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 황폐화 근본 원인
한국의 산림은 남부 지역에 비해 북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1910년 임적조사(林籍調査) 사업의 결과를 보면 한반도의 성림지는 북부 지역에 81.4%가 집중되어 있었다.16 인구가 많은 남부 지역의 산림은 장기간 온돌에 들어가는 가정용 땔감 채취로 민둥산이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국가 단위 산림자원 통계가 발표된 1927년 임목축적 역시 71.7%가 북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1930년부터 1942년까지 북부 지역에서 총 목재 수요의 68.4%(1930)에서 78.6%(1942)를 공급하였다. 이러한 북부 지역 중심의 산림 분포와 목재생산은 북부 지역의 산림 감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7년부터 1943년까지 16년 동안 북부 지역의 임목축적은 32.3%가 감소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조선총독부의 재정 확충을 위한 북부 지역 국유림에서의 벌채 확대 정책은 한반도 산림 황폐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17
남·북 분단 이전까지는 산림자원의 지역별 편차는 있었으나 일국적(一國的) 관점에서 목재수급을 조절할 수 있었다. 남부 지역의 목재 수요를 북부 지역의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목재를 생산하여 공급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1945년 남·북 분단으로 인해 한국(남한)은 식민지 시기보다 더 헐벗은 산림으로 훨씬 많은 인구를 부양해야 했다. 남북 분단 이후 북한 지역에서 목재공급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인구는 남한이 북한에 비해 약 1.6배 많았으나 산림면적 및 임목축적은 각각 북한의 71%, 57%로 낮았다. 1945년 남한의 ㏊당 임목축적은 16.6㎥로, 2023년에 비해 9% 수준이었다.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고 산림자원이 빈약한 남한의 1인당 임목축적은 4.7㎥로, 같은 시기 북한의 36%에 불과했다.18 미군정 역시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북한에 있는 목재자원의 주요 원천 상실"을 남한 산림 황폐화의 한 원인으로 보았다.19 이런 측면에서 남·북 분단은 우리나라 산림 황폐화의 근본 원인이라 말할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37개월간 남·북한뿐만 아니라 UN 측 16개 국가와 중국이 참전한 6·25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는 매우 컸다. 6·25전쟁으로 인한 전투 병력의 손실만 양측 합계 160만 명이었으며, 한국의 민간인 99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상처를 입었다. 또한 1951년 8월 말 기준으로 한국 측 제조업 부문 건물의 44%, 시설의 42%가 피해를 보았다.20 전 국토가 전쟁터였기에 전쟁으로 인한 직접 피해 역시 전국에 걸쳐 발생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 혼란을 틈탄 도벌, 화전의 확대 등으로 한국의 산림자원은 극도로 나빠졌다.
6·25전쟁이 우리 산림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모두 계량화하기 어렵지만 남·북 분단으로 물려받은 열악한 산림자원조차 더욱 황폐시켜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산림 상태를 만들었다. 6·25전쟁으로 산림 황폐화를 막기 위해 애써 설치한 사방 시설물은 파괴되었고, 여름철 집중 강우로 인한 2차 피해 역시 적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6·25전쟁은 1950년대 우리나라 산림 황폐화의 가장 큰 직접 원인이자 근본 원인이었다.
1950년의 우리나라 인구는 1945년에 비해 25.4%나 증가하였다. 인구 증가의 원인은 북한과 해외 지역에서 온 이주민의 증가 때문이었다. 1945년~1950년의 급격한 인구 증가는 산림자원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1차 에너지에서 차지하는 신탄(薪炭, 장작과 숯)의 비중은 1950년까지 90.5%로 절대적이었고 1960년이 되어서도 62.5%를 차지하였다.21 1945년~1950년간 증가한 453만 명이 사용하는 신탄 소비량은 매년 263만 ㎥로 추정되었다.22 1945년 총 임목축적이 74백만 ㎥라는 것을 생각하면 인구 증가에 따른 추가적인 신탄 소비를 위해 당시 총 임목의 연간 생장량에 버금가는 나무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구의 증가는 단순히 신탄 소비량뿐만 아니라 주거를 위한 목재 소비량과 불법적인 화전 및 도벌 역시 증가시켰다.
