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부메뉴 바로가기 하단 사이트 정보 바로가기

'보리고개'를 넘어 증산의꿈을 이루다!'

1950년대 이전

·홈 > 시기별 정책과 특징 > 1950년대 이전 > 정부수립이후1950년대
  • 1952년 권농일 기념플래카드(1952), CET0064297(6-1)

    1952년 권농일
    기념플래카드
    (1952), CET0064297(6-1)

    원문보기

  • 윌리암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사절단 내한 관계자와 기념촬영, CET0043601(1-1)

    윌리암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사절단
    내한 관계자와
    기념촬영(1952),
    CET0043601(1-1)

    원문보기

  • 정운갑미곡증산경연수여식참석2(1956), CET0043615(3-1)

    정운갑미곡증산경연
    수여식참석2(1956),
    CET0043615(3-1)

    원문보기

  • 오재경 공보실장 코믹크스 국제연합식량농어기구 미관계자 접견담화1(1956), CET0043618(1-1)

    오재경 공보실장
    코믹크스
    국제연합식량농어기구
    미관계자 접견담화1
    (1956), CET0043618(1-1)

    원문보기

  • 각도 농사원장 최초회의1(1957), CET0043626(1-1)

    각도 농사원장 최초회의1
    (1957), CET0043626(1-1)

    원문보기

정부수립이후 1950년대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정부는 신생민국건설의 제1과업인 민생문제해결의 관건은 농업증산에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 대책의 일환으로 농업증산 3개년계획(1949~1951년)을 실시하였다. 정부는 쌀과 맥류 증산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증산 3개년계획을 수립하면서 식량과 의류의 자급자족 달성을 목표로 하였다.

미곡증산계획은 1951년 쌀 목표생산량을 기준연도(1946~1948년 평균)보다 51.5% 늘어난 1,960여만석으로 정하고, 개간․간척․경지정리를 통한 농지면적 확장과 지목변경․종자개량․ 경종법 개선․비료증시를 통해 단위 면적당 수량 증대를 도모하였다.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된 증산계획은 금비 및 화학비료 확보, 농민들의 증산의욕 고취, 기후 호조 등으로 기준연도에 비해 10% 이상 증수되긴 하였지만 계획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결국 증산시책은 실패하였다. 6.25전쟁이 끝난 1953~1955년의 쌀 생산은 연평균 214만톤으로 일제시대의 생산수준보다 낮았는데 이것을 그 당시의 논 면적 120만ha로 나누면 ha당 쌀 수확량은 1.8톤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미곡증산 3개년계획 및 실적

펼쳐보기

(단위 : (석), 톤, %)

기준연도 계획량(A) 생산실적(B) B/A×100
1949 (12,912,100)
  1,871,132
(16,641,700)
  2,411,841
2,121,656.5 88.0
1950 (12,912,100)
  1,871,132
(18,986,300)
  2,751,638
2,103,464.2 76.4
1951 (12,912,100)
  1,871,132
(19,613,900)
  2,842,594
1,634,292.1 57.5

자료 : 농림수산식품부《농림수산행정개관(1945-1965)》1966

맥류증산계획은 주로 경작면적 확장과 비료증산에 중점을 두어 1951년의 목표생산량을 기준연도보다 140% 늘어난 834만5천석으로 정하였다. 맥류도 미곡과 마찬가지로 1949년, 1950년에는 기준연도에 비해 생산이 늘어났으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6.25전쟁으로 이 계획은 실패하였다.

맥류증산 3개년계획 및 실적

펼쳐보기

(단위 : 석, %)

기준연도 계획량(A) 생산실적(B) B/A×100
1949 3,441,700 5,278,200 5,054,807 95.7
1950 3,441,700 6,327,700 5,223,254 82.5
1951 3,441,700 8,334,800 3,043,370 36.5

자료 : 농림수산식품부《농림수산행정개관(1945-1965)》1966

농업증산 3개년계획은 이처럼 6.25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으나, 정부는 전쟁 후 1953년에 농업증산 5개년계획을 다시 수립하여 시행하였다. 농업증산 5개년계획은 농업부문 단독으로 2차에 걸쳐 시행하였고(1차 1953~1957년, 2차 1958~1962년), 3차 농업증산 5개년계획부터는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추진하였다.

제1차 농업증산 5개년계획(1953~1957년)의 수립은 6.25전쟁으로 농업분야가 엄청난 피해를 입어 식량증산이 시급한 정책과제로 제기된 것에 배경이 있었다. 이 무렵 국제연합한국부흥단(UNKRA)의 ‘한국경제재건계획’ 일명 ‘네이산 보고서’에서는 한국경제의 부흥은 식량증산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으며, 이에 따라 정부는 UNKRA의 협조와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의 원조로 농업증산 5개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중 미곡증산계획에서는 간척과 관개개선에 의한 면적확장과 토지개량, 비료증시, 경종법 개선 및 품종개량, 병해충 방제에 의한 단수증가 등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증산목표는 제대로 달성되지 못하였다. 계획기간 중 벼 재배면적은 1,078,000ha에서 1,114,000ha로 36,000ha가 늘었고 쌀 생산량도 1957년에 1,574만 석으로 다소 늘었으나 당초 목표의 86% 수준에 불과하였다.

