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제2차 계획은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과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2~1986)의 경제성장기에 추진되었다. 이 시기는 1979년의 석유 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서거, 군부 쿠데타에 의한 정권 탈취와 민주화 요구가 최고조에 달하는 격동기였다. 경제성장에 따라 국민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환경 보호와 야외 휴양 등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구가 높아지고 주택 건설이 활발해지면서 목재 수요가 증가하였다. 반면 대규모 농촌인구가 도시로 이주하면서 농촌 노동력은 감소하였고, 노동력 부족과 인건비 상승이 이어지면서 농림업의 여건은 더욱 악화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2차 계획은 제1차 계획의 성과를 바탕으로 남은 150만 ha의 황폐 임야를 완전히 녹화한다는 목표에 따라 수립되었다. 그러나 제1차 계획과 달리 2차 계획은 내무부 계획이 아닌 산림청 계획으로 축소되었다. 더욱이 제1차 계획과 달리 제2차 계획은 두 번의 조정(1981년, 1983년)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에 정한 정량적 목표를 대폭 하향하였다.72
이러한 성격의 변화는 제2차 계획을 수립할 당시의 여건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첫 번째로, 이미 제1차 계획을 통해 산림녹화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는 의식과, 권력의 최고 정점에서 산림녹화를 이끌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에 서거한 영향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산업화의 진전과 농림어업 비중의 감소를 들 수 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경제발전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며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시작하면서 농림업의 비중은 급속히 감소하였다. 또한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농촌인구는 경제활동 인구 기준으로 약 40% 수준에서 20%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동시에 농림어업에 종사하는 노동력의 감소는 노동력의 질적 저하와 함께 인건비 상승을 유발하여 임업경영비의 증가를 초래하였다. 실제로 1973년~1979년 동안 물가는 약 2.9배 증가했지만, 농촌의 임금지수는 약 10.2배 증가하여 농촌의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경영수지의 악화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73
세 번째로, 임업에 관한 관심은 하락했지만, 환경보전과 산림의 다양한 공익기능에 대한 욕구는 증대하였다.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성장하면서 임업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점차 하락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국민소득이 증가하면서 조림을 통한 임업소득의 향상보다 환경보전을 통한 ‘국민 삶의 질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제2차 계획이 담고 있는 기본 목표는 제1차 계획의 성공을 바탕으로 국토의 완전 녹화에서 산지의 자원화로 변경되었다. 제2차 계획 서문에서 산림청장은 제2차 계획의 목표 변화를 다음과 같은 대통령의 발언에서 찾았다.
“우리나라 농촌에서도 지금부터 눈을 돌려야 할 곳은 바로 산이라 본다. 산에 대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산지의 자원화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해서 전국의 7할 이상을 차지한 산지의 개발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다.”(제2차 계획 발간사)
제1차 계획의 목표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절대녹화', '완전녹화'였다. 제2차 계획은 어느 정도 산림녹화가 되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산지 자원화'를 새로운 목표로 제시하였다. 제2차 계획의 기본 방침으로 국민조림, 경제조림, 완결조림을 제시하였다. 산지 자원화라는 목표와 관련하여 대단지 조림을 확대하는 경제조림이 핵심이었다. 계획의 기조는 제1차 계획에서 추구한 녹화 치중을 경제림 조성으로, 정신계몽 위주를 기술보급 위주로, 타율적 참여를 국민총력 참여로, 규제 위주를 개발지원 위주로 변화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74
제2차 계획의 중점 시책은 ①산지이용 장기계획 수립, ②대단지 경제림 단지 조성, ③향토 수종의 개발, ④미립목지 및 요사방지(要砂防地)의 일소, ⑤해외 산림자원 확대로 정하였다(산림청, 1979). 산림녹화를 다룬 대부분의 연구가 1~2차 치산녹화 10년 계획을 ‘치산녹화’라는 측면에 중점을 두고 바라보았기에 소홀하게 다룬 분야가 ‘산지이용 장기계획’이다. 제2차 계획의 핵심인 산지이용 장기계획은 10년 동안 593천 ha, 2030년까지 993천 ha의 산림을 다른 용도로 전환할 계획을 담고 있었다. 이를 위해 산지를 보전산지와 준보전산지로 구분하고, 준보전산지 가운데 농용림 목적이 아닌 산지를 농지, 초지, 산업 용지로 전환하는 계획이었다. 계획대로 추진되었다면 산림면적은 대폭 감소하였을 것이다.
1987년 1월 1일 농수산행정과 산림행정 상호 간에 연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산림청의 소속을 내무부에서 농수산부로 다시 이관하였다. 산림녹화라는 최종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보고 산림청을 경제 부처인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은 것이다. 조직 개편과 함께 제2차 계획은 기간을 1년 앞당겨 종료하고 제3차 산림기본계획의 이름 역시 ‘치산녹화 계획’에서 ‘산지자원화 계획’으로 변경되었다.
