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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자혜의원

회령자혜의원은 1912년 8월에 개원한 자혜의원으로 함경북도와 국경지역의 의료 활동을 담당하였다. 이후 1925년 4월 1일「조선도립의원관제(朝鮮道立醫院官制)」및「도립의원규정(道立醫院規程)」이 시행되면서 회령자혜의원은 함경북도립회령의원으로 개편되었다. 현재 국가기록원에는 회령자혜의원에 관련된 49매의 도면이 소장되어 있다.

명칭 연도 도면수
회령자혜의원(최초) 1912.03 ~ 1919년 추정 1매
회령자혜의원(부지이전) 1919 ~ 1925.03년 추정 48매

[도판1]은 회령자혜의원의 개원 당시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되는 배치도이다. 다른 배치도와 비교해 보면, 유일하게 대지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회령자혜의원이 1912년에 개원하였으므로, 다른 배치도들이 작성되는 1919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전 전의 회령자혜의원은 남문(南門)으로 가는 길과 동문(東門)으로 가는 길이 직접 연결되어 있는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간도행(間島行)’이라고 기재된 도로가 보이는 것이 국경지대라는 입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회령자혜의원은 주로 병실로 사용되는 동원사(東院舍)와 외래진료 및 시료(施療)병실로 구성된 서원사(西院舍)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면의 중앙에는 총 2,483평 5홉(合) 9작(勺)의 부지에 대한 연혁이 기재되어 있다. 동원사 1,396평 7홉 5작 5재(才)와 서원사 640평 2홉 1작 5재는 군용지의 일부였으며, 서원사 서쪽에 붙어있는 갑지(甲地) 335평은 학교조합으로부터 구입하였고 을지(乙地) 111평 6홉은 민유지를 구입한 것이라고 하였다.([도판1] 참조)

이후 1919년에는 새로운 부지로 이전하기 위한 계획안이 작성되었다. 새로운 부지는 회령역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서,([도판2] 참조) 회령시내와 함께 서편 산 위의 급수원으로부터 수도를 공급받을 수 있는 위치였다. 1919년에 작성된 [도면3]에서 당시의 배치 계획을 확인할 수 있다. 남서향 방향의 장방형 대지의 아래쪽에 정문을 두고, 그 안쪽에 본관을 계획하였다. 분관 후면에는 좌우로 긴 병실 3개 동이 복도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제일 후면에는 전염병동을 별도로 구획하여 계획하였다.

1919년에 계획된 청사는 단층의 좌우로 긴 중복도형 건물이었는데, 벽돌조 벽체에 목조 트러스로 바닥과 지붕가구를 구성하였다.([도판4] 참조) 청사의 평면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주출입구가 있는 중앙부에는 외과, 내과, 부인과, 치과, 이비과의 외래진찰실과 원장실 및 약국이 배치되었다. 우측 부분에는 대수술실과 시험실 및 연구실이 계획되었고, 좌측 부분에는 무료진료를 시행하는 외과와 내과가 별도의 출입구와 함께 계획되었다. 전면부의 벽체 높이는 전체가 동일하지만, 지붕의 높이에 차이를 두어 중앙부를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주출입구와 지붕의 원형 첨탑으로 중심성을 확보하고 있다. 원형 첨탑은 유럽 고전건축의 로톤다(rotunda)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석조건물의 원형(原形)을 목재를 사용하여 모방하고 초석과 주두의 형상까지 목재로 표현한 점이 특징적이며, 내부는 목조 트러스로 구성하였다.([도판5] 참조)

[도판6]에서는 1919년의 배치도와 비교하여 진입로와 본관을 제외한 모든 건물의 계획이 수정된 계획을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배치 계획은 1921년에 계획된 시실·해부실이 반영되어 있어 1921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지는 본관이 있는 전면과 병실이 있는 중앙부, 그리고 전염병실과 시료실(施療室)이 있는 후면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전염병실과 창고 등의 부속시설을 제외한 전체 건물은 복도로 연결되었다. 본관은 주진입로를 마주하도록 전면을 향하고 있는 반면에, 각종 병실 및 간호부기숙사는 남향으로 계획하여 본관과 직교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후면의 전염병실은 다른 병실과 고저차를 이용하여 접근동선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으며, 시료실의 우측에는 얼음을 보관하는 빙고(氷庫)가 계획되었다.

함흥자혜의원에서는 추위가 심한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대응하여 타 지역의 자혜의원과 달리 병실에 벽난로(Pechka, ペチカ)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도판7] ‘희령자혜의원일이등병실신축설계도’를 도면, 병실과 병실, 그리고 복도가 만나는 곳에 벽난로를 두어 한 개의 벽난로를 두 개의 병실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구는 복도에서 관리했던 것으로 보이며, 연기는 지붕을 관통하는 굴뚝을 통해 대기 중으로 배출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난방방식 사례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건립한 목조건물에는 페치카 또는 연도를 사용하는 직접난방방식이 1920년대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가 192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 점차 방열기를 통한 증기난방방식으로 대체되는 경향과 일치하고 있다.

[참고도판]
  • 도판1. 함경북도회령자혜의원배치도/B17호, 1912~1919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2. 회령자혜의원급수관배치도/B20호, 1919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3. 회령자혜의원부지지균공사설계도/청8호, 1919상세보기
  • 도판4. 회령자혜의원청사기타신축설계도/청2호, 1919상세보기
  • 도판5. 회령자혜의원신축설계도/현관기타상세도/청4호, 1919상세보기
  • 도판6. 회령자혜의원부지지균공사상세도/B2호, 1919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7. 회령자혜의원일이등병실신축설계도 / B5호, 1919년 추정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