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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지

1960년대 경제개발과 국토개발은 국가적 현안이었다. 국토개발 가운데 고속도로 건설은 물류수송 뿐만 아니라 인적 교류와 지역개발을 위해서도 절실하였다. 고속도로 연표는 1960년대부터 2005년까지 고속도로 관련 주요 내용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고속도로 건설, 준공, 확장 등의 내용을 시대별로 파악할 수 있다.

  1. 5·3 대통령선거 서울유세 (일부)  1967. 4.29
  2. 제6대 대통령 취임사  1967. 7. 1
  3. 연두기자회견 (일부)  1968. 1.15
  4.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기공식 치사  1968. 2. 1
  5. 경인·경수간 고속도로 준공식 치사  1968.12.21
  6. 연두기자회견 (일부)  1969. 1.10
  7. 호남고속도로 기공식 치사  1970. 4.15
  8.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치사  1970. 7. 7
  9. 뻗어가는 고속도로  1975. 1. 1
  10. 고속도로 건설사업의 추진경위  1970.
  11. 경부간 고속도로 개통의 의의  1970.

고속도로 건설사업의 추진경위

제목
고속도로건설사업의 추진경위
간행물명
도시문제 5-6
연도
1970
면수
6면
생상처
대한지방행정공제회
집필자
내무부 공보담당관실
● 주요국가의 고속도로

예로부터 사람이 있는 곳에 생활이 있었고 생활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사람이 꿈을 담은 길은 그 길과 더불어 뻗어가서 삶의 핏줄을 이루고 의식주와 생활의 지혜를 전하였다. 따라서 길은 생활의 척도였고 민족의 번영과 길의 발달은 비례해 왔다. 프랑시스·베이콘이 말한 바와 같이 편리한 수송수단은 기름진 땅, 번창하는 공장과 함께 국가의 진퇴를 결정하는 삼대요소 중의 하나이므로 원대한 꿈을 지닌 민족이 먼저 길에 눈을 뜨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19세기 말엽에 선을 보인 자동차는 20세기에 들어서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 기동성과 성능은 폭발적인 기세로 전 지구를 휩쓸고 바야흐로 “동력화(Motorization)"의 시대를 빚어내어 종래의 일반도로에 의한 혼합 교통만으로는 자동차가 가진 기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차츰 인식되면서부터 고속자동차 전용도로가 구상되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는 히틀러가 전략적 구상 밑에 건설한 독일의 아우토반(Autobahnen)이었다. 세계 고속도로의 표본이라고 불리우는 이 아우토반이 처음 계속되기는 1910년 무렵이었으나, 1932년 8월에 쾰른(Koln)-본(Born) 간의 20km가 완성된 뒤, 1933년에 다시 7,500km의 계획이 수립되어 1942년까지 9년 동안에 3,859km를 건설하고 제2차대전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그런데 이 공사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에는 연간 1,000km 이상을 건설하였고 공사가 중단된 1942년까지 56억 5천 6백마르크(약 14억 달러)가 투입되었다.

전후 서독은 고속도로 건설사업을 계속하여 1970년에는 총 연장 약 5,090km의 아우토반이 건설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고속도로의 왕국은 역시 자동차 교통이 가장 발달한 미국이다. 1939년에 257.5km(160마일)의 유료고속자동차 도로인 펜실베니아의 턴파이크(Turnpike)가 개설된 뒤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1962년 현재 46,600km가 건설되었고 1970년에는 90,000km를 완공할 계획으로 있다. 미국이 1956년부터 1972년까지 16년간에 계상한 고속도로 투자율은 무려 410억 달러(한화 약 12조원)라는 방대한 규모로 건설되고 있다.

이탈리아는 독일보다 20년이나 늦게 1956년에야 비로소 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미국, 서독 다음으로 연장 세계 제3위의 고속도로 보유국이 되었다. 유명한 태양도로(Autostrada del Sole)는 1,850억 리라(약 2억 8백만 달러)를 들여 1956년부터 1963년까지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그 연장은 738km에 달한다. 이 나라는 관광지로서의 특징을 살려 1,800km의 관광도로를 포함한 4,000km를 1961년부터 10개년 계획으로 건설을 추진, 연간 평균 300-450km의 실적을 올려 이미 3,000km가 완성되었다.

