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및 교훈
1973년에서 1987년까지 수행된 한국의 산림녹화 프로그램으로 국토의 약 20%에 해당하는 황폐된 산림을 복구하였다. 같은 기간 동안 한국의 산림면적과 임목축적 모두 뚜렷한 증가 추세로 반전되었다. 이러한 지표는 한국의 산림녹화 프로그램의 성공을 명확히 보여준다. 또한 산림녹화의 효과는 토양 복구, 홍수 예방, 생물다양성 회복, 산림 수자원 및 산림휴양 서비스 증가 등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현재 국토 면적의 63%를 차지하는 산림은 우리나라의 육상 생태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헐벗은 국토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국민 삶의 질을 향상하기는 어렵다. 이런 측면에서 산림녹화는 곧 산림생태계의 복원을 의미하며 산림녹화의 성공은 국가의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국민 삶의 질을 높이는 토대가 되었다.
한국은 산림녹화를 바탕으로 산림면적이 순감소에서 순증가로 전환되어 장기간 지속되는 산림전환(forest transition)을 이루어냈다. 한국의 산림 피복률은 1950년대 중반 35%를 최저점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과거 유럽과 현재 중국, 인도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산림 피복률을 유지하면서 산림녹화에 성공하였다. 한국의 이런 사례는 미국과 뉴질랜드와 유사하지만, 스코틀랜드 3%, 덴마크 4%, 중국 7% 등 산림면적이 10% 미만까지 감소한 국가89 에 비하면 높은 산림 피복 수준에서 증가로 전환된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은 산림면적이 감소에서 증가로 전환되는 데 정부의 역할이 매우 크게 작용한 개도국 최초의 사례로써, 1990~2005년간 중국, 베트남에서 확인하였던 정부 주도 산림전환이 발생한 선행 사례라 할 수 있다.90
산림녹화의 성공은 지속가능한 산림경영의 토대가 되었다. 산림생태계의 복구는 단순히 산림자원의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산림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동·식물은 물론이고 인간의 삶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산림녹화의 성공으로 생물다양성과 산림수자원 서비스가 증대되었다. 인간은 산림에서 목재와 비목재임산물을 얻어 소득을 올리는 동시에 휴양 서비스도 즐긴다. 산업화가 진전될수록, 경제 수준이 향상될수록 인간에게 산림은 자원을 넘어 문화가 된다. 이 모든 기능은 산림의 존재가 바탕이 되어야 발휘된다. 이런 측면에서 산림녹화의 성공은 산림의 생태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기능이 지속 발휘되도록 관리하는 지속가능한 산림경영의 토대가 되었다.
산림녹화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1973년~1987년 동안 무립목지는 77%가 감소하였고 산림면적은 9%, 임목축적은 2.7배나 증가하였다. 산림녹화의 성공과 뒤를 이은 산림관리로 2020년 기준으로 산림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공익가치는 249조 원으로 평가되었다.91 국민 1인당 499만 원의 혜택을 산림으로부터 받고 있다는 평가 결과는 산림녹화 성공의 긍정적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92
한국의 산림녹화 프로그램의 성공으로부터 국제사회와 나눌 수 있는 교훈을 정리했다. 한국의 사례로부터 도출된 교훈이 비슷한 산림 문제를 겪고 있는 개도국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과거 어려운 사회경제적 여건 속에서 한국이 찾은 길이 현재 산림 황폐화 문제에 직면한 개도국이 새로운 해답을 찾는 데 유익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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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최고 통치권자의 지속적인 관심과 산림녹화를
국정과제로 다루는 주류화(mainstreaming)이다.당시 대통령은 한국의 산림녹화 프로그램의 계획, 이행, 조정 등을 권력의 정점에서 이끌었다. 대통령은 산림녹화 프로그램이 효과적으로 이행될 수 있도록 농림부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하여 산림정책의 기획과 집행을 일치시키고 국가 재정과 행정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조정하였다. 또한 당시 산림녹화 프로그램을 한국의 최우선 국정과제인 경제개발계획, 새마을운동, 국토종합개발계획 등과 연계시켜 국정 현안으로 다루도록 주류화하였다. 산림녹화가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자리를 잡게 되자 국가 재정이 지속적으로 투입될 수 있었다. 또한 조림, 사방, 화전정리를 위해 중앙과 지방의 행정력과 기술력이, 산림보호를 위해 경찰력이 집중되었다. 한국의 사례는 경제 수준이 낮은 개도국이 산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고 통치권자의 강한 리더십과 산림 이슈를 국정과제로 주류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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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정부 스스로 산림 황폐화의 원인을 진단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종합 대책을 수립하는 주인의식
(ownership)이다.당시 한국 정부는 산림 황폐화의 직접 원인이 가정용 임산연료, 도벌과 화전이고, 이러한 행위를 이끄는 근본 원인이 빈곤과 약한 행정력에 있다고 파악하였다. 한국 정부는 빈곤을 해결하기 위하여 1962년부터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가정용 연료는 화석연료로 대체되었고 임산연료를 주로 사용하는 농촌인구가 도시로 이주하면서 산림 황폐화의 가장 큰 근본 원인이 해결되었다. 도벌 방지, 화전정리, 산림자원 조성과 같은 임업 문제는 양묘・조림・연료・소득을 연결한 종합적인 산림녹화 프로그램의 수립과 국가 주도의 행정력・경찰력・기술력을 집중하여 해결하였다. 대책 수립보다 중요한 것은 이행이다. 말로만 하는 정책이 아니라 수립된 목표의 이행을 결과로 보여준다는 강력한 책임행정과 성과행정은 산림녹화 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한국의 산림녹화 성공 경험은 빈약한 경제 수준에서도 정부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산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교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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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명확한 정책 목표의 제시(setting clear
