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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세관

대한제국기 및 통감부시기의 의료체계

조선 및 대한제국에 서양의학이 도입된 사례는 조선후기의 실학자들 또는 종두(種痘) 보급의 선구자 지석영 등으로부터 그 연혁을 찾아볼 수 있으나, 정부차원에서 서양식 의료체계를 수용한 것은 1885년 4월에 설립된 광혜원(廣惠院)부터라고 할 수 있다. 광혜원은 설립되자마자, 같은 달 26일에 ‘중생을 구제하는 곳’이라는 뜻의 제중원(濟衆院)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는데,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는 기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서양의 새로운 의학을 도입하고 학습하기 위한 기관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후, 1894년의 갑오개혁은 근대적 의료위생 행정체계를 제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1894년 의정부의 8아문(衙門) 중 내무아문(內務衙門)에 위생국(衛生局)을 설치하여 전염병 예방사무와 의약, 우두(牛痘) 등의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고, 1895년과 1899년에는 「예방규칙」과 「소독규칙」을 제정하였다. 이어서 1899년 3월 24일에는 「의학교관제」를 공포하여 3년 연한의 의학교를 설립하고 1902년 7월 4일에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02년에는 의학교 부속병원을 개원하였고, 1905년 10월과 12월에는 「대한적십자사규칙(大韓赤十字社規則)」(칙령제47호) 및 「대한국적십자사관제급규칙(大韓國赤十字社官制及規則)」(칙령 제54호)을 공포하고 경복궁 영추문 밖에 대한국적십자병원을 개원하는 등 근대식 의료시설이 태동하였다. 이와 같은 병원체계 및 의료위생행정의 변화는 조선정부 및 조선인에 의한 독자적 서구의 의료기술 및 체제의 수용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06년(光武 10)에 일제에 의해 통감부(統監府)가 개설되면서 의료제도 또한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05년의 2월 한국정부의 관제 정비로 내부 지방국 산하의 위생과로 격하되었던 위생국은 1906년 1월에 일제가 장악한 경무국(警務局)으로 이속되었고, 1907년 12월에는 다시 위생국으로 부활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의학체계가 경찰의 관할로 귀속되었던 것이며, 1910년 강제합병 이후의 ‘위생경찰’이라는 식민지적 의료체계의 근간이 되었다. 한편 1907년 3월에는 칙령 제9호로 「대한의원관제(大韓醫院官制)」를 공포하고, 사도세자의 사당 경모궁(景慕宮) 부지의 한편에 대한의원(大韓醫院)을 창설하였다. 대한의원 창설취지가 기존의 광제원(廣濟院), 의학교 부속병원, 대한적십자사병원을 통합하여 의료와 진료를 함께 관할하는 근대적 종합병원을 설립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통감부에 의하여 관립 의료기관이 대한의원으로 흡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관제에 따른 감독자의 구성을 살펴보면 대한의원의 원장을 내부대신으로 하였을 뿐 주요 책임자들은 일본인으로 구성함으로써 의료기관과 위생행정기구 내에서 한국인은 점차 배제되어 갔다.

<표1> 대한의원 관제연혁
제정
1907.3
(칙령 제9호)
원장 고문 의원 교관 학감 약제사 통역관 통역관보 사무원 기사
1 1 17 7 1 9 3 5 10 3 57
칙임 칙임
대우
주임
판임
주임
판임
주임 주임
판임
주임 판임 주임
판임
주임
개정
1907.12
(칙령 제73호)
원장 부원장 의관 기사 교수 사무관 학생감 약제관 부교수 주사
1 1 10 4 6 2 1 4 3 6 38
칙임 칙임
주임
주임 주임 주임 주임 주임 주임
판임
판임 판임
개정
1909.2
(칙령 제10호)
원장 부원장 의관 사무관 교수 약제관 학생감 주사 조수
1 1 12 1 5 1 1 6 17 45
칙임 칙임
주임
칙임
주임
주임 주임 주임 주임 판임 판임

