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삼사(三司)는 사간원(司諫院)·사헌부(司憲府)·홍문관(弘文館)을 합해 부르는 명칭으로, 언론기관 계열의 세 관청이라는 의미이다. 성종 대 이전까지만 해도 삼사라 할 경우에는 언론 삼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관청 3곳을 묶어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성종 대 홍문관이 설립되면서부터 삼사는 언론 삼사를 의미하게 되었다. 홍문관은 본래 언론기관은 아니었으나 홍문관이 언론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사간원·사헌부와 연대해 활동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삼사라 하면 으레 언론 삼사를 의미하게 되었다. 언론 삼사로서의 삼사라는 용어는 대략 성종 대 그 기초가 닦아지기 시작해 선조 대에 이르면 일상적으로 통용되기에 이른다.
언론 삼사 가운데 사간원과 사헌부는 전형적인 언론기관이라 할 수 있다. 사헌부는 고려시대 어사대의 후신이라 할 수 있다. 사간원의 경우 중서문하성의 낭사에 연원을 두고 있는데, 태종 대 관제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별도의 관서로 독립되었다. 이후 사헌부와 사간원은 보통 양사(兩司) 혹은 대간(臺諫)으로 지칭되며 언론기관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양사라 할 때의 양사는 두 개의 관사라는 의미이다. 이에 비해 대간의 경우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의 앞 글자를 따서 붙인 명칭인데, 대관은 관료에 대한 감찰 기능을 주된 업무로, 간관은 군주에 대한 간쟁을 주 업무로 삼고 있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의 경우 대관과 간관 모두가 군주와 관료에 대한 간쟁과 탄핵을 업무로 삼고 있었다.
<실록사료1> 신 등은 생각건대, 대간은 풍속과 사회 기강을 맡은 관사이고 형조는 법을 집행하는 기관입니다.
『태종실록』권2, 1401년(태종 1년) 10월 27일(임오), 첫 번째 기사
위 기사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사헌부와 사간원은 풍기를 관장하는 관사로 인식되고 있다. 이때 풍기를 맡는다 함은 조정 및 민간의 기강 유지를 위해 활동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이 두 관사에서는 조정 관료들은 물론 일반 백성에 대해서도 유교적 규범을 잘 지키는지를 감시하고 문제점이 발견될 경우 탄핵해 처벌받도록 하는 업무를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문관은 성종 9년에 설립되었다. 사실 홍문관은 집현전의 후신이었다. 세종 4년 설립된 집현전은 단종 2년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세조에 의해 혁파된다. 그 뒤 집현전의 기능은 예문관에 이관되어 다소 변칙적으로 운영되었는데, 성종의 즉위 이후 예문관에 집현전의 직제가 복구되어 갔고, 급기야 홍문관의 이름으로 재설치 되기에 이른다.
홍문관의 주된 기능은 경연(慶筵)1)을 담당하고 왕명을 제작하며 국왕의 고문에 대비하는 일들이었다. 주로 문한(文翰)2)과 관련한 업무에서 시종신(侍從臣)3)의 자격을 가지고 왕을 보필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하지만 홍문관은 국정 현안과 관련해 마치 대간처럼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국왕과 대신들은 홍문관의 언론 행사에 대해 불편해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결국 홍문관 또한 언관으로서의 자격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 결과 언론 삼사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삼사는 공론을 주재하는 언론기관으로서의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다시피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나라이다. 왕도정치의 추구 속에 덕치와 인정이 베풀어지는 왕정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적인 군주정을 이루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군주가 언론을 너그럽게 수용한다는 ‘납간(納諫)’이라는 미덕이었다. 왕은 백성들의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인다는 입장이라 할 수 있는데, ‘천하는 군주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라 천하 만민의 천하이다’라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입장에서, 군주의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정치 운영을 지양하고, 공론을 통해 정치를 운영한다는 지향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공론과 납간을 중시하는 왕정에서 백성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기관이 바로 사헌부와 사간원 같은 언론기관이었다. 따라서 대간에서 군주에게 올리는 간언은 단순한 사적인 견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필연적으로 민의(民議)와 신료들의 정당한 논의를 대변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천하만민의 공론을 전달하는 것이 언론기관의 기본 임무였다. 따라서 대간의 언론은 언제나 공론이어야 했고 국왕은 공론으로서의 대간의 언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이었다.
