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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청사(광화문)치안시설·전매시설

조선총독부 청사(광화문)의 공사와 건축계획의 특징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식민통치 기관의 설립을 위하여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朝鮮総督府設置ニ関スル件)>을 공포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입법 · 사법 · 행정기구는 모두 조선총독에 직속되었다. 1910년 9월 30일에 칙령 354호로 <조선총독부관제(朝鮮總督府官制)>가 공포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중앙 조직은 각 부(部)․국(局)을 감독하는 정무총감(政務總監) 아래, 총독관방(總督官房) · 총무부(總務部) · 사법부(司法部) · 내무부(內務部) · 탁지부(度支部) · 농상공부(農商工部)로 구성되는 1관방 5부제로 구성되었다. 각 부(部)에는 장(長)으로 장관(長官)을 두고, 국(局)에는 국장을 두었다.

이와 같은 행정 조직에 맞추어 총독부와 중앙기관의 청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행정 초기에 급격한 변화에 따른 식민정권에 대한 반발을 줄이는 한편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이들 청사를 대부분 신축하지 않고 기존의 중앙관아, 관찰부나 일본이사청 등의 건물을 전용하여 사용하였다. 총독부 역시 남산 왜성대(矮星臺)에 위치하였던 기존의 통감부 건물을 전용하여 사용하였는데, 농상공부 등 각부서의 통합을 위해 1910년, 1911년에 지속적으로 건물이 증축되었다. 그러나 정동 소재의 청사가 소실(燒失)되는 사건이 있은 후, ‘청사의 산재(散在)로 인한 집무 불편 및 노화’를 이유로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이 추진되어 1926년 신청사가 경복궁 내에 낙성되게 된 것이다.

신청사 건립을 위한 준비는 1911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이 180만원의 신축청사 예산을 메이지(明治) 정부에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사전조사를 통해 경복궁의 광화문과 근정전의 중간 위치가 청사의 터로 선정되어 1912년 경복궁의 소관이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었고 이후로 경북궁내 건물의 이전 및 철거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은 동쪽으로 이전되었고, 흥례문(興禮門)과 그 회랑 그리고, 금천(禁川)과 영제교(永濟橋)는 철거되었다.

신청사 건립 준비는 조선총독부 조직 내에 1912년 신설된 토목국 산하의 영선과가 맡게 되고, 신청사의 설계는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에게 의뢰하였다. 게오르그 데 라란데는 독일 베를린 근교 히르쉬베르크(Hirschberg) 태생으로 건축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베를린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여 오스트리아 빈과 독일의 베를린에서 건축 활동을 하였다. 당시 독일의 식민지였던 중국의 칭타오(靑島)로 진출한 게오르그 데 라란데는 1903년 동료 건축가의 요청으로 일본에서의 건축 활동을 시작하였다. 게오르그 데 라란데가 신청사 설계 도중이었던 1914년에 죽음을 맞게 됨으로써 그가 작성한 기본설계를 바탕으로 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郞, 동경제대 건축가 졸업)가 5층 규모의 양식(洋式) 석조건축의 신청사 설계를 완성하였다. 노무라는 대만 총독부 신청사 건립에도 참여하였던 인물로, 이후 설계고문 촉탁으로서 신청사 건립에 관여하게 된다.

새롭게 조성되는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총독정치의 상징적인 건물이었으므로, 대규모의 건축물로 계획되었고, 권위적이면서 영구적인 청사로 계획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신청사 계획에는 조선 내 최고기관으로서 조선총독부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성과 기념비성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배치와 평면, 입면의 계획에서 그 특징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배치계획에서 이러한 특징을 살펴보면, 조선의 중심 시설인 경복궁 내에 설치되었다는 입지 조건 외에도 도시의 중심축인 광화문 앞 육조거리를 건물의 중심축과 일치하도록 설계함으로써 신청사의 기념비성을 극대화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도시의 시작 혹은 중심에 신청사를 두고자하는 의지의 반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도판1] 참조) 또, 내부공간의 구성을 보면, 정면의 주출입구와 중앙 홀을 중심으로 하는 가로축과 양 측면의 부출입구를 중심으로 한 세로축을 중심으로 엄격한 日자형의 대칭 구성을 함으로써 상징성과 기념비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축 상의 위계질서를 활용한 기념비성은 입면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입면에서는 주축(主軸)뿐만 아니라 부출입구를 활용한 부축(副軸)을 중심으로 수직적인 요소와 수평적인 요소들이 서로 율동적인 반복과 대조를 이루면서 공간이 분할되었고, 엄격한 질서 속에서 전체적으로 통합되어 통일감 있고 위엄 있는 입면을 완성하였다.([도판2] 참조)