출처 :「官報」1907.3.13, 1907.12.29, 1909.2.26 의 내용을 재편집

일제강점기의 의료체계 : 관영의료체계

대한제국의 대표 관립의료기관인 대한의원은 1910년 9월30일에 ‘조선총독부의원(朝鮮總督府醫院)’으로 개칭되었고, 초대원장으로 일본 육군 군의감(軍醫監) 후지타(藤田嗣章)가 취임하는 등 조직, 인력, 운영 등의 전반이 일본인 중심 체제로 전환되었다. 특히 신설 진료과의 부장 및 약국장에는 현역 군의(軍醫)와 약제관을 취임시킴으로써 병합 후의 유휴 군의를 활용하였다. 개설 당시 총독부의원에는 임상과로 내과, 외과(치과포함), 산과(産科) 및 부인과, 소아과,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등 7개 과를 두었으며, 1911년에는 치과, 1913년 정신병과, 1916년 전염병 및 지방병연구과를 신설하였다. 1917년에는 외과에서 정형외과를 분리하고 1920년에는 내과를 제1, 제2내과로 구분하였다. 지원과로는 약제과, 의육과(醫育科), 서무과를 두었다. 이와 같이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긴축 재정에도 불구하고 의원시설에 대량으로 투자하는 이례적인 상황은 조선총독부의원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기대와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직과 시설의 확충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의원의 숙원과제는 조선인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빈곤한 환자에게 무상으로 치료를 제공하는 시료(施療)를 적극 실시하였다. 그러나 시료환자에 대한 의료행정은 새로운 통치세력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심어줄 수는 있었으나, 총독부의원이 대한의원처럼 태생적으로 고급 의료기관이기 때문에 시료환자에 대한 처우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시료환자를 위한 진료소를 별도로 건축하거나 시료환자를 의학교육의 사례로 활용하는 정황을 살펴본다면, 조선총독부의원의 시료행위를 식민 의료의 정치적 선전도구에 불과하였다고 볼 수 있다.

<표2> 조선총독부의원 관제의 연혁
제정 1910.9
(칙령 제367호)
원장 의관 교관 사무관 약제관 의원 서기 교원 조제수 조수 통역생
1 9 1 1 1 10 24 47
개정 1913.4
(칙령 제56호)
원장 의관 교관 사무관 약제관 부의관 의원 서기 교원 조수 약제수
1 11 2 1 1 5 38 59
개정 1914.6
(칙령 제106호)
원장 의관 교관 사무관 약제관 부의관 의원 서기 교원 조수 약제수
1 11 3 1 1 5 38 60
개정 1916.4
(칙령 제109호)
원장 의관 사무관 약제관 부의관 의원 서기 조수 약제수
1 12 1 1 5 29 49
개정 1919.4
(칙령 제142호)
원장 의관 技師 사무관 약제관 부의관 의원 서기 조수 약제수
1 12 1 1 1 5 29 50
개정 1920.10
(칙령 제149호)
원장 의관 技師 사무관 약제관 의원 서기 조수 약제수
1 17 1 1 1 38 59
개정 1921.8
(칙령 제357호)
원장 의관 技師 교관 사무관 약제관 의원 서기 간호부장 조수 약제수
1 17 1 1 1 1 24 5 1 5 1 59

출처 :「朝鮮總督府官報」1910.9.30, 1913.4.15, 1914.6.20, 1916.4.25, 1919.4.30, 1920.10.6, 1921.8.2 의 내용을 재편집