인구 증가는 같은 조건이라면 목재와 임산물의 수요를 높여 산림자원을 감소시킨다. 더욱이 필요한 제품을 수입하기 힘들었던 낮은 국가 경제력으로 인해 목재 수요의 대부분을 국내에서 충당할 수밖에 없었던 1950년대의 인구 증가는 산림자원의 감소로 이어졌다. 1950년대까지 인구 증가로 인한 땔감 수요의 증가가 산림에 미친 악영향은 정인욱의 회고에 잘 나타나 있다.
“해방 이후 일반 가정용 연료는 거의 대부분 나무(장작)에 의존하였다. 서울시내에 장작 공급을 위해 청량리역 근처에는 거대한 장작 집하장이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다. 일반 가정에서 필요한 장작은 트럭을 동원해 아무 산이나 들어가 마구 남벌해다가 대도시로 실어 오는 것이었다. 덕분에 산림은 하루가 다르게 황폐해지기 시작하였다. 전경련이 발간한 ‘한국경제정책 40년사’에 의하면 해방 이후 일본과 만주로부터 약 320만 인의 해외 귀환동포가 귀국했고 이북에서 내려온 월남민은 1945년부터 6·25전쟁 이후까지 약 250만 인으로 추산하였다. 이러한 민족의 대이동이 남한의 연료사정을 더욱 절박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북한 지역에서 대량의 피난민이 월남해 오는 바람에 대도시 지역에서 땔감의 소요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그러나 대체 연료가 준비되지 못했기 때문에 장작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23
해방 이후 1960년대 초까지는 경제 및 사회적으로 빈곤과 혼란의 시기였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일본 경제와 관계가 단절됨으로써 일시적으로 심각한 경제적 혼란에 빠졌다. 또한 해방 직후 정치적 혼란과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으로 경제적 혼란은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6·25전쟁은 남아 있던 생산 설비와 교통 기반 시설마저 파괴하여 대다수 국민이 경제적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최빈국(最貧國) 중 하나였다.
1952년부터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산업 생산이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 말까지는 6·25전쟁에 따른 전후 복구로 여념이 없었다. 1950년대 말에 전후 복구가 거의 마무리되었으나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면서 경제 사정은 빠르게 개선되지 못했다. 국민 1인당 국민총소득은 1953년에 미화 67달러, 1960년에도 80달러에 불과할 정도24 로, 국민 대다수는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농촌지역의 경제 여건은 더욱 어려웠다. 1960년대 농업 생산성은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동안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1.4%였다. 같은 기간 2차 산업은 20.9%, 3차 산업은 13.2%의 성장을 보였으나 1차 산업인 농림어업은 2% 성장에 머물렀다.25 농촌 경제는 침체하여 보릿고개 현상이 나타났고 농민들 대다수는 배불리 먹지 못했다. 이러한 농촌 상황에서 황폐된 산지의 자력 복구는 불가능했다. 오히려 가정용 땔감 확보와 경작지 확대를 위해 산림의 황폐화와 전용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황폐 산지를 복구하기 위해 산림을 조성하고 육성하는 정부 정책은 국가의 빈약한 재정과 국민의 관심 부족으로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국은 1945년 해방과 연이은 남·북 분단, 3년간의 미군정 통치(1945.9~1948.8), 한국의 단독정부 수립(1948.8.15.), 3년간의 6·25전쟁(1950.6~1953.7) 및 전후 복구, 4・19혁명(1960), 5.16 군사 쿠데타(1961)로 이어지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미군정은 산림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1946년 식목 행사를 시행하고 이승만정부는 6·25전쟁 기간인 1951년에 『산림보호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산림 황폐화를 막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재정과 행정력 부족으로 실질적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해방 초기에는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규제와 처벌이라는 낡은 우산조차 사라지고 이를 대신할 만한 권력이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정용 땔감을 구하기 위한 국민의 생계형 도벌을 막기 어려웠다. 산림 황폐화의 핵심 원인이 가정용 연료로 사용하기 위한 땔감 채취에 있었고,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대체 연료도 없이 정부가 아무리 "나무 한 토막이라도 베는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26 고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1945년 해방 직후의 극심한 혼란과 6·25전쟁 이후 도벌을 막을 수 없을 정도의 약한 행정력은 정부 스스로가 세운 산림녹화 정책의 이행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