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 황폐화 개요
산림은 재생 가능한 자원이다. 화석연료와 달리 매년 자란 만큼 목재를 지혜롭게 생산하면 인류는 산림에서 목재를 영구히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나무가 자란 양보다 많이 베면 산림의 지속성은 줄어든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산림은 황폐된다. 우리의 산림이 지금처럼 지속성을 유지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채 60년이 되지 않는다. 조선 후기부터 1960년대까지 우리 산림은 지속성이 감소하는 산림 황폐화가 이어졌다.
조선시대 산림은 세금이 나오는 곳이라 왕이 소중히 여겼다. 정도전의 『경제육전』과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말이다. 당시는 세금을 돈이 아니라 산물로 거두었다. 국토의 3/4을 차지하는 산림에서 나오는 목재와 비목재임산물은 국가와 백성 모두에게 중요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우리 산림은 점차 황폐되어 갔다. 17세기 추운 날씨가 이어지자, 사람들은 방마다 온돌을 설치했다. 사람이 사는 곳 주변의 산림은 온돌에 들어가는 땔감 채취로 갈수록 민둥산이 되었다. 매일 주변의 산림이 황폐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나무를 심고 남아 있는 숲을 보호하는 지혜로운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했다.9 사람들은 다음날 더 먼 곳으로 땔감을 채취하러 갈 뿐이었다. 1910년에 제작된 조선임야분포도에 남겨진 한반도 산림의 모습은 우리가 기대했던 금수강산이 아니었다. 1910년 당시 대한민국에 해당하는 지역은 단 21%만이 산림이었고, 나머지 79%는 어린나무가 자라거나 그마저도 없는 황폐한 산지였다. 10
조선임야분포도에서 확인하였듯이 그나마 숲이라 할만한 북부 지역의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산림은 조선총독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벌목되었다. 1927년~1943년 사이에 두 강 유역의 산림이 있는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의 임목축적은 36%, 함경남도의 임목축적은 51%가 사라졌다.11 전국 산림의 ha당 임목축적은 1927년 16.7㎥에서 1943년 13.2㎥로 줄었다. 그나마 산림 상태가 나은 북부 지역이 포함된 결과였다. 2023년 한국의 ha당 임목축적이 176㎥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당시 산림이 얼마나 황폐했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 역시 조선의 산림이 헐벗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재정이 모자라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에 편입되자 돈이 될 만한 숲부터 베었다. 일제시기 조선총독부는 빈약한 산림자원을 보유한 우리 산림에서 과도하게 목재를 생산했고, 산림의 지속성은 훼손되었다.12
일제시기 식민지 산림정책은 임야 소유권의 확립과 1926년 「조선임정계획」으로 대표되는 북부지역 국유림에서의 벌채 확대에 중점이 두어졌다. 최초의 근대적 임야 소유권을 규정한 법률은 1908년 대한제국이 제정한 삼림법에서 비롯되었다. 통감부의 영향을 받아 제정된 삼림법은 임야 소유권을 제실림(帝室林), 국유림, 공유림, 사유림으로 구분하고 부분림 제도와 지적신고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다.13 부분림 제도는 황폐한 국유림을 민간이 조림하여 산림을 조성하면 수익을 국가와 민간사업자가 나누는 제도였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산림정책의 근간이 되는 삼림령을 제정(1911)하고 임야 소유권을 확립하는 과정을 거쳤다. 조선총독부는 삼림법에 따라 지적신고를 하지 않은 임야를 국유로 간주하고 1911년부터 국유림을 요존국유림과 불요존국유림으로 나누는 국유림구분조사사업(1911~1924)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국유림구분조사사업을 시행하면서 국유로 강제 편입된 국유 임야에 지적신고를 하지 않은 조선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요구가 거세지자 1917년 토지조사사업을 종료한 후 임야를 다시 국유, 공유, 사유로 나누는 임야조사사업(1917~1924)을 실시하였다. 임야조사사업의 결과로 임야의 필지마다 경계와 소유자가 확정되고 법적으로 소유권을 보장받는 등기제도가 만들어졌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임야조사사업을 시행하면서 지역주민의 연고권이 있는 황폐한 불요존국유림을 민간에게 무상으로 양여하는 특별연고삼림양여사업(1926~1934)을 실시하였다.14
1945년 광복과 동시에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6·25전쟁 중이던 1953년은 1927년 산림통계가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최악의 산림 상태를 보였다. 산림의 반은 헐벗었고 ha당 임목축적은 5.7㎥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을 딛고 우리나라는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산림녹화에 착수했다. 경제성장이 지속되면서 산에서 땔감을 채취하기보다 연탄을 사서 때는 것이 더욱 경제적인 상황이 만들어졌고, 그 영향으로 산림 황폐화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가정용 연료는 나무에서 연탄으로 대체되었다. 인구는 1970년대 이후에도 계속 증가했지만, 임산연료를 사용하는 많은 농촌인구가 도시로 이주하면서 도리어 임산연료 소비는 감소하였다. 산에 불을 놓아 농사를 짓는 화전은 1979년에 명목적으로 사라졌다. 도벌은 정부의 강력한 단속으로 급격하게 감소했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지자, 국가의 대규모 조림 사업은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배고픈 시절에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봄에 심은 나무를 뽑아 아궁이에 넣어야 했다. 가정용 연료가 장작에서 연탄으로 대체되자 산림 황폐의 윤회가 끊어졌다. 1973년부터 1978년까지 황폐 산지 108만 ha에 나무를 심었다. 전국 산림면적의 약 17%를 6년 만에 녹화한 것이다. 이런 노력을 1987년까지 지속했다. 산림녹화 사업이 추진된 15년 동안 약 205만 ha에 48억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산림 황폐화의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는 것은 효과적인 산림녹화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이행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산림 황폐화는 토지 이용의 장기적 변화를 동반하는 산림전용(deforestation)과 산림의 질적 저하로 표현되는 산림악화(forest degradation)를 포함한다. 이중 오래전부터 열대림을 중심으로 산림 황폐화의 원인을 밝히는 이론적 분석이 시도되었다. 대표적으로 산림전용의 원인을 3가지 계층, 즉 근본 원인(underlying causes), 직접 원인(immediate causes 또는 direct causes) 및 전용원(sources)으로 나누었다.15
여기서는 한국의 산림 황폐화를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직접 원인과 그 배경이 되는 근본 원인으로 구분하였다. 광복 이후 산림 황폐화의 근본 원인을 ①남·북 분단, ②6·25전쟁, ③인구 증가, ④빈곤, ⑤약한 행정력으로 보았다. 6·25전쟁은 남·북한 산림을 황폐시킨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 행정력 및 인간의 도덕적 규제를 마비시켜 산림 황폐화를 더욱 확대한 근본 원인이었다. 즉,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산림 피해보다 간접적인 산림 피해가 더 크다는 측면에서 6·25전쟁을 산림 황폐화의 근본 원인에 포함해 다루었다. 산림 황폐화의 직접 원인은 ①가정용 임산연료 소비, ②화전, ③도벌을 들 수 있다. 이하 각각의 원인에 대해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