<실록사료2> 사신은 논한다. 공론은 비록 삼사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 형세가 혹 막히면 반드시 대신이 일어나서 아울러 보고를 올리고 나서야 임금이 그 말을 믿고 사람들이 의지하는 바가 있어서 공론이 크게 행해지게 되는 것이다.
『명종실록』 권31, 1565년(명종 20년) 1월 13일(신해), 첫 번째 기사
위 기사는 대간뿐만 아니라 홍문관을 포함한 언론 삼사가 공론의 주체임을 언급하고 있는 기사이다. 이처럼 대간과 홍문관의 언론은 기본적으로 공론으로 인정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대간에서 안건을 한 번 발의하면 그것이 수용될 때까지 고집스럽게 주장하곤 했다. 또한 그러한 삼사의 공론이 막힐 경우엔 대신이 직접 군주에게 삼사에서 아뢴 공론을 전달해 결과적으로 공론이 통용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인식되고 있었다.
삼사는 언론기관으로서 각종 현안에 서로 보조를 맞추며 공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삼사 각각의 위상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삼사 가운데서는 홍문관의 위상이 가장 높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홍문관이 배후에서 사간원과 사헌부의 언론을 이끌어가는 양상이 굳어지게 된다. 대간이 민감한 사안에 적극적으로 언론을 제기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거나, 혹은 권력의 눈치를 보며 발언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 방식으로 대간의 언론을 관리하고 있었다.
홍문관이 사헌부와 사간원에 비해 위상이 높을 수 있었던 이유는 관료 조직 내에서 홍문관의 위상이 양사에 비해 높았기 때문이다. 홍문관은 양사에 비해 관직 수와 각종 특혜들이 많았다. 양사 자체도 엘리트 관료들의 관직을 의미하는 청요직으로 분류되는 부서였지만, 홍문관은 양사보다도 훨씬 더 많은 특혜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홍문관원의 선발은 ‘홍문록’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홍문록은 일종의 자천제(自薦制)4)적 특징을 갖는 것으로 홍문관원들 스스로가 투표를 통해 홍문관 후보생 명단을 작성한 것이 홍문록이었다. 물론 홍문록에 선발된 사람 모두가 홍문관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홍문록이 선배 홍문관원들의 평가에 기초해 작성되고 있었던 만큼 일차적으로 홍문록에 선발된다는 것은 문장과 학식은 물론 동료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다는 것을 의미했던 만큼 그 자체로 명예가 아닐 수 없었다.
홍문관원은 차차천전(次次遷轉)이라는 승진 방식이 적용되었다. 차차천전이란 근무 일수와 근무 평가 점수에 구애받지 않고 상위직에 결원이 생길 경우 자동으로 승진하는 것을 말한다. 차차천전을 적용받던 홍문관원들은 다른 관료들에 비해 승진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홍문관원은 경연을 주재하면서 군주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잦았으며, 문한과 관련한 시종신이라는 위상을 부여받고 있었다. 군주 곁에서 문한으로 군주를 보필하는 시종신이라는 위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홍문관원은 홍문록에 기초하여 선발되고, ‘차차천전’과 ‘군주를 자주 만날 수 있는 특권’을 갖는 동시에, 사간원과 사헌부에 자유롭게 배치될 수 있었던 반면, 양사의 관원은 홍문록에 오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삼사 사이에는 자연히 홍문관을 중심으로 위계가 생기게 되었다. 홍문관이 양사에 비해 위상이 높아지는 과정에서 홍문관과 대간 사이에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관료조직 구조상 홍문관이 보다 우월한 입장에서 대간 위에 위치하기에 이른다.