이 밖에 영국, 일본, 프랑스, 캐나다, 네덜란드 등이 다투어 고속도로 건설을 서두르고 있고 남미대륙을 종주할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와 서독,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의 7개국을 가로 세로 연결한 다음 장차 도버(Dover) 해협에 터널을 뚫어 영국까지 직결시키려는 유럽 국제도로, 그리고 아시아 지역을 3개 노선으로 연결하려는 “아시아 하이웨이” 등 국제 고속도로화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는, 바야흐로 고속도로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 우리나라 고속도로 건설의 구상

서울-부산간의 고속자동차 도로를 건설해 보려는 시도는 이미 30년 전인 1940년 무렵 일인(日人)에 의해서 신의주-부산간을 관통하는 ‘미나미’ 도로라는 이름으로 조사, 측량되었다가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중단한 바 있고 그 뒤 1958년에는 후방기지 전략도로라는 이름으로 군(軍)에서 계획하여 기공식을 올렸으나 4·19의거로 좌절된 바 있었다. 그러나 그 계획들은 전략적 의도가 앞섰고 구조도 불완전한 근대적 성격의 것이어서 경제성을 우위로 하는 고성능 현대 고속도로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이 지역에 본격적인 고속도로가 구상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부터였다. 당시 건설부장관이 고속도로의 필요성을 감안하고 건설부의 사업계획 중 서울-부산간, 서울-인천간, 서울-강릉간, 대전-광주-여수간, 1,138km의 고속도로의 건설 장비계획을 세우는 한편 1966년 중부 및 영남 국토건설국에 자금을 영달하여 충주경유 북한강변과 낙동강변의 두 경제권을 연결하는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건설용 차관 획득을 위해 계획조사를 시행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중부국토건설국은 서울-충주-문경-선산-대구-현풍-마산-진해-부산으로 가정한 노선 중에서 우선 서울-수원만을 끊어 “신흥설계공사”에 설계를 의뢰하여 같은 해 11월과 12월의 2개월에 걸쳐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시도 단계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였고 고속도로 업무는 국도계획종합구상과 함께 건설부 국토계획국에서 다시 손질되어 서울-부산선, 대전-호남선, 서울-동해안선, 남해안선(모두 4차선)의 4대 간선 고속도로 계획이 면모를 바꾸었다.

이 계획은 1967년 4월 29일 제6대 대통령으로 입후보한 박대통령의 선거 공약에 반영됨으로써 비로소 표면화되었다. 즉 “대국토건설계획을 발전시켜, 고속도로, 철도, 항만의 건설과 4대 하천(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유역의 종합개발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 중에 착수하겠다”고 발표하고 이어서 동년 5월 1일의 기자회견에서도 역시 위에서 말한 공약내용을 설명하여 ‘대국토 건설사업은 조국근대화 기본설계의 하나’라고 규정, 고속도로는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 강릉, 부산, 목포를 잇는 기간 고속도로 건설’이라고 구체화하였다. 이로써 철도 중심에서 공로 중심으로 전환시키는 교통체계의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고속도로의 건설계획이 처음으로 대두되었을 때 국내의 일부에서는 회의적인 여론도 없지 않았으나 박대통령은 “도로 개발은 철도나 항만개발에 비해 투자효율이 훨씬 높고 우리의 제한된 자금으로 당면한 수송 애로를 타개하는 데는 가장 효과적이며 각종 산업의 발달, 지역개발의 촉진과 생활권의 확대 등 국민경제발전에 유리하다‘는 점을 밝히고 이 사업은 ”조국근대화의 상징적인 사업이며 우리의 자본과 기술, 그리고 순수한 우리의 자금 만으로 이루어 내겠다“고 다짐하였다.

● 기본계획조사 및 착공

서울-부산간의 고속도로 건설계획은 67년 11월 7일 건설부장관이 정부여당 청와대연석회의에서 도로개발계획을 보고한데서 부터 구체화하였다. 보고내용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 중에 시행할 도로개발에 관한 것으로서 그 가운데 서울-인천간, 서울-부산간, 서울-강릉간, 대전-목포간, 동해안 및 남해안 고속도로 건설 10개년계획이 들어 있었다. 이 보고에 대해서 박대통령은 우리나라 2대 경제권역의 중심인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여 경제발전의 첩경이 되도록 하기 위해 2차 5개년 계획기간 안에 우선적으로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고속도로의 건설을 지시했다.

이 같은 지시에 의해 건설부는 부내 각 부서 관계관과 민간건설업체 기술용단 관계자로 “고속도로건설계획 자문위원회”를 발족시켜 회의를 거듭한 끝에 계획조사단의 구성과 계획수립을 서둘렀다. 한편 건설부는 1967년 7월 20일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와 용역계약을 체결하고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기본계획의 조사업무를 위촉하는 등 기초 작업을 추진 중에 있었다.

이 동안 박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계획에 관해서 조사, 보고된 내용을 분석 검토하기 위하여 공병장교와 건설부직원으로 청와대 지휘반을 편성, 작업 지취를 관장하면서 도상계획(圖上計劃), 여러 노선 및 단면도의 비교검토, 현지답사, 건설비의 산출 등 기본조사를 추진해 나갔다.

67년 11월 건설부에서 제출된 고속도로 건설 기본계획 제1차 시안에서는 전선을 4차선으로 하여 총노폭 24m, 중앙분리대 3m, 차도폭 7.2m(片側), 노견(路肩) 2,55m(片側), 내측노견(內側路肩) 0.75m(片側)로 하되 노선은 세 가지 안을 들었다. 제1안은 서울-대전-대구-마산-부산, 제2안은 서울-대전-대구-서울-부산, 제3안은 서울-대전-대구-밀양-부산간을 각각 연결하는 노선이었다. 또한 동년 12월의 제2차 시안에서는 대전-대구간에 추풍령을 경유하는 노선이 새로 추가되었다.