goals)와 국민적 역량을 끌어내는 비전 공유
(sharing vision)이다.당시 한국은 산림 황폐화로 인해 나빠진 경관 외에도 한발, 홍수, 토양 유실 등 자연재해를 연례행사처럼 겪고 있었다. 산업 부문의 가시적인 성장과 상반되는 민둥산의 모습은 잘 사는 나라로 가기 위해 해결되어야 할 필수 과제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때에 향후 20년간 헐벗은 263만 ha의 산림을 완전히 복구하고 일차적으로 10년간 100만 ha에 나무를 심어 선진국의 상징과도 같은 울창한 산림을 조성하자는 정부의 명확한 미래 비전의 제시에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공감대를 국민식수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나무를 심는 것이 애국’이라는 도덕적 설득을 강화하였다. 정부는 매년 1~2월 조림 대상지를 선정하고 3월부터는 대통령 담화를 시작으로 산림녹화와 산림보호의 필요성을 각 부처의 행정지도, 산림계원의 지역주민 교육, 대중 매체를 통해 전파하였고 매년 4월 5일 식목일은 그 정점을 이루었다. 즉, 한국의 사례는 국민의 관심 속에서 산림녹화 프로그램을 장기·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정책 목표와 비전 제시, 국민의 정책 수용성을 높이는 체계적인 홍보 전략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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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핵심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부문 간 협력
(cross-sectoral cooperation)이다.당시 산림 황폐화의 가장 큰 원인은 가정용 난방과 취사로 쓰이는 막대한 임산연료였다. 임산연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연료림 조성 정책은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가정용 임산연료를 대체하는 방안이 필요했다. 에너지를 수입할 경제력이 부족했던 1950년대까지 임산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국내의 부존자원은 무연탄이 유일했다. 에너지를 담당하는 상공부는 광산을 개발하여 석탄 채굴량을 늘리고 연탄을 만들어 가정용 연료로 공급했다. 1950년대 말에 이미 임산연료의 수도권 반입을 막고 대도시부터 가정용 연료를 연탄으로 대체하였다. 고도 경제성장이 지속되고 농촌까지 도로가 놓이자, 농산촌의 가정용 임산연료까지 연탄으로 급속히 대체되었다. 당시 경제 상황과 농산촌의 실태를 반영한 상공부의 에너지 정책과 산림청의 연료림 조성 정책이 효력을 발휘하여 제1차 계획이 완료되는 1978년에는 1차 에너지원에서 신탄이 차지하는 비율은 8%로 감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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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정부와 민간의 파트너십(Public-Private
Partnership)이다.1973년 당시 산림의 73%는 사유림이었고 산주 1인당 산림면적은 2.6ha로 매우 영세했다.92 황폐된 산지의 대부분은 사유림이었고 산주의 대부분은 산림녹화의 주체가 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하였다. 정부는 산림녹화를 추진하려는 정책적 의지는 매우 컸지만, 이를 실행할 만한 충분한 재정을 보유하지 못했다. 결국 정부 정책은 한정된 국가 재정을 바탕으로 산림조합, 산림계 등 민간 부문과 협력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정부는 산림녹화 사업에 참여하는 마을주민들에게 경제적, 심리적 보상을 제공하였다. 사업에 참여하여 얻는 노임과 연료림의 이용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부포상은 마을 간 경쟁과 자발적 참여를 유도했다. 정부는 산림계로 대표되는 마을주민에게 새마을운동과 산림녹화 참여의 필요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설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행정적 동원과 주민의 자발적 참여라는 이중성이 존재했다. 당시 상황에서 정부가 주도하고 민간 부문이 수용하는 파트너십은 사업의 효과를 가져왔다. 산림녹화 사업의 핵심인 양묘, 조림, 사방, 연료림 조성 사업은 산림계와 산림조합의 참여로 성과를 창출했다. 산림 황폐화 문제에 직면한 나라가 지역사회와 협력하기 위해서는 지역민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일자리와 소득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하고, 사업의 가치와 비전을 지역민과 공유하고 이행하는 행정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제공한다.
산림녹화 프로그램의 놀라운 성과 뒤에 가려진 그림자가 있다. 1970년대 산림녹화 정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절대녹화'였다. 당시 치산녹화 사업을 총괄 지휘했던 김현옥 내무부 장관은 군인 출신으로, 목표가 정해지면 밀고 나가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는 '불도저'의 이미지가 강했다.93 장관은 '치산녹화'를 '푸른유신'94 으로 인식했고, 산림청장은 '절대녹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국민의 자발적 의무조림을 요구했다.95 '절대녹화'가 함축하고 있듯이 당시는 산주가 어떤 나무를 심어야 할 것인가를 선택하기 이전에 정부와 국민이 주도하여 단기간에 나무를 심어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정부는 산림녹화 주체로서 산주의 의지와 역량을 믿지 못했고 정부 주도의 산림녹화를 추진했다. 당시 국가 산림의 73%를 소유한 대부분의 산주는 스스로 산림을 경영하기보다는 국가 주도의 산림녹화 정책에 순응하였다. 그 영향은 현재까지 지속되어 임업을 주업으로 하는 전문 임업경영인은 부족하고 국민경제에 기여하는 임업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계속 줄어들고 있다.
산림녹화에 성공한 지금, 정부는 산림의 공익기능과 경제기능을 조화롭게 발휘하는 지속가능한 산림경영을 추진하고 있다. 산림의 지속성을 유지하면서 국민의 목재 수요를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전문 임업인의 육성과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임업의 기여도를 증진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