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건축 도면들은 사라져버린 우리의 과거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중 하나이다. 특히 19세기 말 이후 급격하게 서구의 근대 문명과 건축의 이식을 경험했던 역사적 사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이며, 해방이후 전쟁과 급격한 도시의 발달을 거치면서 지금은 사라진 당시 건축물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근대 건축물은 비록 급격한 이식의 산물이었고 한국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서구인이나 일본인에 의해 주도되긴 하였지만 이 또한 한국의 현대 건축과 도시의 원풍경을 만들어내 하나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때, 아직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뿐 아니라 이미 사라져버린 근대 건축물에 대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근대 건축물과 관련된 근대 건축기술과 근대 건축계획 등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당시의 건축물 및 도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일제시기의 건축 도면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일제시기 건축 도면들을 통해 근대 초기 건축물의 건립 당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생산된 건축 도면의 분석을 통해 건물이 건립될 당시의 계획 형태, 내부 공간의 활용 방법 등을 알아낼 수 있다. 특히 1900년대 초반의 건물들은 건립된 후 100여년이 지나면서 많은 변형이 있었기 때문에 초기의 건물 내외부의 모습을 확인하고 복원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일제 시기 건축 도면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이미 멸실된 건축물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도시 풍경을 재구성할 수도 있다.
전통시대에서 근대로의 이행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일제시기 건축도면이 갖는 가치는 매우 크다. 근대 시설물들이 기존의 대형필지나 작은 필지들을 합필(合筆)한 대지에 신설되는 상황은 전통도시가 어떻게 근대도시의 기능을 수용해나갔는지를 보여준다. 이전 시기의 재래(在來)건축물이 근대적 용도에 맞추어 전용된 상황이 도판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근대적인 방식으로 실측되어 작성된 이러한 도판들을 통해 전통 건축물의 원형과 변화과정에 대해서도 추정 가능하다. 또한, 한국전쟁과 이후의 개발을 통해 변형되기 이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치안시설 관련 도면은 각 지역 중심부에 세워졌던 식민 통치 시설의 입지와 건축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경찰력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주요 특징으로 그 관련시설 역시 전국적으로 대량 보급되었다. 지방의 경우 초기의 치안시설은 기존의 청사건물이나 관아건물을 전용한 경우가 나타나며, 주요도시에 설치되었던 일부 경찰서의 외관은 권위적인 형태로 계획되기도 하였다. 파출소의 경우 작은 시설이지만 주요 도로에 바로 면하고 있어 당시의 가로(街路)의 풍경을 조성할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일반 생활과 밀접한 시설이었다.
특히 경성에는 치안시설의 중앙기관이 현재의 세종로인 광화문통 주변에 주로 입지하였고, 파출소의 경우에도 주요 도로에 면하여 설치된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91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그림1]은 경성 내 효교, 석교, 금교, 십자교 순사파출소 등의 위치를 표시한 것으로 파출소의 설치상황 뿐 아니라 서대문 인근, 경복궁 인근, 종로 5가 인근의 도시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한, 경찰관강습소나 경기도 순사교습소, 경찰참고관 등의 배치도는 각 시설의 입지뿐 아니라 육조거리의 근대기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당시의 건축물에 대한 양상과 도시의 모습 이외에도 일제시기 건축도면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근대기 신건축 기술의 도입 과정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전통 시대에 주요한 건축 재료는 흙과 나무였으나, 근대 문물이 수용되면서 건축 재료 또한 근대적인 재료, 즉 벽돌, 콘크리트 등이 본격적으로 사용 되었다. 특히, 기존에 없었던 근대적 기능을 요구하는 시설인 경찰서, 파출소 등이 제도적으로 도입되면서 사용된 새로운 건축 기술과 건축 재료의 발달 과정을 도면에서 확인할 수 있어, 관련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