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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화학공업의 육성과 대규모 산업기지의 개발

도표로 보는 시기별 산업단지 정책변화

지방공업장려지구의 지정과 국가지원체계의 구축

산업단지 개발은 경제개발의 핵심사업이고 막대한 투자가 소요되는 사업이다. 따라서 원활한 산업단지 개발을 위해서는 행정적‧재정적 지원이 있어야 하지만, 당시는 이러한 제도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 「도시계획법」은 토지개발에는 유용하나 재정지원 장치는 아니었기 때문에 산업단지 개발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와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산업단지 개발은 심각한 자금난을 겪게 되었고, 이는 결국 산업단지 조성의 지연과 중단 및 대규모 미분양사태를 유발하였다.

지방공업개발 장려지구 지정(안)(이리군산청주여수논공), 1978

지방공업개발 장려지구 지정(안)
(이리군산청주여수논공),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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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설치령, 1973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설치령,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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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1970년 1월 1일 정부는 「지방공업 개발법」을 제정하고, '지방공업개발 장려지구'제도를 도입하여 산업단지 개발에 대한 지원제도를 명문화하였다. 「지방공업 개발법」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국가지원을 의무화한 것으로 '정부와 각·시도는 개발지구를 지정한 때에는 용지의 정리, 진입도로 및 용수 등 필요한 지원을 하여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서 공공에 의한 지원을 의무화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법규가 정부지원과 관련하여 '지원할 수 있다'고 정한 것에 비하면 큰 차이가 있다.

지방공업개발 장려지구의 지정과 중앙정부의 투자를 바탕으로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산업단지의 기반시설이 정비되었고, 입주업체에 대한 각종 세제 및 금융지원이 강화되었으며, 공업용지 분양가격을 대폭 인하함으로써 미분양 공업용지 분양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각 시·도 주도의 지방 산업단지 개발정책은 1970년대 초반에 중단되었다.

중화학공업 육성기반 조성

박정희대통령휘호중화학수출진흥, 1976

박정희대통령휘호중화학수출진흥,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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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기지개발공사현판식, 1974

산업기지개발공사현판식,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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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공업을 통한 국가 산업화에는 한계가 있다는 인식하에 1970년대에 들어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국정의 최대 과제로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국정의 지상 목표는 '1980년의 수출 100억불, 1인당 GNP 1,000불 달성'이었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투자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였으나, 당시 우리나라는 자본과 기술이 크게 부족한 실정이었다. 하지만 중화학공업 건설 없이는 자립경제 달성과 상위 중진국으로의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믿었기에 정부는 중화학공업 추진기구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모든 역량을 모으기로 했다.

당시의 정부조직 체계상 공업개발 전담부서는 상공부이지만 당시의 여건 하에서 중화학공업 정책을 상공부만의 힘으로 추진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여러 관련 행정 부서를 관장하고 일사불란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새로운 기구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73년 2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고 각 부처의 장관과 관계전문가로 구성된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설립하였으며, 그 산하에 실무작업을 맡은 '중화학공업기획단'을 설치하였다.

또한 정부는 1973년 3월 14일 건설부의 직제를 개편하여 중화학공업 입지개발 업무만을 담당할 '산업입지국'을 신설하고, 중화학공업의 입지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1973년 12월 「산업기지개발 촉진법」을 제정·공포하였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산업기지 개발을 전담하기 위한 기구로 '산업기지개발공사'를 1974년 2월 1일 설립하였다.

대규모 임해산업단지의 건설

임해공업단지조성에관한국제학술대회홍보입간판, 1974

임해공업단지조성에관한
국제학술대회홍보입간판,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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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학공업육성을 위한 체제 정비 후 정부는 대규모 임해 산업단지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대규모 임해산업단지의 건설은 중화학 공업의 특성상 규모가 클수록 규모경제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 과 항만조건 등 임해산업단지 건설에 유리한 후보지가 국가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좋은 입지조건을 갖춘 곳에 자원을 집중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점 등을 고려한 것이다.

1970년대의 임해산업단지 개발은 철강, 정유 및 석유화학, 비철금속, 조선, 종합기계 등 업종별 전문산업단지 조성에 목적을 두고 추진되었다. 중화학공업은 대부분 소재 생산기능이 강하기 때문에 주도 업종별로 전문산업단지를 조성하여 지역별로 공업을 특화하고자 한 것이다. 문제는 어느 지역에 어떤 업종을 배치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때의 기준으로는 전문 업종별 공장 생산규모에 대응하는 항만조건, 용수조건, 용지 등 주로 물리적 조건을 기초로 삼았으며, 최종적으로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에서 확정하였다.

최종 선정된 업종별 전문산업단지를 살펴보면, 화학공업은 울산·여수, 경공업 수출자유지역은 비인·군산, 철강은 포항·낙동강 하류, 전자공업은 구미, 조선공업은 부산·울산·거제, 중화학공업 수출자유지역은 온산 등이었다. 이중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한 곳은 비인·군산지구의 제2수출자유지역, 낙동강하류의 철강기지 등이며, 온산은 제련산업단지로 개발되었다.

중화학공업기지 조성구역확정, 1974

중화학공업기지 조성구역확정 조성,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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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축기조하의 중화학공업 대책, 1979

긴축기조하의 중화학공업 대책,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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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지역의 대부분은 산업기지개발법에 의한 산업기지로 개발되었다. 「산업기지개발 촉진법」에 의해 1974년에 산업기지로 지정된 최초의 산업단지는 창원, 여천, 온산, 옥포, 안정, 죽도 등 6개 단지로 이미 건설사업이 착수되었거나 중화학공업기지로 조성될 계획으로 있던 지역이었다. 6개 산업기지의 지정이후 정부는 1974년 울산 미포지구와 포항을 산업기지로 추가 지정하고, 1977년에는 전자공업진흥계획에 따라 구미지구를 산업기지로 지정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업도시들이 1970년대 중‧후반에 걸쳐 모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산업기지 지정 당시만 해도 임해산업단지의 개발예정 지역인 포항, 울산, 온산, 옥포, 죽도, 창원, 여천, 북평 등은 한가한 어촌이었거나 농촌이었으며, 1974년 산업기지 개발구역 지정 사실이 발표될 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생소한 곳이었다. 이러한 지역에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국가가 앞장서서 대규모의 임해산업기지를 조성하였고, 이 결과 이들 지역은 각종 제조업에 소재를 생산·공급하는 중화학 공업지대를 형성하였다. 이 같은 개발은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불과 10년 동안에 그 기초가 다져진 것이다. 이 시기를 '임해지역 산업단지 개발기'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