한편 대간은 공론을 전달하는 책임을 갖고 있었고, 대간에서 일단 발의된 의견은 공론이기에 반드시 수용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홍문관 역시 언론기관의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대간의 언론이 관철될 수 있도록 도왔다. 따라서 대간의 언론이 활발해질수록 삼사와 군주, 그리고 삼사와 대신 간의 갈등이 필연적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실록사료3> 전교하기를, "만약 대간에게 끌려서 대간이 옳다 하면 따라 옳다 하고 대간이 그르다 하면 따라 그르다 하여, 오직 대간의 의사만을 따른다면 권세가 대간에 돌아가서 국가의 위태로움이 기약 없이 저절로 이를 것이니, 대간의 말에 이끌리지 않고 거리를 두는 것이 마침내 정의일 것이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권29, 1498년(연산 4년) 2월 11일(정축), 첫 번째 기사
위 기사는 무오사화(戊午士禍)5) 이전 연산군과 삼사의 갈등이 커가는 과정에서 연산군이 대간을 향해 내뱉은 말이다. 대간의 말에 따라 시비가 결정되는 것이 옳지 않으며 그럴 경우 권력이 대간에게 돌아가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연산군의 주장이다. 비록 홍문관에 대한 언급은 빠져 있지만 이미 대간이 홍문관의 영향력 가운데 있게 된 상황에서 권력이 대간에게 돌아간다는 말은 권력이 홍문관으로 대표되는 삼사에게 돌아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언론 삼사는 성종 대 이후 긴밀한 연대를 추진하면서 적극적인 언론 활동을 펼쳤고, 삼사의 이름으로 국왕과 대신에 맞서며 그 위상을 이전에 비해 대폭 확장시켜 나갔으며, 급기야 군주로부터 권력이 대간으로 돌아갔다는 비판을 받기에 이를 정도로 그 위상이 크게 확대되었던 것이다.
국사교과서에서 사림이라는 개념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낙향한 온건개혁파 사대부의 제자 혹은 그 후예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성리학 사상에 전념하며 향촌 자치를 추구하다가 성종 대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한 인사들이다. 그리고 조정에 진출한 지방 출신 사림들은 언론 삼사에 포진해 훈구세력과 대립하며 국왕권 강화에 일조했다고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사림에 대한 이같이 명확한 개념 정의에 비해, 실록에서 등장하는 사림이라는 용어는 다소 모호하게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과서 설명처럼 고려 말 온건개혁파의 후예로서 중앙정계에 등장한 일군의 개혁적 정치세력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에 어려울 때가 많다.
<실록사료1> 대사간 유세침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중략) 성종께서 20여 년 배양한 선비들이 잇달아 저자에서 주륙을 당하여 하루에도 10명이나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림(士林)이 기운이 손상되어 말하기를 싫어하였으므로, 수십 년 동안에는 반드시 바른말 하는 선비가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너그러이 용납하고 아껴주는 마음으로 말하는 자를 인도하기를 전대의 임금보다 10배로 하지 아니하시면, 위험을 무릅쓰고 정당한 언론을 행하는 이가 결국 전하의 곁에 이르지 아니할 터인데, 어찌하여 대간을 가리켜 군주의 말을 거역한다거나, 이기기를 힘쓴다거나, 군주를 기망한다는 말씀을 계속 내리십니까?
『중종실록』 권7, 1508년(중종 3년) 11월 22일(병진), 두 번째 기사
위 기사는 중종 3년 사간원에서 올린 상소로 연산군이 사류를 주륙해 사림의 기운이 손상되어 당분간 현안에 대해 시비를 분간할 사람이 없게 되었으므로, 임금은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연산군의 폭정이 사림의 사기를 손상시켜 제대로 된 언론이 제기되기 힘들어졌으니 군주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언론을 너그러이 용납해 주어야지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사림’이란 ‘정당한 언론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도덕적 권위에 기대어 국정에 대해 올바른 말을 전달해 국왕으로 하여금 바른 정치를 지향하도록 하는 ‘가상의 도덕적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사림이라는 용어는 도덕적 평가를 주도하는 가상의 집단으로 설정되는 한편, 공론을 전달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실록사료2> 그 의논에 또 ‘중대한 일을 일으킬 때에는 큰 의리를 따라야 하고 잡의(雜議)는 돌볼 것이 못된다.’ 하였는데, 이른바 잡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신들은 모르겠으나, 신들의 말이 현실적이지 않다 하여 잡의라고 지칭하였을 것입니다. 작은 이익을 큰 의리라 하고 정론을 잡의라 하며, 조그만 공이 성취되기만을 바라고 뒤에 생길 해독이 멀리 갈 것은 돌보지 않으며, 위로 성상의 원대한 염려를 막고 아래로 사림의 공정한 논의를 물리치니, 대신이 나라를 근심하는 뜻이 어디에 있으며, 만세의 해독을 막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에 말세의 역사를 읽을 때, 그 대신으로서 스스로 욕심을 갖고 자기만 착하다 하며 남의 말은 돌볼 것이 못 된다고 하는 자를 보면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였는데, 어찌 지금의 대신이 이런 말을 전하께 올릴 줄 생각하였겠습니까.
