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으로의 재일한인의 이주와 정착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 통치라는 역사적 조건하에서 진행되었다. 비록 이주의 형태와 동기는 다르더라도 식민지 통치시기에 강제로 끌려와서 착취당했다는 인식은 재일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모국과 거주국과의 관계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재일한인을 구분해 보면 농민층 몰락에 따라 도항한 제1기(1910∼1938), 강제연행에 의해 도항한 제2기(1939~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후 일본에 남게 된 제3기로 나눈다. 종전 이전에 도일한 한인을 구세대(old timer)라고 한다면 1989년 한국의 해외여행 자유화조치로 도일한 한인은 ‘뉴커머’(new comer)라고 불리는데 이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198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를 재일한인 형성사의 제4기로 볼 수 있다.
한일강제병합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일본정부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1882년에 4명, 1909년에는 790명의 조선인이 일본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대부분은 유학생이고 소수가 외교관, 정치적 망명자들이다. 1907년에 도쿄 유학생은 그 수가 거의 5백 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은 일본이 서구문명을 통하여 성공한 이유를 찾고자 하였다. 이들은 학업을 마치기까지의 일시체류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지배하의 재일한인과는 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전에는 일본이 대부분의 산업에서 외국인노동자를 금지했기 때문에 한인 노동자의 유입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당시에도 각종의 육체노동자들이 도일한 것으로 알려져 일본경제가 초기 산업화단계에서 조선인 노동력을 도입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한일강제병합으로 인해 조선인은 일본제국의 신민이 되었고 외국인노동자 입국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파급효과로 활황을 맞은 일본으로 일거리를 찾아 건너가기 시작했다. 일본 자본가들은 국내의 노동력 부족과 임금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저임금의 조선인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했다. 그들은 모집 브로커를 조선 지역에 파견하여 노동자 모집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재일조선인의 수는 1915년의 3,917명에서 1920년에는 30,189명으로 5년 만에 8배가량 증가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 도항하는 조선인이 급증한 것은 일본에서의 유인요인도 있었지만 조선에서의 유출요인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다.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는 강압정치를 시작했고 이때 식민지 경제정책의 중심이 된 것이 토지조사사업(1910년 3월∼1918년 11월)이었다. 일제는 토지의 소유권을 실제로 그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인정한 것이 아니고 그 토지와의 연고관계를 신고한 사람에게 인정해 주는 신고주의를 채택하였다. 신고하지 않은 토지는 일단 ‘국유’로 편입된 후 일본인 지주 및 토지회사에 불하되었다. 당시 대다수의 농민들이 문맹이었고 근대법에 무지했기 때문에 자작농이라 하더라도 토지소유관계를 신고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많은 농민들이 지금껏 경작하던 토지를 잃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20년 조선인 농가 중 자영농이 23%, 반자작이 37%, 소작농이 40%였던 것이 1940년이 되면 각각 18%, 23%, 59%로 바뀌었다. 이렇게 몰락한 농민들은 농촌에서 과잉인구로 집적되어 소작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하는 악순환을 이루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국내의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거나 산간벽지의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해외로 유출되었다.
1920년대에 일제는 조선에서 산미증산계획을 실시하여 조선의 쌀생산은 증가하였지만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욱 많아 조선의 식량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농인구가 증가하였으나 국내의 경제발전 수준이 낮아서 이들을 임금노동자로 수용하지 못하자 상당수가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려 하였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경제와 사회여건은 결코 한인이 이주하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1923년에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에는 한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넣는다고 믿은 일본인 민병대원들에 의해 6천 명 가량의 한인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1929년의 세계 대공황 이후 일본경제는 불경기와 실업문제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고 1931년에 국내 실업자수는 3백만 명에 달하였다. 일본의 실업문제가 심각하자 조선총독부는 일본 내무성의 요청에 따라 1925년 8월에 도항저지제를 실시하여 한인의 도항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도항하는 한인의 수가 줄지 않고 증가하여 1920년의 30,189명에서 1930년에는 298,091명, 1935년에는 625,678명, 1940년에는 1,190,444명, 1944년에는 1,936,843명으로 급증하였다. 이는 조선에서의 생활고가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의 생활고를 피해 일본으로 도항한 사람들은 농촌에서 유출된 과잉 인구의 일부분에 불과하였고 지리적 관계로 일본에 도항한 사람들은 경상도, 제주도, 전라도와 같은 남한지역 출신들이 주류였다. 1923년의 일본 내무성 경보국의 조사에 따르면 이 해 출신지가 알려진 도항자 72,815명 가운데 경상남도 출신이 39%, 전라남도(제주도 포함) 출신이 25% 경상북도 출신이 16%를 차지하였다. 지연과 함께 친분관계도 도항에 영향을 주었다. 1927년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이주자의 73%가 친척 또는 친구를 통해서 일자리를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도항이 일본과 조선을 연결하는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조선에서 같은 지역출신은 일본에서도 같은 지역과 산업에 집중되는 경향을 띠었다.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전쟁을 개시하면서 전선확대에 따른 병력과 일본 본토의 전시산업을 지탱할 노동력 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정부는 1938년 4월에 국가총동원법을 발표하고 1939년 7월에 노동력 동원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39년 9월에 ‘조선인 노동자 모집 및 도항 취급 요강’을 발표하여 강제연행이 시작되었다. 형식은 ‘모집’이었지만 실제로는 강제연행이었다. 탄광, 광산으로의 조선노동자 강제연행이 시작되었고, 후에 철강, 토목산업 등 그 외의 모집분야에도 확대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시작함에 따라 국민징용령을 1944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미 그 전부터 군과 관련된 곳에 조선인 노동자징발과 학도징용이 이루어졌고, 이에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연행된 인원은 724,787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군인, 군속 365,263명을 합하면 조선인 강제연행자 수는 100만 명을 넘는다. 여기에 추가하여 여성자원봉사대의 이름으로 20만 명의 여성이 동원되었는데 이 중 8만 명 가량이 소위‘종군위안부’로 동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