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03년 1월 일단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한인이민에서 한인들을 하와이로 끌어들인 흡인요인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값싼 노동력에 대한 필요였다. 1830년대부터 하와이에서 대규모의 노동집약적인 사탕수수 농장을 시작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이민자들이 노동자로서 모집되었다. 한인에 앞서 중국인들은 1852년부터 하와이에서 노동자로서 일을 하였는데 1882년 ‘중국인 배제법령(Chinese Exclusion Act)’에 의해 그들의 이민이 중지된 후에는 일본인들이 대용 노동자로서 1885년부터 대규모로 이민 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1990년경에는 전체 하와이 노동자들의 80%를 차지하면서 보다 높은 임금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백인 농장주들은 한국, 필리핀, 포르투갈에서 이민자들을 대용 노동자로 받아들임으로써 일본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결국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한편으로는 값싼 노동력으로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인의 파업 파괴자(strike breakers)로서 유입된 것이다. 101명의 한인들을 실은 최초의 이민선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을 출발해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이후 1905년 일본의 제지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이 중단되기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이들 중 84%는 20대의 젊은 남자들이었고 9% 가량만이 여성들이었으며 7% 가량이 어린이들이었다. 이러한 인구 구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빠른 시기에 큰돈을 벌어서 자기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려는 임시체류자(sojourner)의 성격이 강했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결혼 연령의 여성들이 태부족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1910년부터 한국에서 신부들을 구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사진만을 보고 결혼한다하여 ‘사진신부’라고 불렸다. 1924년 미국 이민법에 의해 한인이민이 금지되기까지 총 1,000명의 신부들이 하와이로 그리고 115명의 신부들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서 가정을 이루었다. 총각들만 있던 한인 사회가 신부들의 유입으로 가정을 이루게 되자 2세들이 태어나고 가족 중심의 사회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경제적인 면에서도 한인들은 사탕수수 노동자 또는 도시 주변 일용 노동자로부터 벗어나 보다 장기적인 사업 분야(예를 들어 자영업, 쌀농사, 고구마 농사 등)에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 본토의 철도 건설 현장이나 과수원들에서 일하면 하와이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1903년부터 1915년까지 총 1,087명의 한인들이 본토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사진신부는 한인사회에 반드시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편과 아내의 연령차가 평균 14년이 되기 때문에 한인 부부간에 높은 이혼율을 유발하였으며 부인들이 일찍 과부가 되는 문제점 등을 낳기도 하였다.
초기한인이민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류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미국으로 건너 간 정치 망명자들이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541명가량의 학생들이 신분으로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인 사회의 지적・정치적 지도자로서 부상하였고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된 한인 이민 사회는 1945년 조선이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하와이에는 6,500명 그리고 미국 본토(특별히 캘리포니아)에 3,000명가량이 미국 주류 사회와는 고립된 상태로 존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