1. 조림
국토 녹화라는 양적 조림에 초점을 둔 제1차 계획에 이어 제2차 계획 역시 국토 녹화를 위한 조림 사업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추진 과정에서 농촌 인력난과 노임상승, 조림 대상지의 감소 및 기타 조림 여건의 변동 등으로 처음에 수립한 추진계획에 차질이 생겨 결국 조림 계획을 두 차례 조정하고, 제2차 계획을 1년 앞당겨 1987년에 종료하였다. 조정된 조림 계획은 997천 ha로, 처음 계획의 64.7%로 축소되었다. 실적은 966천 ha로 조정 계획의 97%에 머물렀다. 대신 처음 계획에 없었던 천연림 보육 사업 109천 ha를 새롭게 조정 계획에 포함하였는데, 실적은 94%였다. 조림 계획이 축소됨에 따라 양묘 실적 역시 61.7%에 머물렀다. 제2차 계획의 핵심 목표 중 하나인 조림 목표를 대폭 축소하였고, 이를 달성하지 못했음에도 계획기간을 1년 단축하여 제2차 계획을 종료하였다.
조림 정책의 가장 큰 변화는 과거 양적인 조림에서 벗어나 질적인 조림으로 전환한 것이다. 산지 자원화를 위해 분산·파편화된 조림보다는 대단위 경제림 단지를 조성하고자 하였다. 정부는 이를 위해 5,000ha 규모의 80개 경제조림단지를 조성하고 경제수종으로 선정된 수종을 중심으로 조림을 추진하였다. 1986년까지 경제조림단지 실적은 처음 계획의 83.5%인 334천 ha였다.75 또한 정부는 1981년부터 경제림 단지 조성대상지에 대한 약식 토양조사를 실시하여 입지환경, 토양단면, 토양시료 등의 자료를 조사·분석한 뒤 적정한 수종을 선택하여 식수하도록 지원하였다.
2. 육림
제2차 계획에서는 1,011만 ha의 육림 작업을 실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육림 사업의 정량적 목표 역시 수정되어 최종적으로 691만 ㏊로 결정되었다. 이를 위하여 식재와 사후관리를 연계하고 계획적인 육림사업을 시행하였다. 또한 산림녹화 운동의 중심이 정부에서 민간으로 이전되도록 유도하고 정부는 육림 기술 등 간접적인 위치에서 지원을 강화하였다. 이는 과거 정부주도형 산림녹화 사업이 민간 주도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림 후 3년간은 전면 시비를 시행하고 새로운 기술과 장비를 활용한 항공시비법 등을 개발하여 보급하였다. 육림사업의 계획 대비 실적은 전체적으로 90%였다. 이중 풀베기는 97%로 높았으나 시비는 84%, 어린나무가꾸기는 86%에 머물렀다.
3. 사방사업
제2차 계획의 사방사업은 전체 황폐대상지 중 제1차 계획에 의한 실행량을 제외한 부분을 완전하게 복구한다는 목표에 따라 추진되었다. 제2차 계획기간 동안 사방사업을 위하여 연인원 74,650명이 참여한 결과, 산지사방 34,000ha, 해안사방 372ha, 야계사방 223㎞가 종결되었으며 사방댐 54개소가 완성되었다. 특히 새로운 공법을 개발․적용하여 계획된 예산의 25%를 절감할 수 있었다. 이는 주로 야계사방 시에 사방댐을 동시에 추진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였다. 그 결과 사방사업 측면에서 완결성을 기하는 동시에 예방 사방이 가능해진 계기가 되었다.76
| 사업별 | 세부명 | 처음 계획(1979) | 조정계획(1983) (A) | 실적(B) | %(B/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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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업별 | 세부명 | 처음 계획(1979) | 조정계획(1983) (A) | 실적(B) | %(B/A) |
|---|---|---|---|---|---|
| 조림 | 1,500천 ha | 997천 ha | 965.5천ha | 96.9 | |
| 천연림보육 | 116천 ha | 109천 ha | 94.0 | ||
| 양묘 | 3,064백만 그루 | 3,000백만 그루 | 1,851백만 그루 | 61.7 | |
| 양묘 | 풀베기 | 2,500천 ha | 2,129천 ha | 3,139천 ha | 147.4 |
| 치수가꾸기 | 3,500천 ha | 2,841천 ha | 2,611천 ha | 91.9 | |
| 추비 | 4,000천 ha | 1,942천 ha | 1,776천 ha | 91.5 | |
| 간벌작업 | 110천 ha | ||||
| 사방사업 | 산지사방 | 78,000ha | 33,181ha | 36,077ha | 108.7 |
| 해안사방 | 400ha | 157ha | 327ha | 208.2 | |
| 야계사방 | 3,300km | 1,414km | 223km | 15.8 | |
| 사방댐 | 1,373개소 | 1,373개소 | 100.0 |
1. 규제