『중종실록』 권83, 1537년(중종 32년) 2월 4일(계축), 첫 번째 기사
위 기사는 명종 대 유생들이 숭불정책의 폐지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유생들의 불교 비판 논의를 대신들이 잡의로 폄하했다며 그 부당함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대신들의 이 같은 행태는 결국 사림의 공론을 배척하는 것으로서, 대신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유생들은 ‘사림’을 공론을 생성하고 통용시키는 주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라 할지라도 사림의 공론을 너그러이 수용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대신이라는 자들이 사림의 공론을 잡스러운 의론이라고 간주하며 배척하는 어리석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유생들이 자신들의 의론을 공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과, 그런 측면에서 자신들도 사림이라고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림이라는 용어가 특정 세력을 지칭하기 보다는 공론과의 연계 속에서 그 자격이 규정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사림이 삼사 언론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는 가상의 도덕적 집단이자 공론을 전달하는 주체로 상정되는 가운데, 사림이 삼사 혹은 청요직과 등치되기도 했다.
<실록사료3> 사신은 논한다. 이 의논이 매우 올바른 것인데, 좌우의 의논이 분분하여 서로 시비를 다투고, 나중에는 양시 양비(兩是兩非)의 말이 나와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고 사림이 반목하여, 그 화의 실마리 됨이 비통하였다.
『중종실록』 권22, 1515년(중종 10년) 8월 8일(임술), 첫 번째 기사
위 사료는 삼사를 포함한 청요직 일원을 사림으로 이해하는 기사이다. 중종 10년 장경왕후의 사망으로 박상과 김정이 신씨복위상소6)를 올렸을 때 대간에서 박상과 김정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청요직들 사이에서는 대간의 처벌 주장이 정당하다는 입장과 과도하다는 입장으로 나뉘는 가운데, 처벌 측과 반대 측 모두 일리가 있다는 양시론까지 제기되며 분란이 심화되었다. 사관은 이를 가리켜 ‘사림이 반목’했다고 표현했다. 청요직 사이의 의견 분열을 사림의 반목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때의 사림 역시 언론 삼사를 포함한 청요직들을 지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종 대에 이르게 되면 언론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사림이라는 존재가 적극적으로 부상되고, 동시에 사림이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그러면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것은 성종 대 들어서며 관료조직 내 권력관계의 변화와 그에 따른 권력구조의 변동에서 기인한다. 성종 대 이후의 시기는 관료조직 내에서 청요직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가운데 언론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언론 삼사가 공론의 권위에 기대어 국왕 및 대신들과 대립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켜 나갔던 시대였다. 사림은 바로 그 같은 상황에서 삼사로 대표되는 청요직 언론을 뒷받침해 주는 가상의 도덕적 집단으로 상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림은 정당한 언론과 공론의 대변자 집단으로 상상되면서 삼사 언론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배후 집단으로 빈번하게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연산군의 폭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두 번의 사화(무오사화・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청요직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언론이 국왕권을 크게 제약하자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해 언론의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아울러 폐비 윤씨 문제를 처리하며 왕권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갑자사화7)가 일어났다. 두 번의 사화를 거치며 삼사를 위시한 청요직들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연산군의 폭정은 결국 중종반정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청요직들의 영향력은 다시 확대되었고, 언론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조광조를 위시한 일군의 청요직 인사들은 지치(至治)라는 기치 하에서 군주를 압박하며 소격서 폐지나 위훈삭제와 같은 급진적인 정책들을 추진했다. 이에 조광조 세력의 압박에 힘겨워하던 중종은 일부 대신들과 협력해 조광조 일파를 조정에서 축출했다. 소위 기묘사화라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연산군 대 이래 사화가 거듭해 일어나게 됨에 따라 사림이라는 용어는 도덕적 포폄(褒貶)8)을 가하는 가상의 집단이라는 의미에 더해 정당한 언론을 행사하다가 혹은 도학정치를 추구하다가 간신들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부가되었다.
