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미국으로의 이민은 주한미군과의 관계 속에서 시작되었다. 미군정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나라에는 약 4만 명의 주한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주한미군은 많은 수의 우리나라 여성들과 결혼을 하였는데 당시 한국사회는 국제결혼에 대한 편견이 심했고 이에 따라 많은 한인 여성들이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명가량의 여성들이 미군의 배우자로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1950년부터 2000년까지 미군의 부인으로 이민 간 한인 여성들의 수는 10만 명에 달한다.
1954년 전쟁고아 문제 해결을 위해 해외입양이 시작되었다. 해외입양은 2002년 말 현재 20여만 명으로 추산되고, 이 중 약 10만 명이 미국 가정에 입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양인의 수는 전체 재미한인(200만 명)의 5%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이들에 앞선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일부 대도시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하였던 것에 반해 전후의 국제결혼 여성들이나 입양인들은 미국 전역에 흩어져 미국인 공동체에서 생활하였다. 이들은 오랫동안 한인사회와 미국 주류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외롭고 고립적인 생활을 하였으나 ‘해외입양인연대’, ‘한국인ㆍ미국인 아내협회’같은 단체를 통해 교류와 연대를 강화하면서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시기 한인 이민의 또 다른 흐름은 유학생들이다. 1945년부터 1965년까지 6,000명가량의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눌러 앉거나 또는 끝내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1965년 미국으로의 이민 문호가 활짝 개방되었을 때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는 연쇄이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