규제 수단으로는 대단위 경제림 및 천연림 조성을 위한 규제와 산림자원 보호정책을 들 수 있다. 조림을 시행하기 위해 조림지를 개발 지역으로 지정하여 조림 명령을 내리고 집행하지 못하면 정부가 대신 집행하고 비용을 징수하였다. 만약 비용을 변상하지 못하면 강제 분수계약을 체결하고 산주 10%, 조림 시행자 90%의 비율로 나누는 강력한 조처를 하였다. 이러한 강제 분수 제도는 강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황폐된 산림을 복구시키는 데 산주의 역할과 실천을 강조하는 강도 높은 규제 수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산림자원의 보호정책 역시 산주, 마을주민 등 범국민적 자율 보호 체제를 구축하여 인위적 산림 사고를 예방하고자 하였다. 또한 제2차 계획기간 동안 총 22,730건의 도·남벌이 적발되었는데, 전체적으로 1967년~1972년간 발생 건수의 21%, 제1차 계획기간 발생 건수의 49%로 감소하였다. 또한 산불 예방과 조기 진화로 산불 피해를 최소화하였다. 제2차 계획기간의 산불방지 시책은 제1차 계획기간의 시책을 주축으로 하여 마을 단위로 조직된 진화대 활동과 방화선, 경방탑을 확대하는 다각적인 노력으로 산불 피해를 크게 줄였다. 제2차 계획기간 동안 산불 발생 건수는 제1차 계획기간에 비하여 38%, 발생 면적은 50%로 감소하였다.77
2. 홍보 강화
이 시기에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조림에 대한 정부의 홍보 강화로 국민식수 운동을 정착시켰다. 국민식수기간(3.21.~4.20.) 동안 중앙 각 부처, 청, 국영기업체, 지방단위 각급 기관, 마을마다 책임을 부과하여 나무를 심도록 하였다. 또한 육림을 생활화하기 위하여 11월 첫째 주 토요일을 육림의 날로 정하여 모든 국민이 마을과 직장, 가정과 단체, 기관과 학교를 통한 육림사업을 실시하여 조림 이후의 육림에 대한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실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시기 정부가 제공하는 정보의 성격에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 개인의 자율적 참여와 설득이 금지와 강제적 동원이라는 지시 정보를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경제발전에 따른 국민소득 증가, 시민의식의 성장으로 정부 주도의 국민 강제 동원, 금지, 지시 성격의 정보제공은 국민의 저항에 부딪혔다. 둘째, 정보의 내용도 바뀌었다. 식목과 조림보다는 자연보호, 국민 보건과 휴양, 야생동물 보호, 산림이 주는 공익적 편익 정보 등 산림의 정신, 문화적 혜택, 체험적 정보 전달이 본격화되었다. 셋째, 대통령의 식목일 행사 담화가 사라지고 관심 또한 축소되었다. 1980년대에도 초기에는 식목일이 중요 행사로 치러졌으나 대중 매체는 이전처럼 대통령의 담화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관련 기사도 크게 줄어들었다. 넷째, 정보제공 방식도 직접 또는 산림조합 등의 산하 조직을 통한 행정지도에서 행정기관, 직장, 가정, 단체별 자체 식수계획과 자율적 참여로 전환되었다. 결국 제1차 계획기간 동안 금지, 동원, 행정지도 형태의 직접적인 반강제적 권고, 지도, 산림조합 계통과 새마을운동 조직이라는 매개 수단을 통한 정보제공은 제2차 계획기간 동안 시민들의 저항과 부정적 인식에 부딪히면서 점차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위한 권유, 촉진 등으로 바뀌었다.78
김수자는 1960년대 정부의 산림정책과 식목일을 홍보하는 <대한뉴스>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산림정책의 목표는 경제개발, 경제발전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식목일 행사 및 산림녹화 사업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푸른 산' 조성의 궁극적 목적이 전체 생태환경과의 유기적 관계를 고려한 자연환경의 조성이기보다는 '경제발전'의 기반을 확립하는 것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였다. 제1차 계획을 조기 완료하고 수립한 제2차 계획의 목표를 산지 자원화로 정하고, 이를 위해 제2차 계획 동안 593천 ha의 산지를 다른 용도로 전용하는 산지 개발을 계획하였다는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바라보는 산림녹화의 최종 목표가 생태환경보다는 경제발전에 더욱 가중치가 두어졌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