<실록사료4> 대체로 기묘사림의 화가 한 번 일어난 뒤로는 권간(權奸)이 서로 뒤를 이어 정권을 잡고 서로 중상하였는데 이항도 역시 그 괴수였다.
『중종실록』 권95, 1541년(중종 36년) 6월 7일(임술), 첫 번째 기사
위 기사는 이항이라는 사람에 대해 사관이 비난하는 내용으로 조광조 등이 축출된 기묘사림의 화가 일어난 뒤로 권간(權奸)9)이 연이어 일어나 정치가 혼란스러워졌는데 이항 역시 그 같은 권간 중에 하나라는 내용이다.
이제 사림이라는 용어는 가상의 도덕적 집단이라는 의미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조광조와 같이 개혁을 추진하다가 희생을 당한 인사들이라는 의미로 확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전히 사림은 도덕적 포폄을 주재하는 가상의 집단을 의미했지만, 사화를 거치며 사화에 희생된 인사들이 사림의 표상으로 추앙되면서 실체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명종 대 을사사화10)를 끝으로 훈척들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다가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훈척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다. 이에 삼사 언론과 청요직들의 위상이 보다 확대되었고, 도덕적 가상 집단으로서의 사림의 권위에 빗대어 주장하는 바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경향 역시 더욱 강화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삼사와 청요직 인사들은 물론 재야에서 포의(布衣)11)로 지내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스스로를 도덕적 지향을 가진 사림으로 자처하며 유소(儒疏)12)와 같은 언론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제 조선 사회는 모두가 스스로를 공론을 전달할 자격을 가진 사림의 일원으로 자처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라는 유교왕정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대간(언론기관)을 설치하고 언관들로 하여금 백성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국정에 대한 시시비비를 따지도록 허락했다. 대간을 소위 ‘언책지관(言責之官)’, 즉 언론의 책임을 맡은 관서로 설정하고 국왕 및 대신과 함께 시비 논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던 것이다.
따라서 언론에 대한 책임(언책 言責)을 맡고 있던 대간은 그 설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왕에게 공론(公論)을 전달해야 하는 책임을 갖게 되었다. 일체의 사적인 의견을 배제하고 공평(公平)·공정(公正)·천리(天理)가 담겨진 공론만을 전달하는 것이 대간을 설치한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전제들 속에서 대간은 으레 ‘공론의 소재처’로서 간주되었고, 대간의 언론 역시 ‘공론’으로서의 위상을 부여받고 있었다.
<실록사료1> 대간(臺諫)이라는 것은 조정의 공론(公論)을 맡고 있는 곳이다. 임금은 구중의 높은 곳에 있고 억만 사람의 위에 있으므로, 그 높음을 해와 달에 비할 것이 아니며, 그 위엄은 천둥과 벼락에 비할 뿐만이 아니다. 그런데도 천안(天顔)에 항거하고 용린(龍鱗)을 거스르는 일은 오직 대간만이 그것을 할 수 있으며, 금문(金門)을 밀어 열고 옥지(玉墀)에서 부르짖으며 호소하는 일도 오직 대간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의 좌우에 서서 임금과 더불어 옳고 그름을 다투어 임금이 옳다고 하면 대간은 옳지 않다고 하며, 임금이 옳지 않다고 하면 대간은 옳다고 하여 위엄을 무릅쓰고 범하면서 피하지 아니하며, 강경하여 굽히지 아니하며, 비록 머리가 부서질지라도 사양하지 아니하는데, 어찌 형벌을 피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옷자락을 잡고 간한 일을 되풀이할 수 있으니, 난함(欄檻)이 부러지는 일만 어찌 홀로 아름답겠는가? 이런 경우는 비록 비궁(匪躬)이라고 하더라도 가하다.