조선총독부의원이 중앙지역에서 일본의학의 선진성과 시혜성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면, 지방에서 같은 역할을 담당한 것은 자혜의원(慈惠醫院)이다. ‘자혜(慈惠)’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총독부는 지방에 자혜적 구호 및 진료기관을 설치하여 정치적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1909년 육군대신(陸軍大臣)이 한국주차군(韓國駐車軍)에서 약 5만원 상당의 의료기계 및 약품을 지원하는 것을 계기로 1909년 8월 21일 칙령 제75호로 「자혜의원관제(慈惠醫院官制)」와 같은 달 30일 법률 제25호 「자혜의원특별회계법(慈惠醫院特別會計法)」이 공포되면서 1909년 12월에 청주와 전주, 1910년에 함흥 등 3개소에 자혜의원이 개원되었다. 1910년 9월에는 10개소의 자혜의원이 추가로 개원되어 경성을 제외한 13개도에 한 개씩의 자혜의원이 운영됨으로써 의료혜택 범위를 전국적으로 확산하고자 하였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전국 각지에 자혜의원이 설립되었으나, 1922년 조선총독부가 긴축재정 방침을 수립하고 1923년 관동대지진에 의하여 사업비가 축소됨으로써 자혜의원의 신축계획은 일시에 정지되었다. 1924년 행정정리의 일환으로 1925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29호로 「도립의원규정(道立醫院規程)」을 공포하면서, 소록도자혜의원을 제외한 25개 자혜의원과 1개 출장소를 도립의원으로 개편하고 해당 도에서 관리하도록 하였다. 도립의원은 추가로 개설되어 의료행정의 범위는 더욱 확대되었으며, 간도(間島) 연길에도 회령의원 산하의 진료소를 설치하였다.

 
<표3> 1937년 현재 도립의원 개원 현황
명칭 소재지 개원일 명칭 소재지 개원일
청주의원 충청북도 청주 1909.12 군산의원 전라북도 군산 1922.2
전주의원 전라북도 전주 1909.12 남원의원 전라북도 남원 1922.2
함흥의원 함경남도 함흥 1910.1 순천의원 전라남도 순천 1922.2
수원의원 경기도 수원 1910.9 마산의원 경상남도 마산 1922.9
공주의원 충청남도 공주 1910.9 강계의원 평안북도 강계 1922.12
광주의원 전라남도 광주 1910.9 김천의원 경상북도 금천 1923.1
대구의원 경상북도 대구 1910.9 성진의원 함경북도 성진 1923.8
진주의원 경상남도 진주 1910.9 혜산진의원 함경남도 혜산진 1923.11
해주의원 황해도 해주 1910.9 개성의원 경기도 개성 1925.4
평양의원 평안남도 평양 1910.9 신의주의원 평안북도 신의주 1926.12
의주의원 평안북도 의주 1910.9 대전의원 충청남도 대전 1930.6
춘천의원 강원도 춘천 1910.9 철원의원 강원도 철원 1931.4
나남의원(舊 경성의원) 함경북도 나남 1910.9 회령의원 연길출장원진료소 간도 연길 1931.6
강릉의원 강원도 강릉 1912.8 사리원의원 황해도 사리원 1931.7
회령의원 함경북도 회령 1912.8 인천의원 경기도 인천 1932.5
제주의원 전라남도 제주 1912.10 원산의원 함경남도 원산 1933.7
안동의원 경상북도 안동 1912.10 수원의원 이천출장소 경기도 이천 1933.10
초산의원 평안북도 초산 1912.10 수원의원 안성출장소 경기도 안성 1936.3
소록도 갱생원 전라남도 고흥1916.2 홍성의원 충청남도 홍성 1936.12
회령의원 용정출장원진료소 간도 용정 1918.4 북청의원 함경남도 북청 1936.12
진남포의원 평안남도 진남포 1921.8 청주의원 충주분원 충청북도 충주 1937.5

출처 : ‘朝鮮總督府警務局衛生課, 『朝鮮道立醫院要覽』, 1937의 내용을 재편집
※ 소록도 갱생원은 1937년의 도립의원에 포함되지 않지만, 1916년에 자혜의원으로 개원하였기 때문에 목록에 포함하였음.

각 지방에는 도립의원 외에도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으로 운영되는 부립병원(府立病院)이 운영되었다. 1927년의 상황을 보면, 경성순화원(京城順化院)을 비롯하여 부산의원, 인천의원, 원산의원, 목포의원 등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다수의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운영되었으며, 영사관 부속의원과 거류민단립병원으로 운영되다가 1914년 4월 부제(府制)가 실시되면서 부립병원으로 개편된 것이다.

