한지를 덮은 후에 마지막으로 천궁과 창포를 두면서 마무리한 다음, 함을 봉인하고 사고에 봉안하였습니다.
외사고는 실록을 보관하는 실록각(實錄閣)과 왕실의 보첩을 보관하는 선원각(璿源閣), 그 외에 부속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실록각은 서가에 책을 꽂아두는 일반 서고와는 다르게 실록의 비밀보장과 영구적인 보존에 초점을 두어 관련 자료를 모두 궤에 담아 보관하였습니다.3)
실록을 외사고로 봉안한 뒤에는 정기적으로 사관을 파견하여 실록의 상태와 사고의 주변을 잘 살피도록 하였습니다. 사고는 아무도 열람할 수 없도록 엄격히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고 건물을 수리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지방관에게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사관은 실록을 잘 보존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2~3년마다 정기적으로 햇볕이 잘 드는 음력 9~10월 중 선택한 날에 방문하였습니다. 봉안된 실록을 꺼내 포쇄(曝曬)4)와 거풍(擧風)5)을 해주고, 약재를 새것으로 바꿔주며, 실록의 상태도 확인하였습니다.6) 왕의 기록이자 조선의 역사를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록의 보존 상태 유지 외에도 사고 자체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중앙 정부에서 외떨어진 외사고의 특성상 모든 사고를 중앙에서 지키기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고 수호를 위해 인근 거주자 중 유학을 공부한 사족 출신 참봉 2명을 임명하여 교대로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수호 사찰을 지정하고 승려들로 하여금 수호군(守護軍)을 조직하여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별도의 수호군을 차출하여 참봉 및 승려들과 함께 사고를 지키도록 하였습니다.7)
조선 초기 실록은 춘추관(한양)과 충주 2곳의 사고에 나누어 봉안되다가 1445년(세종 27년)에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4곳의 사고에 나누어 보관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하나의 실록만 남게 되었으며,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태조실록』~『명종실록』)을 바탕으로 4부를 제작하였습니다. 전쟁이라는 위기상황에서 접근성이 쉬운 이유로 실록이 불에 타서 사라지는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새로 제작된 실록은 깊은 산 속에 분산 보존하였습니다. 전주사고본은 강화도(마니산)에 봉안하고 새롭게 편찬된 4개의 실록은 춘추관을 비롯하여, 묘향산(평안북도 영변군), 오대산(강원도 평창군), 태백산(경상북도 봉화군)에 봉안되었습니다.
5곳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던 실록 중 춘추관사고본은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일부 소실되고, 강화사고의 실록도 병자호란 당시 일부 훼손되었습니다.
인조 대인 1623~49년 이후 강화와 묘향산의 실록을 각각 정족산(인천광역시 강화군)과 적상산(전라북도 무주)으로 옮겨, 조선 후기 사고는 춘추관을 비롯하여 태백산, 정족산, 적상산, 오대산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나라에서 운영하던 사고는 모두 폐지되고, 왕실 사료들을 비롯하여 사고에 있던 실록도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었습니다.
정족산사고본은 이왕직11) 장서각으로, 오대산사고본은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반출되고, 태백산사고본과 정족산사고본은 조선총독부에서 관리하다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이후 일제에 의해 유출되었던 오대산사고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일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적상산사고본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북한에서 보존 중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12) 춘추관사고본은 사료상 정확한 흔적이 확인되지 않습니다.13)
현재 조선왕조실록은 2019년 기준으로 낙질본(落帙本) 및 산엽본(散葉本)14), 봉모당본(奉謨堂本)15)을 포함하여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정족산사고본은 임진왜란(1592년) 이후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을 포함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정족산사고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임진왜란 이후(1603년) 제작된 실록입니다. 태백산사고본은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에서 보존하고 있으며, 오대산사고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습니다. 이 외에 적상산사고본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있고, 낙질본 및 산엽본과 봉모당본은 각각 규장각과 장서각에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보존하고 있는 실록 중 태조부터 철종까지 완전한 한질로 남아있는 것은 정족산사고본과 태백산사고본입니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태백산 사고의 모습16)
태백산사고(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산 126-5번지)는 임진왜란 직후인 1606년(선조 39년)에 만들어져 1910년 초까지 존속되었습니다. 1931년 조선총독부『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린 사고의 옛 모습을 보면 선원각과 실록각이 한 담장 안에 다른 동으로 좌우에 세워져 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고 건물은 1945년 해방 전후 방화로 인해 붕괴되어 완전히 모습을 잃었습니다.