『성종실록』 권161, 1483년(성종 14년) 12월 7일(병인), 첫 번째 기사
위 기사는 성종 14년 서거정이 지은 「비궁당기」 가운데 대간의 책무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비궁당기」는 조정 주요 기관의 신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책임을 어떻게 다할 것인지를 논하는 글이다. 인용한 부분은 대간의 기본적인 책임과 그것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으로, 대간이 공론을 담당하는 기관임을 첫 구절에서 이미 밝히고 있다. 따라서 대간이 공론을 담당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만큼 임금의 역린을 건드려 그로 인해 형벌을 받게 되더라도, 끝까지 시비를 분간하며 적극적으로 간쟁하는 것이야말로 대간이 맡은 바의 임무를 다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공론에 기초해 군주와 시비를 다투며 치열하게 간쟁하는 것이 대간의 소임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처럼 군주가 대간에게 공론 전달의 역할을 부여한 만큼 대간에서 제기한 언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군주로서는 당연한 일이 된다. 심지어는 대간 언론에 오류가 있어 공론으로서의 위상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군주는 그것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이는 언로(言路)13)를 넓게 열기 위한 것으로서, 오류가 있는 대간 언론까지 너그러이 용납해 주어야 백성들의 상황에 대한 보고가 막히지 않고 군주에게 전달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조선시대에서 대간의 언론을 공론으로 인정해 주었던 이유는 대간의 주장이 무조건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왕정의 이상인 덕치와 인정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간 언론을 너그러이 용납해 주어야만 언관들이 위축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언론 활동을 펼칠 수 있고, 그럴 때 백성들의 고단한 상황을 시의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으며, 아울러 군주 주변에 있는 간신들에 대한 비판 또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간 언론의 공론으로서의 한계가 있다는 점이 인식되고 있었음에도, 도덕정치의 지향 속에서 그러한 한계를 용인해 주며 대간을 공론 소재처로, 대간 언론을 공론으로 적극적으로 인정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대간 언론이 공론으로 인정되고는 있었지만, 공론으로서의 대간 언론이 갖는 권위는 정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었다. 즉 국왕의 전제권력이 강하게 행사되는 상황에서는 공론으로서의 대간 언론의 권위는 온전한 위상을 갖기가 어려웠다. 조선 초 태종과 세조의 치하에서 공론은 군주의 정치적 입장을 합리화시키는 방편으로 활용되거나, 무시되기 일쑤였다.
<실록사료2> 김종련(金宗蓮)이《논어(論語)》를 강(講)하다가 말이 주자(朱子)의 태극(太極)의 설에 미치자, 김종련이 아뢰기를, "주자(朱子)의 말은 틀린 곳이 많이 있는데 신이 임금의 명령에 따라서 아뢰려고 했지마는, 천하의 공론(公論)이 두려워서 감히 비난하지는 못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틀린 곳이 있다고 말했으니, 어찌 공론을 두려워하겠는가? 또 공론이란 무엇을 이름인가?" 하니, 김종련이 대답하기를, "무릇 유자(儒者)에게는 모두 공론이 있게 마련인데 신이 젊었을 때부터 배운 바를 하루아침에 이를 저버린다면 유자들이 신을 비웃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유자들이 모두 공론이 있다면 조정의 대신들도 모두 유자인데, 그대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나라에는 권신(權臣)이 없는데, 그대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김종련이 대답하기를, "정자영(鄭自英)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도승지 신면(申㴐)에게 명하여 되풀이하면서 힐문하도록 하니, 김종련은 본디 겁쟁이어서 망령된 대답이 많았다. 임금께서는 김종련이 실제로 비난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할 말이 있는 것이라고 여겨, 장을 때려서 그 실정을 신문하려고, 마침내 의금부에 내리어 승지 어세공(魚世恭)에게 명하여 압슬형(壓膝刑)으로 이를 신문하도록 하였다.