맥류증산계획은 답리작으로 매년 8,000ha씩 확대하고, 밭보리 파종을 매년 26,000ha씩 늘리는 동시에 합리적인 비료 사용으로 매년 5% 증산을 꾀하고, 경종개량도 아울러 실시하여 계획기간에 91.3%를 증수한 11,611,346석을 목표량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실제 맥류 수확량을 보면 1954년만 순조로운 날씨와 풍족한 강우량, 그리고 원만한 비료공급사정으로 계획량을 거의 달성(99.2%)하였을 뿐, 매년 수확량은 계획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고 1957년에는 61.4%에 불과하였다.

그 동안의 증산계획이 식량작물을 위주로 한 것이었다면, 제2차 농업증산 5개년계획(1958~1962년)은 곡물증산계획 이외에 채소·과일·특용작물·잠업증산계획과 이의 뒷받침을 위해 농업자재 공급계획도 입안하였다. 또한 학계와 연구분야의 전문가로 농업증산협의회를 구성하여 세부심의를 거치기도 하였다.

제2차 미곡증산5개년계획의 주요시책은 다음과 같다.

  1. ① 간척사업으로 경지 27,695ha을 확장하고 수리불안전답과 천수답 중 316,950ha를 관개 개선하도록 한다.
  2. ② 금비의 증시를 지양하고 퇴비와 녹비를 장려하며 산성토양 개량을 위해 석회·인산·칼리비료를 증시한다.
  3. ③ 원원종-원종-1,2차 채종답에서 생산한 우량종자를 일반농가에 교환하여 3년 1이 갱신제를 확립하고 선진국에서 우량품종을 도입 보급하는 종자개량사업을 추진한다.
  4. ④ 농사원의 교도사업을 통하여 냉해방지 건묘 육성을 위한 보온절충 못자리, 적기정조 소주밀식 등 영농기술의 적극 보급 이외에 병해충 방제의 철저, 영농자금의 적기 지원 등을 통해 생산기술을 향상시킨다.

이렇듯 1,2차에 걸쳐 추진된 농업증산계획은 경지면적의 확장과 비료증시, 종자개량, 경종법 개선을 통한 증산에 목표를 두었고 간척사업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계획기간 중에 맥류는 도별 장려품종 지정, 면적 확대, 비료 증시 등의 대책을 통해 대단히 큰 증산을 이루어 식량수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맥류 재배면적은 강력한 재배면적확대 시책에 힘입어 매년 10,000ha 내외씩 증가하여 1950년대 중반 평균 925,000ha에서 1962년에는 968,000ha까지 늘어났으며, 꾸준한 단수 증가에 힘입어 맥류 생산량은 1950년대 중반 평균 6,014,000석에서 1960년대 초에는 7,820,000석까지 증가하여 증산목표를 달성하였다.

한편 정부는 6.25전쟁 후 UNKRA와 FAO 등의 협조하에 재정적, 행정적 지원과 농업금융의 원활화를 위하여 행정체계를 개편하였다. 기존의 농사시험장을 폐지하고 중앙농업기술원으로 새로 발족시켰으며, 농림부에 농촌지도국을 두어 도→시․군→읍․면의 일반행정계통을 통한 농사지도도 병행하는 이원적인 농촌지도체제를 갖추었다.

농사교도법의 공포로 1957년에 발족한 농사원은 농민들에게 신기술을 보급하기 위해서 각종 전시포 사업을 전개하였다. 새 품종의 비교전시, 농작물에 대한 비교전시 등의 사업을 수행하면서 비료·토양검정 기자재·저울·분무기 등을 외국 원조로 들여와 배부하고 종자·비료·농약의 표본을 만들어 일선 지도기관에 제공하였다. 해를 거듭하면서 전시사업은 복합적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또한 UNKRA와 FAO 주도로 농업관련 연구․지도조직의 정비, 관계자의 해외훈련을 추진하는 등 선진기법의 획득에도 노력하였다. 1953년에는 농림․내무․문교․사회․보건부 등 5부 장관 명의의 지시로 농업교도위원회를 중앙부터 읍·면 단위까지 설치하여 농사지도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956년에는 미국 미네소타대학교의 농과대학장 메이시(Macy) 박사 일행이 2개월에 걸쳐 한국농업과 농촌을 시찰하고 일명 ‘메이시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농사시험연구 지도체제를 정착시키는 과학적인 기초가 되었다.

이와 같은 증산 노력의 결과, 1955년에는 쌀 2,054만석을 생산하여 처음으로 쌀 2,000만석 시대를 열었다. 맥류 및 밭작물의 생산량도 증가하였으나 풍흉의 기복이 심하였고 1955년부터 시작된 미국 잉여농산물의 도입과 신곡 출하시기의 경합 등으로 곡물가격이 불안정하여 농가경제의 침체는 계속되었다. 특히, 1950년대의 증산계획은 물가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농민들의 희생 위에 시행됨으로써 당초 계획대로 식량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 비료 즉시 분배에 관한 건 (1948), AA0000022(1)

    비료 즉시 분배에 관한 건
    (1948), AA0000022(1)

    원문보기

    설명보기

  • 농업증산 5개년계획 수립에 관한 건(1957), BA0084214(85-1)

    농업증산 5개년계획
    수립에 관한 건(1957),
    BA0084214(85-1)

    원문보기

    설명보기

  • 농사원직제(1957), AA0003481(1)

    농사원직제(1957),
    AA0003481(1)

    원문보기

    설명보기

  • 제435호 농사교도법 (1957), AA0002096(1)

    농사교도법
    (1957), AA0002096(1)

    원문보기

    설명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