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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향한 여섯발의 총성 그리고 그후

그들은 왜 김창룡에게 총을 겨누었는가?

1956년 2월 27일에서 3월 1일까지 육군특무부대는 사건의 피의자들인 허태영, 송용고, 신초식, 이유회, 도진희 등에 대하여 여러 차례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였다. 신문은 김창룡저격사건의 경위와 저격당시의 상황진술, 지프차 처리과정에 따른 도진희의원의 사건과의 관계 유무, 다른 배후세력의 유무에 집중되었다.
허태영의 운전병이었던 이유회는 김창룡 저격에 가담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는 당시 사령관이었던 허태영대령의 지프차 운전수로 오기 전 1955년 4월에서 7월경 허태영 집에서 송용고와 신초식을 알게 되었고, 허태영의 운전수로 있게 되면서 이들과는 상관부하를 초월한 형제이상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하였다. 1955년 9월중순경부터 김창룡을 살해할 계획을 논의하였는데 암살계획이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1월 23일 10시경 송용고가 부산에서 상경하여 합류한 이후이고, 자신은 단순가담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당시 김창룡 저격 사건을 계획한 허태영은 범행동기, 범행모의 과정 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허태영은 김창룡이 육군특무부대장으로 자기에게 부여된 군사안전보장에 주력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군대기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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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허태영은 군의 고급장교들에 대한 비행을 조사하여 입건함으로서 군내부에 불안을 주는 점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충고를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피의자심문조서(허태영) 1956년 2월 28일  피의자심문조서(허태영) 1956년 2월 28일

그러는 가운데 1955년 10월 하순경부터 허태영은 김창룡을 제거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고, 그 실행인으로서 적당한 인물을 물색 중 과거 특무부대 재임시부터 심복부하로 있던 신초식으로 하여금 김창룡을 제거하자는데 동의를 얻어 내었다고 진술하였다.
구체적으로 1955년 11월 초에는 시내 남산동 요정에서 강문봉중장, 김○○ 준장과 김창룡이 회식한다는 정보를 미리 탐지한 허태영은 이 기회에 김창룡을 살해하려 했으나 목적을 달성치 못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암살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다 실패하였다고 진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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