『세조실록』 권39, 1466년(세조 12년) 8월 29일(무진), 첫 번째 기사
1466년(세조 12년) 예문관원 김종련은 세조와 함께 태극설(太極說)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이 때 자신은 주자(朱子)의 입장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천하의 공론’이 두려워 자신의 주장을 온전히 밝히지 못한다는 말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세조로부터 문초를 받게 되었다. 문초 과정에서 김종련은 ‘공론’이 무엇이냐는 세조의 질문에 ‘유자들의 공론’이라고 아뢰자, 세조는 감히 군주 앞에서 유자의 공론을 두려워해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는다며 역정을 내었다. 그런 다음 김종련을 의금부에 내려 압슬형을 가하며 신문하도록 했다.
김종련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왕권이 강력하게 행사되던 세조 치하에서는 공론의 권위가 여지없이 무시당하는 상황임을 볼 수 있다. 세조의 입장에서는 국왕인 자신 이외에 두려워할 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종련은 유자들 사이의 공론을 국왕보다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 세조로부터 진노를 샀던 것이다. 대간에게 공론을 전달하게 하는 역할을 부여했음에도 세조와 같이 전제권력을 행사하는 군주 앞에서는 그 같은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은 세조 사후 어린 성종이 즉위하고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신들 또한 하나둘 사망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크게 바뀌게 된다.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현실 정치 무대에서 도덕적 권위의 실제적 영향력이 확대되는 가운데, 왕권이 상대화되며 공론의 위상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에서 대간은 도덕적 권위의 명분하에 공론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전유해 나갔다. 그 결과 공론으로서의 대간 언론은 현실적인 힘을 배가시키며 대신과 국왕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여 갈 수 있었고, 급기야 국왕과 대신들은 대간과의 타협을 기본 전제로 삼으며 현안들을 처리하는 상황에 이른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권위에 기댄 대간 언론이 공론을 전유하는 가운데, 조정 전체가 공론의 권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실록사료3> 사헌부 대사헌 이경동(李瓊仝) 등이 상소하였다. (중략) 전하께서는 성덕이 하늘과 같고 신하들의 말을 들어 행하시며 간언을 따르는 아름다움이 천고에 뛰어나셨는데, 근일에 신들이 나라 사람들의 공론을 가지고 아뢰었으나, 전하께서는 재상의 의논을 따르고 들어주지 않으시니, 언로가 이로부터 막힐까 염려됩니다.
『성종실록』 권189, 1486년(성종 17년) 3월 14일(기미), 네 번째 기사
위 기사는 성종 17년 임사홍의 직첩(職牒)14) 환급과 관련해 사헌부에서 이를 반대하는 상소이다. 사헌부에서는 성종이 그동안 대간의 간언을 너그러이 용납해 준 모범적인 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공론을 전달했음에도 재상의 잘못된 의견을 수용했다며, 결국 성종의 이 같은 모습은 군주가 간언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언로가 막히게 될 것이라는 우려이다.
세조 대와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감히 인사권의 문제를 놓고 사헌부에서 성종의 처사를 비판하며 임사홍의 직첩 환급의 부당함에 대해 아뢰면서, 군주가 온 나라 사람의 공론을 수용하지 않으면 언로가 막히게 되고 결국 그 같은 군주의 통치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압박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공론은 국초부터 국가의 원기(元氣)로서 중시되면서 언론 기관에 공론 전달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었지만, 공론이 존중되는 정도에 있어서는 왕권의 강약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성종 대를 기점으로 이후의 전반적인 추세는 언론 삼사를 비롯해 이들의 모집단이라 할 수 있는 청요직의 영향력이 구조적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공론의 위상 또한 강화되어 갔다. 대간 언론이 공론으로 인정되고, 공론을 공론이게 하는 소이가 도덕적 권위의 차용과 직결되어 있던 상황에서, 삼사와 청요직 관료들이 긴밀한 공조체제를 형성하며 자신들의 언론을 도덕적 권위와 연동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왕권을 제약해 나갔던 것이다.
(집필자 : 송웅섭, 총신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