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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조선족

구한말~연변조선족 자치주 건설까지

중국에서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재중한인 모태는 19세기 중엽부터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860년대와 1870년대 사이에 조선에서 재해와 흉년이 연속으로 발생하자 많은 이재민들이 사람이 살지 않으면서 비옥한 간도지역으로 대규모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간도지역의 한인 인구는 1860년대에 이미 7만 7천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주초기에는 한인이 통화(通化), 집안(輯安), 장백(長白), 신빈(新賓), 용정(龍井) 등 두만강과 압록강 부근에서 정착하였으나 점차 연변과 기타지역으로 확산하여 중국 동북부 지역에 한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일제 식민지통치 기간에 만주로 한인 인구이동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중국 동북부 지역의 한인 사회는 더욱 확장되었다. 1910∼1918년에 걸쳐 진행된 식민지 정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조선 농민의 소작화와 일본인 지주와 동양척식회사 등에 의한 조선 농민의 체계적인 착취와 궁핍화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만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수는 농민에 비해 매우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은 상해에 임시정부를 만들고 광복군을 구성하는 등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또한 서전서숙, 대성중학교 등 민족학교를 만들어 교육에 힘썼다. 지속적인 인구유입으로 인해 한인 인구는 1910년에 22만 명에 달하였고 1930년에는 60만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일제는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건설하고 중국 동북지역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와 식량기지로 활용하고자 하는 방안을 세웠다. 이에 따라 1년에 1만 호씩 이주시킨다는 계획아래 한인을 집단으로 이주시킨 결과 집단이주로 인해 1930년에 60만 명에 달했던 한인 인구가 1940년에는 1백45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다. 이때 한인들은 토지개혁을 비롯한 소외 계층과 소수민족을 지지하는 모택동 노선을 지지하며 공산당을 도와 해방전쟁에 참여하였다. 한인들이 국민당에 대항해서 공산당을 지지한 이유는 국민당이 한인을 차별하여 한교(韓僑)라 부르며 귀국을 종용한 반면 공산당은 일찍이 한인을 소수민족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당과 결탁한 토비(土匪)들이 한인을 포함한 양민들을 약탈할 때 공산당과 함께 대항했다. 한인은 이전의 항일전쟁은 물론 해방전쟁에서도 인구비례로 볼 때 중국의 56개의 민족 중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신중국을 건설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연변을 위시하여 동북3성 전역에서 해방전쟁에 참가한 한인의 수는 62,942명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전쟁 속에서 목숨을 잃은 한인은 3,550명이나 되는 등 많은 아픔과 희생을 겪어야했다. 그러한 공로로 한인은 이주민족이면서도 토지개혁, 정권건설, 해방전쟁 등 모든 분야에서 중국 공민으로 자격을 부여받았고 신중국을 건설하는 핵심민족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1949년에 소수민족의 민족대학으로는 처음으로 종합대학인 연변대학을 설립하였고, 1952년 9월 3일에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건설하였다.

  • 중국 한민족의 삶(1996) 재생

    중국 한민족의 삶(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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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도로 쫓겨가는 이민들(1983)

    간도로 쫓겨가는 이민들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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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인의 간도 이주에 관한 건에 대한 보고(1910)

    한인의 간도 이주에 관한 건에
    대한 보고(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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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중국 한인학생연합회 학생대회 기념사진(1922),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동중국 한인학생연합회
    학생대회 기념사진(1922),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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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주의 모습-1920년대(1988) 재생

    만주의 모습-1920년대(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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