태백산사고지의 발굴은 1988년 봉화군에서 대구대학교 박물관을 조사기관으로 하여 추진되었습니다. 당시 전국에 10여 군데에 남아있던 사고지 중 어느 한 곳이라도 발굴 조사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17)
사고지는 수호 사찰인 각화사(覺華寺)에서 약 3km, 도보 1시간 거리에 위치하였습니다. 발굴 전의 사고지를 보면,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그 주변은 잣나무와 잡목으로 숲을 이루고 있었고, 무너진 석축과 기와의 파편들, 석조물, 우물터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태백산사고지의 발굴 전 모습18)
태백산사고지 발굴조사는 사고지의 복원 및 정비를 위하여 실시되었는데 첫째, 문화 유적지인 사고지 내 건물의 정확한 위치와 남겨진 유구(遺構)19)를 확인하는 것, 둘째, 사고지 주변을 정비하고 보존 대책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각 사고지 내의 실록각과 선원각 등 건물의 위치 확인, 건물지의 주초석·기초석의 노출, 조사 보고서 발간 등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또한 발굴지 정비, 성토 및 잔디 심기, 보호책 설치, 사고지 유래 안내판 설치 등도 계획하였습니다.20)
본격적인 발굴은 1988년 8월 10일부터 9월 20일까지 실시되었습니다. 1988년 9월 발굴조사 중간보고에 의하면, 사고지는 축대가 무너지고 사방에서 흘러들어온 토사로 인하여 심하게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발굴의 진행과정을 보면, 먼저 벌목작업을 실시한 후 발굴예정지를 크게 4지구(A, B, C, D)로 나누었습니다. 원래의 축대 자리를 확인하여 그 아래로 굴러 떨어진 돌들을 원위치에 쌓아 올리는 등 발굴조사와 정비를 병행하였습니다. 발굴지에는 수많은 기와 파편들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모든 파편을 따로 수집하여 분류하였습니다. 선원각 자리에 주로 깔려있던 화문(花紋)과 명문(銘文)이 새겨진 전돌도 수습하였습니다.
태백산사고지 발굴 전경21)
발굴조사가 완료된 후 문헌이나 사진에서밖에 확인할 수 없었던 사고지의 규모를 보다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실록각이 무너지며 담장 아래로 붕괴된 자리에서 발견된 다수의 목재들이 있었는데, 그 크기가 장대하여 사고건물이 웅장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고지 내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크게 실록각지, 선원각지, 근천관지(近天館址), 포쇄각지(暴曬閣址), 기타 건물지였습니다.22) 발굴 후 실록각 자리 사방에 잡석으로 조성한 낮은 기단(基壇)과 자연석으로 된 초석(礎石)이 그대로 노출됨으로써, 실록각의 규모를 보다 정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원각 자리에는 조선 후기 건축에서 주로 보이는 벽돌 사용방식을 쓴 것을 확인하였습니다.23)
태백산사고지 발굴조사 출토유물24)
1988년 10월 제출된 발굴조사 출토유물 목록에는 기와류 52점, 벽돌류 13점, 철제품 34점, 자기 3점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기와는 수키와와 암기와들이 대다수였고, 철제품들은 목재 건물의 철못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였습니다.25) 발굴조사의 종합적인 내용은 그 해 12월,『태백산사고지 발굴조사보고서』로 발간되었습니다.
태백산사고지의 발굴조사는 조선시대 사고지 중 처음으로 진행된 발굴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사고의 건축 양식을 확인하고, 방치되어 오랜 기간 훼손된 사고의 본 모습을 재현할 실마리를 얻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조사로 볼 수 있습니다. 태백산사고지는 1991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348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