이어서 1967년 12월에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추진위원회가 정식 발족되고 그 소속 아래 계획조사단이 편성되었다. 이 조사단은 종전에 건설부에서 추진해 오던 계획 조사업무는 물론 기술과 재원조달 방안 등 종합적 계획을 수립하는 일을 전담할 기구였다.

계획조사단은 후에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여섯 개의 타당성과 345개의 요점을 수록한 “계획사업무종합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 ① 경제성장에 따른 고속도로건설의 타당성
  • ②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우선착공의 필요성
  • ③ 국민이 받는 생활의 직접이익이 증대
  • ④ 농어촌 개발과 지역격차의 해소
  • ⑤ 국방상의 이익

등 5개항을 들었다. 특히 타당성 검토에서 국방상의 효과를 제시한 점은 종래 논의도지 않던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서울-부산간 우선 착공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 ①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투자는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63%에 대해 이익을 가져오며 GNP의 66%, 공업생산액의 81%에 해당하는 생산액을 가진 우리나라의 중추지역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보아 건전한 투자이다.
  • ② 이 지역에서는 우리나라 전체 자동차 보유대수의 81%가 운행되고 있으며 증가율도 다른 지역보다 빠르다.
  • ③ 집결된 경제력을 1일 생활권으로 연결시켜 승수효과(乘數效果)를 이룸으로써 제3차 경제개발계획에 의한 고도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투자보다도 가장 효과적이며 1971년도(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1차년도) 이전에 완성되어야 한다.
  • ④ 우리나라 해상 수송량의 55%를 담당하는 부산, 인천의 3대 항구를 고속도로로 연결함으로써 수출을 위한 국제 경제에 있어 경제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 ⑤ 강릉, 목포, 부산을 각각 연결하는 3대 고속도로망을 서울~부산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점을 들었다.

경제조사를 토대로 건설의 타당성이 재확인되고 서울~부산간 우선 착공이 확정되자 현지의 토질조사, 터널 예정지의 지질조사 등과 병행하여 노선의 선정 작업이 진행되었다. 조사단은 68년 1월 12일 서울-대전간, 4월 25일 대구-부산간을, 그리고 10월 17일에 대전-대구간의 노선을 확정하고 현지답사에 의한 개략설계 결과 노선 연장 약 438km, 건설비 330억 원 정도의 규모가 될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당시 계획된 폭원(幅員) 구성은 2차선 폭 7.2m의 4차선 중앙분리대 2m, 길어깨 2.5m 측대 0.5m, 노면총폭원 22.4m이다. 그리고 공사는 4년 이내에 완공한다는 계획원칙을 세웠는데 이 건설공사에 소요되는 총공사비의 재원은 재정안정기조 아래서 조달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건설사업이 완공된 후에라도 그에 관련된 세입으로 다른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재원이 계속 확보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계획은 처음부터 외국의 예를 본받아 유료도로로 계획되었는데 우선 서울-수원간(총 연장 30.25km)을 제1공구로 지정하고 모델공사로서 68년 2월 1일 드디어 착공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리나라 국가기간 고속도로 중의 하나인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건설공사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그런데 6월말에 완공을 보게 될 대전-대구간 153km의 공사를 제외한 각 구간의 개통현황과 공사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가. 개통현황

68.12.21(서울-수원) : 24km
68.12.30(수원-오산) : 14km
69. 9.29(오산-천안) : 38km
69.12.10(천안-대전) : 69km
69.12.29(대구-부산) : 123km
70. 6말 예정(대전-대구) : 153km

나. 공사량
공사량
공사종류 구간별
서울-대전(152km) 대전-대구(153km) 대구-부산(123km)
대전공구 황간공구 대구공구
토공 성토(盛土) 34,354,829 10,236,759 3,687,587 5,332,500 7,243,007 8,054,976
절토(切土) 25,900,609 8,335,870 4,093,176 3,807,059 3,166,929 6,497,575
60,455,438 18,572,629 7,780,763 9,139,559 10,409,936 14,552,531
농로(개소) 465 164 33 55 64 149
암거(개소) 354 143 39 42 55 115
터널(개소) 6(2,004m) 3(1,244m) 2(625m) 1(135m)
다. 공사용 장비투입현황(1968.2.1 - 1970.6.30)
공사용 장비투입현황
총(연) 투입수 1968년도 1969년도 1970년도 비고
165만대 246,083 792,232 611,685
라. 취역인원 투입현황(1968.2.1 - 1970.6.30)
취역인원 투입현황
총(연) 투입인원 1968년도 1969년도 1970년도 비고
8,928,000 700,000 7,063,000 1,16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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