한편, 조선총독부의원은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설립되면서, 1928년 5월 28일부로 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으로 개편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예과에서 기초과정을 배운 학생들이 임상교육을 받아야 할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원시설도 제국대학 부속의원의 수준에 맞도록 확대되었다. 연차적으로 진료동, 수술동, 임상연구동 등이 신축되었고, 1935년부터는 본관 뒤편의 병동을 모두 증개축함으로써 1930년대 말에는 임상 각 과마다 별도의 병동을 확보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의료체계 : 민영의료체계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민영의료체계로는 선교의료시설과 적십자사의 의료시설을 들 수 있다. 1885년 광혜원(제중원의 전신) 설립부터 서양의료 전파에 관여한 개신교의 선교의료는 일제강점기에도 꾸준히 지속되었다. 개신교 교파들은 선교경험의 공유와 효율적 선교활동을 위해 각 교파 간에 선교지역을 분할하였고, 1910년까지 전국의 주요 도시에 9개의 선교병원과 그보다 많은 수의 진료소를 설립하였다. 일제는 선교의료의 기반인 서양, 특히 미국을 의식하여 한일합방 이전까지는 선교의료 쪽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선교의료에 대하여 압박과 제재조치를 가하였다. 대표적인 방책이 1913년 11월 총독부령 제100호로 공포한 「의사규칙」 제1조 제1항 제5호에서 ‘조선총독이 지정하는 외국 국적을 가진 자로써 해당 국가에서 의사면허를 받은 자 중에서 의업(醫業)에 적당하다고 볼 수 있는 자’를 의사자격 조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에 의거하여 일본과 외교적으로 가까운 영국 의사면허만 인정하고 의료선교사의 다수를 차지하는 미국 의사면허는 배척하게 되었다. 또한 1919년에는 「사립병원취체규칙(私立病院取締規則)」을 공포하여 병상 10개 이상의 모든 사립병원에 독립된 격리병사 설치를 의무화함으로써 선교병원에게 큰 재정적 부담을 안겨주었고, 결과적으로 1920년 현재 23개소의 선교병원은 해방시기까지 현상 유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하여 적십자사병원은 전쟁에 참여하는 군대와 태생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는 중요한 의료시설로 운영되었다. 청일전쟁을 통해 적십자 구호반의 효용성을 인식한 일본은 적십자사를 국력배양과 전쟁 준비태세를 갖추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1905년 칙령 제47호 「대한적십자사규칙」에 의거하여 대한적십자사 병원을 설립하고 황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의료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에 의하여 1909년 7월 24일 칙령 제67호 「대한국적십자사관제급규칙폐지(大韓國赤十字社官制及規則廢址)」가 공포되어 대한적십자사는 일본적십자사로 이양되었다. 이듬해 한일합방으로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이하 일적)’로 개칭하고 본격적으로 식민지에서의 적십자사 사업을 운영하였다. 일적은 사원(社員)들의 회비로 운영되었으며 대한제국 황실에서도 적십자사의 인도적 활동이라는 명분에 대해 기부금을 전달하였다. 일적은 주요한 공식 업무로 병원사업과 간호부 양성을 진행하였다. 이후, 1926년에는 대규모의 서민병원을 서울에 건립하여 저렴한 의료수가로 진료하려는 목적으로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병원을 개원하였다. 1930년에는 일본이 대륙에서의 전쟁에 돌입하여 일본군대를 위한 의료시설의 확충이 절실해짐에 따라 1937년 일본적십자사조선본부병원을 조선에서 가장 최신식, 최대 규모의 병원으로 그리고 조선·일본·중국을 통들어 네 번째로 큰 병원으로 확장하였다. 이밖에도 1943년에는 청진에도 병원을 개원하여 북쪽지역의 의료활동 및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으로는 간호부 양성 사업도 지속되었는데, 이는 교육 수료와 함께 12년간의 복무서약을 받음으로써 유사시에 소집하여 전선에 파견토록 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