  • 도판1. 조선총독부(경복궁)부지평면도, 1930년대 초중반 추정 상세보기
  • 도판2. 조선총독부신청사설계도 / 좌측면도, 1915~25년 추정 상세보기

상징성과 기념비성 외에도 환경을 고려한 현실적인 고민이 신청사 계획에 반영되었다. 평면에 중정을 둔 계획은 신청사와 같은 대규모 건축에서 채광과 환기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베란다를 설치하는 계획은 영국이 인도에 세운 제국양식의 식민지 건축에서 차용한 것으로 여름의 더위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청사는 1916년 6월 26일 치러진 지진제(地鎭祭)와 함께 착공되었다. 기초는 말뚝기초로 말뚝은 압록강 기슭에서 잘라온 지름 8치의 낙엽송 9,388본이 사용되었다. 말뚝기초의 깊이는 15~26자 정도였는데, 기초공사는 1916년 7월에 착수하여 1917년 3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벽돌조로 계획하였던 처음 설계와는 달리 채광과 통풍 · 경비 · 지진에 대한 대비를 고려하여 철근콘트리트조가 선택되었다. 골조공사는 1917년 6월에 시작되었으며 콘크리트조의 총용량은 3,248입평, 철근 중량은 1,220여톤으로 규모가 거대한 공사로 매일 800여명의 노동인력이 투입되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신축공사는 조선총독부 직영공사 체제였으나, 공사 초기에는 당시의 시공회사였던 오쿠라구미(大倉組)와 시미즈구미(淸水組) 경성지점이 동원되었다. 오쿠라구미와 시미즈구미는 기초공사와 골조공사에 각각 동원되었는데, 1918년 1월 비용과다와 공기 문제로 조선총독부의 직영체제로 전환하게 되고, 1920년 7월 10일 정초식(定礎式)과 1923년 5월 17일 상량식(上梁式)을 거쳐 1926년 10월 1일 조선통치 기념일인 시정기념일에 맞추어 낙성식(落成式)을 거행함으로써 10년간의 긴 공사를 마무리하고 신청사가 준공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에는 그 당시 구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재료들과 국내·외에서 자유롭게 구한 장식재로 공사를 진행하였다. 외벽 표면은 서울의 동대문 밖 창신동(昌信洞) 채석장의 화강석을 사용하여 마감하였으며, 이밖에도 멀리는 황해도 금천군, 평양, 원산 등지의 대리석, 석회와 가깝게는 한강의 자갈과 모래가 신축공사에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는 야하다(八幡)와 오사카(大阪)에서 철근을 가져와 사용하였고, 시멘트는 오노다(小野田)시멘트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 외의 장식철물 · 문철물 · 가구 · 공예품들은 미국 · 영국 · 독일 · 스위스 등지에서 수입하였다.

완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5층의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그 크기는 전면 72간(間) 4푼(分)(약 131m), 측면 39(間) 6푼(分)(약 70m), 건평 2,219여 평, 연건평 9,471여 평에 달라는 근세부흥식(近世復興式) 즉, 르네상스(renaissance) 양식의 건축물이었다. 건물의 평면은 두 개의 중정을 갖는 대칭 형태로 계획되었으며, 입면은 전체에 화강석을 두른 고전적인 외관으로 높이는 정면 중앙부의 경우 76척(尺) 7촌(寸)(약 23.3m), 첨탑 상부까지는 180척(약 54.7m)였다. 신청사는 한국에 지어진 몇 안 되는 양식(洋式)석조건축의 걸작으로서 10년의 세월동안 많은 재력을 소비하여 당대의 최고의 건축기술이 반영된 건축물로 평가 받았다.

준공 이후 19년간 조선총독부의 청사로 사용된 신청사는 1945년 8월 독립을 맞아 미군정청 청사로 전용되었다. 미 제24군단의 사령부로서 당시 정치 행정의 무대가 되었던 조선총독부 청사는 3년간의 미군정이 막을 내린 1948년 8월 15일부터는 중앙청으로 이름을 바꾸고 대한민국 정부청사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청사는 북한 인민군의 청사로 사용되다가 인민군이 퇴각하는 길에 지른 불로 내부가 완전 소실되었다. 이후 간헐적으로 사용되던 청사는 1961년 박정희 정부에 의해 복구계획이 수립되어 1962년 11월 22일에는 ‘중앙청 복구 개청식’이 거행되고 중앙청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다. 군사정권 이래로 중앙청으로 사용되던 청사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앙청사로 이전하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를 시작으로 개축공사가 개시되었다. 이에 따라 1983년 시작된 내부 공사를 거쳐 1986년 6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전용되었던 청사는 1993년 11월 철거가 확정 발표되었고, 1995년 8월 15일 첨탑부터 철거가 시작되어 1996년 12월 완전히 철거되었다.